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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정 Jul 23. 2020

이민을 결심한 이유 2 (밴쿠버 생활)

새로운 꿈을 꾸게 된 일 년이었다.

"오늘은 뭐 했어?"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잠 오면 자고 여기저기 구경 다녔어"


한국에서 온 친구의 전화에 그렇게 대답하는 것이 참으로 어색했다.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일상이 신기하면서도 꽤나 낯설었다.


'캐나다 피자는 한 조각이 한국보다 훨씬 크구나...'
'한국에서 호떡을 종이컵에 담아 주듯 여기서는 그 피자를 일회용 종이 접시에 담아 주는구나...'
'또 그걸 학생들은 길에서 걸으며 먹기도 하는구나...'
'(당시는) 지하철 패스가 종이로 되어 있어 바코드 인식 같은 것도 없이 paid line 만 넘으면 된다니...'
'여기는 지하철 역에 공공 화장실이 없네...'
'택시비가 이렇게 비싸다니...'
'공공 교통수단으로 수상 버스도 있네...'
'이렇게 다양한 품종의 사과가 있구나...'
'여태까지 내가 보지 못한 과일이 참 많구나...'
'엄청 사교적이고 적극적으로 구걸을 하는 노숙자도 다 있네...'
'여자만 또는 남자만 있는 렌트 말고 남녀가 섞인 렌트도 있다니...'
'우체국 집배원이 저만치 차를 세워두고 일정 구간을 걸으며 편지나 택배를 배달하시는구나...'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fish and chips 가 있다니, 한국의 치맥과 용호상박이구나...'
'광활한 자연이 도심에 참 가까이도 있구나...'


이처럼 처음 보는 광경, 자연 경치, 먹거리들로 내 마음이 아이처럼 들떴었다. 그렇게 한 달 여를 즐기고 보니 임시로 가져온 생활비가 떨어져 갔다. 물론 한국에서 간호사를 하며 저축해 둔 돈을 송금받을 수 있었지만, 그'피같이' 번 돈을 쉬는 데만 쓰기는 정말 아까웠다. 그리고 너무 한가하니 애써 잊고 지냈던 엄마와 가족 걱정이 스멀스멀 다시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래! 그럼 간단히 아르바이트를 하며 영어를 좀 배우자'라고 생각했다.


영어를 배울 수 있는 곳을 찾는 것은 당연히 너무나 쉬웠다. 아르바이트쯤은 금방 구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한 달 여 하루도 빠지지 않고 Starbucks, Tim Hortons, Second Cup, McDonald's 등에 이력서를 제출해도 인터뷰 기회조차 가질 수가 없었다. 나중에야 회사 동료들을 통해 알게 되었지만 한국에서 간호사 경력을 이력서에서 제외했어야 했다. 나는 쉽게 생각했다. '한국에서 간호사를 했던 사람이 카페에서 캐셔 정도 못하겠어'라고 생각해 주겠지 했다. 하지만 이곳은 '왜 이 사람은 간호사 경력을 가지고 전혀 다른 분야에서 일하려고 하지'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진을 거의 다 빼고 나서야 내가 살던 홈스테이 주인아저씨께서 본인이 다니시던 catering 하는 회사에 나를 추천해 주셨다. 역시 캐나다에서 레퍼런스의 힘은 대단했다. 인터뷰를 하고 바로 다음날부터 출근할 수 있었다.


세프의 지시대로 요리를 용기에 담아내거나, 파티시에의 요구대로 디저트를 데코레이션 하거나, 포크나 수저를 포장해서 준비하거나, 제공되었던 용기를 분리수거해서 버리거나 또는 설거지를 하는 업무였다. 단순 반복 작업이 많았지만 쉬는 시간에 아줌마, 아저씨들이 늘어놓는 시답잖은 농담을 듣는 일이 즐거웠다. 또한 그 회사에서 점심으로 제공되던 세프들의 요리가 그땐 그리도 맛있었다. 홈스테이에서는 맛있는 걸 자주 먹기 힘들다^^ 처음에는 밴쿠버에 적응될 1~2개월만 홈스테이에 살다가 다른 렌트를 구해 나가려고 계획했었는데 일 구하는데도 도움을 많이 주셔서 그 의리로 1년간 쭉 살았었다.


