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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ka Nov 09. 2019

어린이날인 줄도 모르고

할로윈, 이제야 무슨 날인지 감이 오네요

시끌벅적했던 할로윈이 지나고 동네는 다시 조용해졌다. 장식할 땐 한 달 넘게 천천히 하더니 치우는 건 어쩜 그리 빠른지 11월이 왔다는 게 확 느껴진다. 3일엔 Daylight Saving Time도 끝나서 진짜 2019년도 저물어 가는구나 싶다.


미국에 와서 처음 맞은 할로윈은 아무 감흥이 없었다. 아파트에 살던 때라 주변에 장식한 집도 없었고 적응하느라 정신도 없던 터라, 스타벅스에 갔더니 직원이 원더우먼 의상을 입고 음료를 주길래 할로윈이구나 생각했다. 2년 차 할로윈은 주택에서 맞게 되었는데 저녁을 먹다가 6시경부터 초인종이 계속 울렸다. "Trick or Treat!" 외치는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없어서 미안하다고 하는 게 어찌나 면구스럽던지. 다들 마트에서 호박을 집길래 몇 개 사서 집 앞에 뒀는데 그게 할로윈에 호응한다는 신호였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딩동과 사과가 몇 번 반복되자 온 집안의 불을 다 끄고 제발 초인종 누르지 말라고 속으로 외쳤다. 미안하다고 말하기도 미안하다구!


3년 차엔 아예 바깥에 놓을 호박을 사지 않았다(그 와중에 펌킨 패치는 어디서 주워듣고 다녀옴). 그리고 할로윈 당일엔 벨뷰스퀘어로 피신(?)을 했다. 그런데... 거긴 발 디딜 틈도 없이 아이를 데려온 가족들로 꽉 차 있었다! 다들 바구니를 들고 매장을 돌며 무슨 파도 타듯 사탕과 초콜릿을 받고 있었다. 인파에 휩쓸려 2층 일부 매장을 돌다 급 지쳐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동네는 아직 Trick or Treat이 한창이었다. 그냥 구경삼아 돌아다녀보니 어떤 날인지, 어떤 분위기인지 대강 알 것 같았다.


올해는 일찍 펌킨 패치도 다녀오고 호박조명을 사서 집 앞에 장식도 했다. 아이랑 거미장식이 있는 집을 찾아보기도 하고, 해골이 몇 개 있나 세어 보기도 하며 산책길이 심심하지 않아 좋았던 10월이었다. 간식거리를 사서 다섯 개씩 넣어 구디백도 준비하고, 아이 코스튬은 살까 말까 하다가 비 올 확률이 높으니까 공룡비옷 있는 거 그냥 입혀서 돌자 싶었다. 그런데 할로윈 날 아이가 집에 놀러 온 친구의 코스튬을 보더니 너무 입고 싶어 해서 회사에 있는 남편에게 SOS를 쳤다. 퇴근길에 디즈니샵에 들러 사 온 도널드덕 코스튬을 급히 입히고, 초인종 누르는 아이들에게 구디백을 몇 번 준 다음, 포치에 구디백을 쌓아두고 우리도 출발했다 사탕을 받으러.


큰 아이들은 비슷한 코스튬을 입고 무리 지어 다니며 환호하고, 가족이 모두 슈퍼히어로로 분해 다니기도 하고, 직접 만든 코스튬을 입고 나온 아이들도 있고, 온갖 공주와 마녀도 돌아다녔다. 다들 웃고 즐거운 풍경이라 낯선 이 축제도 이제 조금은 즐길 수 있을 것 같아 마음 한 켠이 따뜻했. 공룡이나 유령 분장을 한 사람들을 보고 무섭다고 주춤하던 아이도 바구니에 뭔가가 쌓이니 씩씩하게 계단을 올라가 "하이, 사탕 주세요" 한다. 사람들은 한국어 몰라 야... 귀엽다고 사람들이 칭찬해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아이는 무조건 사탕을 외치고, 뭉툭한 오리손으로 사탕 하나를 집어 당당하게 "땡큐!" 하고 돌아온다.

할로윈이 무슨 날인지 알게 된 오리의 힘찬 걸음

아이는 한 시간 넘게 절대 손에서 놓지 않았던 바구니를 들고 집에 와서 "이거 봐 나 이만큼이나 받았어요!" 뿌듯하게 자신의 수확을 자랑한다. 아직 이런 간식류를 주지 않고 있어서 뭔지는 잘 모르나 일단 먹는 거라는 건 아는 눈치다. "이거 지금 먹어도 돼?" 묻길래 세 살 넘어야 하루에 하나씩 먹을 수 있다고 했더니 하루에도 몇 번씩 바구니 안의 내용물을 바닥에 다 꺼냈다가 주워 담기를 반복한다. 아직도 진행 중.

열심히 받아오면 뭐하겠노 엄마가 못 먹게 하는데

미국 어린이들은 크리스마스보다도 이 날을 더 기다린다는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몇 년을 동네 아이들에게 실망을 안겨 준 셈이 됐다. 올해도 구디백 스무 개 밖에 준비하지 않아 또 다른 실망을... 내년엔 잘할게요! 포장지도 백 개 사 놓았어요 어린이 친구들!


이제 이 귀여운 호박들과도 인사를 해야겠다. 한 달 동안 소소하게 설렘을 주었지. 아빠호박 아기호박 엄마호박, 안녕~

내년에 또 만나




정성 넘치는 우리 동네 장식들
이 정도는 애교
무...무서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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