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렌다 제작 팁을 알려드립니다.
고객 사은용 맞춤 달력을 제작하기 위해 을지로 방산시장과 '카렌다' 맞춤 제작 업체들이 군집한 곳을 찾아갔다. 오랜 세월 동안 자리를 지켜온, 낡음과 레트로의 정서 가득한 을지로엔 유독 'oo카렌다'라고 쓰인 간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달력도 아니고 캘린더도 아닌 카렌다. 수 십 년 명맥을 유지해 온 인쇄업의 매카 을지로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단어가 아닐까. 낯선 여행지의 맛집을 찾아가는 것도 아닌데 미세한 셀렘이 몸을 흔든다. 따지고 보면 이렇게 현장에 나가 업체를 둘러보는 것이야말로 비즈니스 트립 아니겠나.
그깟 탁상달력 만드는데 뭐 그리 복잡한 공정이 있겠냐만은 기성품이 아닌 맞춤 달력을 만들려면 종이 원단, 크기, 레이아웃 디자인, 스프링 종류, 달력 거치대 모양 등 알아보고 결정해야 할 사항들이 제법 많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공짜로 받은 달력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누가 나에게 몇 천 원 쥐어 주면서 직접 달력 하나 만들어보라 하면 만들 수 있겠나. 언제나 소비는 쉽고 생산은 어렵다.
현장을 몇 시간 탐방하며 여러 업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생각과 행동이 정리된다. 다양한 수입지류를 취급하는 대형 매장(In the Paper)을 발견해 꼼꼼하게 종이 원단을 살펴본다. 종이의 질감과 두께에 따라 수만 가지 종류의 원단이 탄생한다. 자사의 종이 원단으로 만든 달력 샘플 중 몇 개가 마음에 들어 직원에게 물어보니 제작 업체를 소개해 준다. 업체에 전화해 보니 유독 친절하게 응대해 준 곳이 있어 직접 찾아가 한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눠봤다. 인쇄라는 작업이 생각보다 복잡하고 제작 공정이 은근히 까다롭다. 그리고 그만큼 매력 있는 산업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현장을 돌아보며 깨달은 몇 가지를 적어본다.
현장에 답이 있다
요즘 간단한 판촉물 같은 경우는 온라인 제작주문도 가능하다. 하지만 좀 더 세심하고 질 좋은 물건을 만들고 싶다면 실제로 업체 사람들을 만나 상의해 보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다. 현장의 이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현장에서 직접 다양한 샘플들을 보고 여러 업체를 돌아다니며 상담을 하다 보면 전혀 생각지 못했던 변수가 튀어나오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며, 기가 막히게 좋다고 생각했던 아이디어가 사실은 얼토당토 하지도 않은 것이었다는 깨달음도 생긴다. 몰랐던 관련 정보와 지식을 빠르게 체득할 수도 있다. 한 업체에 갔는데 내가 찾는 물건이 없을 경우 때때로 다른 업체를 소개받기도 한다. 무엇보다 머릿속에만 맴돌던 생각이나 계획이 실현가능한 '구체성'을 확보한다는 것이 현장의 매력이다.
달력 제작엔 종이 원단이 중요
다른 제품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달력 제작에도 원료인 종이 원단의 가격이 제작비용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똑같은 크기와 모양이라도 종이 원단의 종류와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국산지인지 수입지인지에 따라, 종이 두께에 따라, 광택이나 특수처리 여부에 따라 종이의 종류는 수도 없이 많고, 각각의 원가가 다르다. 아무 생각 없이 다짜고짜 제작업체를 찾아가 "달력 하나 만드는데 얼마냐?"고 성의 없이 물어보면 안 된다는 얘기다. 원단을 어떤 종류로 할지 정도라도 결정하고 가격대를 대강이라도 알고 가면 훨씬 더 정확한 제작 견적을 받을 수 있다.
달력 제작은 7월 또는 8월에
달력 제작은 미리미리 7월이나 8월에 시작하는 것이 좋다. 매년 1월 1일부터 새 달력을 사용하지 않던가. 새 달력은 보통 전년도 11월이나 12월에 구입한다는 걸 상기해 보면 달력 제작의 성수기는 9월부터 10월 말까지다. 성수기 때에는 제작업체들이 가장 바쁜 시기라 자세한 제작 상담을 진행하기 어렵다. 제작 기간도 비수기에 비해 길어지기도 한다. 소량 제작을 의뢰하는 경우 '문전박대'까진 아니어도 소홀한 대접을 받을 수도 있다.