2개월여 그 catering 회사에서 일하던 중, 홈스테이 주인아저씨께서 본인의 동생이 작은 회사를 운영하는데 비서를 찾고 있다며 영어 공부에 더 도움이 되는 일이니 한번 해 보겠냐고 제안하셨다. 솔직히 월급은 비서일이 더 적었지만 아저씨 말씀대로 전화를 받고 이메일을 보내고 하는 업무가 영어 공부에 더 도움이 될 것 같아 비서일을 시작했다. Catering 회사에 그만두겠다고 했더니 나의 스케줄에 맞춰 근무를 조정해 줄 테니 일을 계속해 달라고 매니저들이 사정을 하는 정도였다. 아마 관광객이 많은 여름 성수기여서 그랬던 것 같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나의 밴쿠버 생활이 흘러갔다. 낮에는 풀타임 비서로 일하며 밤에는 풀타임 학생으로 영어 수업을 들었다. 주말엔 그 catering 회사에서 일하고 나머지 남는 시간엔 영어 수업 숙제를 했다. 물론 내가 충분히 줄일 수 있는 일이었는데, 머릿속에 잡념 없이 무언가를 계속할 일이 있는 것이 좋았다. 피곤해서 머리가 베개에 닿는 순간 곯아떨어지는 일상 또한 일면은 참으로 감사했다. 일주일 내도록 영어를 쉴 새 없이 읽고, 듣고, 쓰고, 말해야 하는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보니 나 스스로도 영어가 느는 것이 느껴져 동기 부여가 자동적으로 되었다. 몸이 힘들어도 아침이면 일어나기 싫지 않았다.



총직원이 8명밖에 안 되는 작은 건축, 설계 회사의 비서는 사실 그리 바쁘지 않았다. 사장님께서 최저 임금을 주셨지만^^ 중간에 시간이 남으면 회사에서 학교 숙제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다. 간혹 엔지니어나 테크니션들이 내게 숙제 아닌 숙제를 부탁하실 때가 많았다. 그분들은 설계를 의뢰받으면 오래된 종이 도면을 AutoCAD 소프트웨어를 사용해서 똑같이 베껴 그리는 작업을 하셔야 했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단순 반복 작업이다 보니 그걸 참 싫어하셨다. 자주 내게 시간이 남는지 물어보시고 그걸 해 줄 수 있는지 부탁하셨다.


단순히 도면만 베끼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다 잊어버렸지만 Hot/Cold pipe의 개수를 맞추는 등의 단순하지만은 않은 수학 계산을 엑셀 파일로 정리해야 했다. 나는 학교 다닐 때부터 수학을 좋아했다. 계산이 맞아 떨어지면 재미가 있었다. 계산이 안 맞아떨어질 때는 말씀 드리면 그분들이 다 알아서 하시는데, 이왕 해 드리는 거면 두 번 손이 가게 하고 싶지 않아서 계속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 후 나만의 파일을 만들어서 법칙들을 정리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분들도 그게 어지간히 하기 싫긴 싫었던 모양이다. 영어도 못하는 내게 설명하려면 더 귀찮았을 것 같은데, 내가 이해될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을 해 주셨다. 그럴 때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하곤 했었다.


'내가 내 분야가 아닌 곳에서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 이만큼 일을 해 낸다면, 내 전문 분야인 간호사 일은 훨씬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인생은 어디로 흘러갈지 모른다 했던가?


1년이 지나면 비자가 만료되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catering 회사도, 비서로 일하던 회사도 내가 계속 일하기를 원하면 이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겠다고 했다. 언제 어떻게 이민법이 바뀔지 모르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이민만을 위해 회사에 '발이 묶이는' 계약은 선뜻 내키지 않았다. 알아보니 과정이 복잡하고, 시간도 오래 걸리지만 간호사로 이민을 할 수 있는 길이 있었다. 간호사를 위한 그 이민법도 자주 바뀌고 있는 상황이라 최대한 빠른 결정을 내리고 일년을 잘 보낸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프랑스어를 해야 하는 퀘벡까지 가고 싶지는 않았다.  연방 이민을 신청했지만 간호사 이민을 위한 자리는 소수였고 내가 그 안에 들지는 못했다, 두 번째 선택지였던 퀘벡으로 4년 후 오게 될 줄이야... 정말 인생이라는 바다는 어디로 흐를지 모르는 것 같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 당시는 일상이 단순해서 즐거웠던 것이 아닌가 한다. 바로 그 단순한 삶이 캐나다 삶의 장점이기도 하다. 최저 임금을 받고도 먹고 살 걱정을 크게 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 당시 나에게 국경일은 학교도, 일도, 숙제도 없는 날이었다. 그 국경일마다 친하게 지냈던 한 친구와 밴쿠버 곳곳을 돌아다니며 맛있는 걸 사 먹었다^^인도에서 온 그 친구는 지금 마더 테레사 수녀님의 사랑의 선교 수녀회의 수녀님이 되셨다. 이제 수녀님이 되셨으니 내 존경을 담아 존대를 해 본다. 고기를 유난히도 좋아하던 그 친구는 사실 밴쿠버에 간호사가 되기 위해 에이전시를 끼고 온 경우였다. 그 에이전시가 그 친구의 돈을 사기 치고 도망을 가 버렸다. 그 사건이 그 친구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겠으나 고국으로 돌아가 수녀의 삶을 살게 되었다. 그 친구는 늘 내게 말했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이끄실지는 아무도 몰라"

"그렇지? 고기를 그렇게 좋아하는 너를 수녀원에 살게 하신 걸 보면..."

"수녀원에서도 고기는  분명 줄 거야" 


그 친구도 나도 늘 똑같은 농담으로 서로의 가는 길을 응원했다.



최영미 시인의 시집 제목처럼 그렇게 밴쿠버에서 나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꿈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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