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2장 체력이 바닥나면 판단부터 흐려진다

by 정선후 린스아저씨


1부 2장

[체력이 바닥나면 판단부터 흐려진다]


몸이 무너졌을 때 가장 먼저 달라진 건 감정이 아니라 판단이었다.

예전 같으면 한 번 더 생각했을 일에 그냥 고개를 끄덕였고, 굳이 힘을 쓰지 않아도 될 문제에 쓸데없이 에너지를 쏟았다. 일이 잘못된 뒤에야 ‘왜 그때 그렇게 결정했을까’ 하고 뒤늦게 고개를 갸웃했다.


한번은 그런 날이 있었다.

밤새 뒤척였고, 입안은 헐어 있었다. 몸은 무겁고 머리는 맑지 않았다.

회의 자리에서 나는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말을 했다. 급하게 결론을 내렸고, 설명은 짧았다. 그 선택은 몇 달 뒤 문제로 돌아와 다시 내 앞에 섰다.


그때 알았다. 그날의 판단은 생각이 아니라 컨디션이 한 것이었다.

그런 순간들이 반복되면서 하나의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컨디션이 나쁜 날일수록 선택은 조급했고, 말은 날카로웠으며, 결정은 늘 단기적이었다. 체력이 바닥나면 여유가 사라지고, 여유가 사라지면 판단은 가장 쉬운 쪽으로 기운다. 그 ‘쉬운 선택’이 나중에 더 큰 대가로 돌아온다는 걸 그때의 나는 자주 잊었다.


나는 한동안 이것을 마음가짐의 문제로 착각했다.

의지가 약해졌다고 생각했고, 집중력이 떨어졌다고 자책했다.

그래서 더 이를 악물고 버텼다.

하지만 버틸수록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판단은 더 거칠어졌고, 실수는 잦아졌다.


그제야 알았다.

이건 정신력의 문제가 아니라 체력의 문제라는 걸.


운동을 다시 시작한 뒤 아주 천천히 변화가 찾아왔다.

새벽을 달리는 날이 조금씩 늘었다.

트랙 위에는 아직 어둠이 남아 있었고, 입김은 하얗게 퍼졌다. 차가운 공기가 코끝을 찔렀다. 운동장 조명 아래에서 사람들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몸은 생각보다 정직하게 반응했다. 숨이 덜 가빠졌고, 아침에 일어나는 게 조금은 수월해졌다.

술자리는 자연스럽게 줄었다.

억지로 끊은 게 아니라 다음 날 새벽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몸이 가벼워지자 마음도 덜 흐려졌다.

건강도, 달리기 실력도 눈에 띄게 변한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좋아지고 있었다.


그 무렵, 친하게 지내던 동생 하나가 목동마라톤교실 이야기를 꺼냈다. 혼자 뛰는 것도 좋지만 함께 달려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균형을 잃어가던 시간을 지나고 있었다. 그때,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는 선택을 했다.


화, 수, 목, 토 새벽 다섯 시.

아직 도시가 완전히 깨어나기 전 시간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였다.

각자의 사정과 각자의 목표를 안고 같은 방향으로 달리기 위해서였다. 누군가는 기록을 좇았고, 누군가는 완주를 꿈꿨으며, 누군가는 나처럼 무너지지 않기 위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함께 달리기 시작하면서 확실히 달라진 게 있었다.

혼자일 때보다 쉽게 빠지지 않았고, 핑계는 줄어들었다.

내 몸 상태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보게 됐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무렵부터 판단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급해지지 않았고, 쓸데없는 결정을 덜 하게 됐다. 체력이 조금씩 회복되자 삶을 바라보는 시야도 조금씩 넓어졌다.


이제는 안다.

좋은 판단을 내리기 위해 먼저 챙겨야 할 것은 정보도, 경험도 아닌 몸의 상태라는 걸.


체력은 삶을 대신 살아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체력 없이는 삶을 제대로 판단하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새벽에 움직인다.

더 강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흐려지지 않기 위해서.


판단을 지키기 위해, 나는 몸부터 지킨다.

나는 그곳에서 그렇게 실력도 되찾고, 마음도 되찾고 있었다.

체력이 바닥나면 판단부터 흐려진다.


“판단이 흔들린 날을 돌아보면, 늘 그날의 몸이 먼저 흔들려 있었다.”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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