거래는 기분 좋게
상대 업체가 제안한 견적을 무작정 깎으려 하진 말자. 나도 사업하는 사람이고 상대방도 사업하는 사람이다. 내가 잘 모르는 분야엔 나름의 어려움과 사정이 있을 것이다. 인쇄 과정을 잘 알지 못하면서 무작정 인쇄비를 깎아달라고 하거나 제작 기간을 무조건 단축시켜 달라고 하면 상대방이 난감할 수 있고, 오히려 다른 작업 공정에서 마진을 더 많이 남기려 꼼수를 부릴 수도 있다. 내 자신이 설정한 예산 하에서 합당한 견적을 제시한다고 생각되면 그대로 진행하는 게 좋다. 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니 기분 좋게 일을 진행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상호존중의 정신을 잊지 말 것
을지로 지역의 좁고 낡고 지저분하고 허름하고 영세해 보이는 인쇄업 가게에 가면 이상야릇한, 일종의 '쌈마이' 정서가 교류한다. 찾아온 고객은 무조건 가격이나 냅다 후려치려 들고, 맞이하는 가게 사장은 돈 안된다 싶은 고객에겐 문전박대하는, 그런 상호 쌈마이의 정서. 요즘에는 불친절한 업소들이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퉁명스러운 사장들이 더러 있다. 가게문을 열고 들어와도 인사도 건네지 않고 심지어 가게에 들어갔더니 의자에 눕다시피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삐딱하게 나를 쳐다보는 사장도 본 적이 있다. 그런 가게를 나오면 나도 모르게 가게 앞에 침을 퇘! 뱉고 싶은 마음이 든다. (실제로 뱉은 적도 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즈니스 예의, 사람과의 만남에서 지켜야 할 매너는 항상 지키려 노력해야 한다. 상대방이야 불친절하든지 말든지 - 그리고 알고 보면 츤데레인 사장님들도 많다 - 내가 할 도리는 한다.
지치진 말자
마음에 드는 업체를 만나기 위해 발품을 파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너무 많은 발품을 팔다 보면 피로감이 몰려와 오히려 판단이 흐려지거나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너무 지칠 때까지 돌아다니다 보면 진행하려던 프로젝트 자체에 대한 회의감이 몰려오기도 해서 일의 추진력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몇몇 업체를 방문해 보고 그 중에서 마음에 가는 업체와 자세한 논의를 진행하는 게 낫다. 차분히 카페 같은 곳에서 잠시 쉬면서 중간점검도 하고, 간식도 먹으며 기력도 좀 회복하면서 즐겁게 발품을 팔자.
결정을 미루지 말자
돌아다니다가 딱 이거다 싶을 땐 바로 사던지, 계약을 하던지, 다시 찾아올 수 있도록 사진을 찍어두거나 명함을 받아 명함에 특정 사항을 기록해 두는 것이 여러모로 편하다. 나의 경우엔 마음에 든 상품이 있다면 우선 해당 업체의 명함과 함께 사진을 찍어 둔다. 고민이 필요치 않은 물건들은 바로 구입하고 고민을 끝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메모해놓는 게 당장 귀찮다고 여기저기 쓱 둘러보고 지나치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얻는 건 없고, 괜히 생각만 복잡해지고 몸은 피곤해진다. 최고를 선택하기보다는 적당히 마음에 드는 것, 진짜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을 추리면서 빠른 결정을 내리도록 노력하자.
현장 방문 이후 정리는 필수
현장에서 한두 시간 여러 업체들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면 주머니 속에 받아놓은 명함이 수 십장. 어느 업체와 어떤 논의를 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그래서 나의 경우엔 두 시간 정도 현장을 돌고 난 이후엔 주변 카페에 반드시 들른다.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두 시간의 여정을 차분히 정리하는 맛이랄까, 명함과 명함에 적힌 내용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취할 건 취하고, 버릴 건 버리고, 아이디어를 수정하고, 다시 새로운 계획을 세우다 보면 단단한 설렘 같은 게 느껴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