이도우 장편소설(2018)
입시 학원 미술 강사로 일하던 해원은 사생대회에 나갔던 자신의 학생이 자신보다 우수한 학생의 그림을 망치기 위해 본인의 그림 뒷면에 검정 파스텔을 칠한 후 그 학생의 그림에 문질러 제출한 것을 알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직장을 그만두고 이모가 있는 강원도 혜천으로 내려온다. 해원은 겉으로 ‘나는 누군가를 가르칠 자격이 없는 사람인 것 같아’라고 말했지만 아래의 독백처럼 그녀는 직면해야 할 진실로부터 피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며칠 전 새벽, 잠이 깼을 때 해원은 하마터면 왈칵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이유 없이 슬퍼지거나 울음이 터진다는 건 좋은 일도 아니고, 한밤의 감상이라기엔 스스로 나약함을 증명하는 것 같아서 싫었다. 아니, 이유 없이 슬퍼진다는 표현 자체가 틀렸다. 가슴에 손을 얹고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 사실은 이유를 알지.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으니깐, 외면하고 싶으니까 모르는 척할 뿐이다.
<해원의 독백 중에서>
고향에서 독립 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고교 동창 ‘은섭’과 우연처럼, 운명처럼 해원은 사랑에 빠진다. 은섭의 책 소개는 담백하지만 미소를 머금게 했다. 또한 그의 비공개 블로그 글에는 첫사랑 해원과의 사랑의 설렘, 그녀에게도 미처 고백하지 못한 아련한 추억들이 담겨있다. 왠지 남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것 같은 짜릿함이 느껴졌다.
둘의 사랑을 보며 설렘에 두근거렸다가, 귀엽기도 했다가, 서로에게 건네는 웃음에 행복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랑에 어떻게 핑크빛만 있으랴. 그러나 이 둘의 사랑은 괴로운 감정마저도 파스텔 톤으로 느껴졌다.
혼자일 때 더 잘 보이는 것들이 있고, 외로움에서 배우는 일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기대하는 바가 적을수록 생활은 평온히 흘러가니까. 진정으로 원하는 게 생기는 건 괴롭다.
하지만,
나라고 욕망이 없을 리가.
산에서 H와 키스했다. 하마터면 정신이 나갈 뻔. 더 이상 농담으로 말할 수 없다는 건 심각하다는 뜻이다. 눈동자 뒤에 그녀가 살기 시작했다. 눈을 감아도 소용이 없다. 계속 보이니까. 사라지지 않는 잔상의 괴로움, 담요에 감싸인 그녀의 모습. 온종일 입술에 맴도는 첫 키스의 감촉.
<은섭의 일기 중에서>
해원과 은섭의 사랑에는 서투른 첫사랑의 안타까움이나 울며불며 본인의 밑바닥까지 드러내는 연애의 일면은 찾기 힘들었다. 이들의 연애는 잔잔하고 절제된 성숙미가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언뜻 매우 현실적인 사랑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둘의 연애가 판타지 같기도 했다.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에서 수지가 상구에게 말한 현실 연애의 불편한 진실은 찾을 수 없는 듯했다.
"마 대표님 연애 많이 안 해봤죠? 가족인지 친군지 니가 난지 내가 넌지 짜치고 질척대게, 그렇게 1년 이상 지내본 적 없죠? 난 남자랑 연애 안 해요. 추억만 만들지"
그래서인지 이 책 전체를 아우르는 느낌은 ‘따뜻함’인 것 같다. 은섭과 해원의 가슴 아픈 가정사는 소설 속 배경인 겨울처럼 차갑다. 하지만 손난로, 히터, 조명, 촛불, LED 전구, 이마의 랜턴, 구운 파인애플 등으로 그 차가움을 온기로 눈 녹이듯 녹이고야 만다.
은섭의 책방에서는 매주 소소하고 아기자기한 독서모임이 열린다. 작가는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꿔보았을 책방 운영을 은섭을 통해 대리 만족시켜 주었다.
이 소설은 영화 ‘리틀 포레스트’와 여러모로 닮았다. 타인에 대한 ‘용서’와 ‘이해’가 결국은 나 자신을 용서하고 이해하는 과정임을 보여 주는 느낌이랄까. 마치 계절이 변하는 자연의 이치를 거부할 수 없는 것처럼 주인공들 각자 그 과정을 맞닥뜨리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고교시절 자신의 실수를 용서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던 해원에게 비난 어린 진실을 내뱉는 그녀의 절친 보영, 매년 겨울 며칠간 바람처럼 머물다 간 첫사랑 해원이 연인이 된 이번 겨울, 겨울의 달라진 부피를 느끼는 은섭, 엄마와 이모에게 느끼는 양가감정에 힘든 해원 세 사람 누구나 할 것 없이...
“넌 너무 오래 나를 벌주는 것 같았고, 원한다면 계속 그러라고 내버려 두고 싶었어. 내가 저지른 실수나 잘못 보다 너의 응징이 더 커질 때... 그렇게 네 잘못이 더 커지기를 바랐어. 그러면 차라리 내가 피해자가 될 수 있으니까.”
<보영의 말 중에서>
오랫동안 기록을 계속하다 보면 오늘 날짜의 부피가 생긴다. 6년 전 오늘, 3년 전 오늘, 작년과 올해의 오늘, 겹겹이 층이 쌓이는 페이스트리 빵처럼 그 속에 기억과 장면들이 깃든다. 언젠가부터 겨울이 오면 H가 내려왔고, 그녀를 모른 척 바라보고, 가끔 서로 말을 나누고, 나는 겨울마다 어떤 날짜들의 부피를 쌓을 수 있었다. 그렇게 포개지는 일상들은 딱히 달라질 것이 없어 아무렇지 않았다. 그러다 올겨울 그녀가 내게 다가왔을 때, 우리가 사랑을 나누었을 때, 그 날짜들은 더 이상 균일한 평안함으로 쌓이지 않고, 오늘의 부피는 이전과는 달라졌다. 내년부터는 겨울이 와도 지금까지와 다를 것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다가올 겨울의 부피.
<은섭의 글 '오늘의 부피' 중에서>
... 타인의 인생에 개입하는 일에 대해 생각했어. 엄마와 이모는 연년생이지만, 늘 쌍둥이 같았지. 두 사람은 나를 돌보고 키웠어도 내가 둘 사이에 낄 수 없게 이상한 소외감을 느꼈던 건, 둘이 나를 보호하려던 마음들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는 걸 이젠 알았어. 그럴 필요 없었는데. 내게도 함께 아파할 권리를 주었더라면 좋았을 걸. 다 지난 일이지만.
<해원의 생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