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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정 Jul 17. 2020

이민을 결심한 이유 1(한국 생활)

처음엔 몰랐었다 캐나다로 이민을 오게 될 줄...

병실에서는 친절 간호사인데 밖에 나오면 레지던트들에게 아주 싸움닭이야!


한국에서 일할 당시 수간호사님께서 내게 붙여 주셨던 별명; '싸움닭'

그분께서 다른 간호사들에게도 별명을 많이 지어주셨다. 예를 들면 사회 부적응자, 나무늘보, 4차원, 투덜이 등등 다양했다. 아쉬운 건 긍정적인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돌이켜 보니 내게 주신 충고였는데 20대 초반 '정의감'에 불타던 내 귀에 그 충고가 들릴 리 만무했다. "네~ 노력하겠습니다~" 하이톤으로 사람 좋은 듯 웃었지만 속으로는 '제발 안 싸우게 윗 선에서 뭔가를 좀 해 주세요'라고 외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어려서 미성숙했고, 레지던트 1년 차였던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병원이 워낙 바쁘고 스트레스가 많은 환경이다 보니 서로를 '짜증 해소를 위한 통로'로 본의 아니게 이용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병원 일이 보람 있었다. 소위 '병원에 뼈를 묻을 듯' 성실히 일하며 배웠다. 20대 초반의 나는 꿈도 컸다. 3차 대형 병원 중 하나였던 그곳에서 몇 년간 바짝 일해 돈을 모은 후 미국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고 싶었다. 힘든 3 교대 근무를 하면서도 근무 전후로 강남 유명 NCLEX (뉴욕 간호사 면허 시험) 학원을 다녔다. 체력적으로는 힘들었지만 계획대로 잘 되어 가는 듯했다.



평소처럼 분주했던 어느 날, 지병으로 심장병이 있으셨던 어머니가 쓰러지셨고 내가 일하던 병원에서 심장 시술과 가슴을 직접 여는 수술을 연이어 받으셨다. 다른 고령의 환자들은 기저질환이 많아도 전설 속 의사 '화타'에게 치료받은 듯 걸어서 퇴원하시는 분들이 그렇게 많았는데, 내 어머니의 케이스는 희귀하다고 했다. 결국 어머니의 가슴이 열린 그 수술방으로 불려 들어 간 나는 다시 심장을 닫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설명받았다. 천 만근은 될 듯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와 가족들에게 설명했다.



그 당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어머니를 간호하는 기간이 약 3개월 여 지속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조차 휴직을 할 수 없는 현실이 답답했지만, 그때는 나의 권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찾으려고 하지도 않은 채로 바쁘게 종종거리기만 했었다. 개인적인 가정사로 나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주 보호자였다. 핑계일지 모르겠으나 그때는 어머니를 두고 도저히 미국에 공부를 하러 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무던히도 흘러 7년여를 근무했다.


나의 퇴사의 계기는 어처구니가 없고 허무하기까지 했다. 우리 가족의 문제로 지방에 계시던 가족들이 내가 일하던 병원으로 근무 중 찾아오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 30대 후반이 된 지금의 나는 안다.

타인은 내게 별로 관심이 없고, 남의 문제는 잘 잊어버린다는 것을...


하지만 그 당시 나는 그런 일을 감당하기에 너무 어렸다. 타인의 시선을 피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병원에 1년간 휴직을 요청했으나 육아 휴직 외에 1년 이상 휴직을 할 수 있는 제도는 없었다.



나에게는 늘 해야 할 일만 있고 나를 위해 뭔가를 해 주는 사람은 없는 것만 같았다. 가장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감정은 '엄마'에 대한 미움이었다. '사랑이 크면 미움도 크다' 했던가? 엄마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힘들었다. 고생을 많이 하시며 나를 키우신 엄마였다.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에 대한 죄책감 또한 너무나 컸다. 하지만 온전히 '나만을 위해' 일 년만 살아보고 싶었다. 그렇게 도망치듯 3월의 어느 날 캐나다 밴쿠버행 비행기에 올랐다. 나의 들끓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 부시게 환한 하늘이 나를 맞이해 주었다.



다음 편에 이민을 결심한 이유 2 (밴쿠버 생활) 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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