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반'이란 말의 두 가지 뜻
"시작이 반"이란 말이 있다. 공식적인 뜻을 찾아보니 "무슨 일이든 시작하기가 어렵지 일단 시작하면 일을 끝마치는 건 그리 어렵지 아니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란다. 그러니 일단 (그 어려운) 시작을 했다면 이미 하고자 하는 일의 반은 끝마친 셈이라는 의미일 게다.
시작이 반, 그 숨겨진 뜻
하지만 이 "시작이 반"이란 말에는 숨겨진 다른 뜻이 있다. 시작의 반은 내가 하지만, 나머지 반은 다른 사람이 한다는 걸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풀어쓴다면 "어떤 일을 도모함에 있어 나의 시작이 반이요, 나머지 반은 남이 해준다"는 말이다.
며칠 사이 몇 가지 일을 도모했다. 그중 하나는 고객 사은용 달력을 맞춤 제작해 보는 일이었다. 질 좋은 종이를 사용하고 내가 그려놓은 그림들을 달력 이미지에 넣고, 효율적으로 일정을 짜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레이아웃을 얹혀, 한마디로 예쁘고 실용적인 탁상달력을 만들고 싶었다. 내 경험상 예쁘지 않거나 어딘가 불편함을 주는 탁상달력은 결국 버린다. 그래서 일 년 동안 끝까지 고객의 책상 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달력을 만들고 싶었다. 예산 제약으로 대량 제작은 어려워 100~200부 정도 소량 제작을 할 참이다.
탁상달력 맞춤 제작을 위해 인쇄업체가 군집해 있는 을지로에 갔다. 그중 마음에 드는 업체와 작업을 진행하기로 했고, 나는 우선 달력에 사용할 종이 원단을 정하기 위해 고급 수입종이를 취급하는 회사의 대형 전시매장에 들렀다. 전시 매장에서 샘플로 만들어 놓은 예쁜 탁상 달력을 발견, 이런 식으로 만들면 좋겠다 싶어 사진을 찍고 업체 담당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 실장님, 안녕하세요. 보내드리는 사진과 유사한 스타일의 달력으로 한번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종이는 00 회사에서 나온 걸로 제가 골라서 모델명 말씀드리겠습니다.
몇 분이 지나자 업체 담장자에게 답신이 왔다.
- 네, 잘 봤습니다. 일단 00 회사에 연락해서 원단 자투리를 좀 가지고 있는지 알아볼게요. 워낙 소량 제작이라 원단 1 롤을 통째로 사서 제작할 수는 없어요. 그럼 제작 단가가 너무 많이 올라갑니다.
한마디로 내가 내 맘대로 종이 원단 종류를 고를 수 없다는 얘기다. 지류회사에서는 인쇄업체에 종이를 공급할 때 보통 '롤' 단위로 공급한다. 1 롤의 양은 공급회사마다 다르긴 하지만 A4용지 박스만을 접해본 일반인들은 상상도 못 할 만큼 어마어마한 양이다. 가령 1 롤은 종이의 폭이 1미터, 길이가 100미터 정도일 경우도 있고, 폭이 1미터 길이 1km짜리도 있다고 한다.
그러니 손바닥만 한 탁상달력 몇 백부 만들겠다고 1 롤을 산다는 건 얼토당토 하지도 않은 말이다. 물론 인쇄업체가 1 롤을 사서 소량의 탁상달력을 만든 후, 남은 종이를 나중에 사용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언제 쓸지도 모르는 종이 재고를 쟁여 놓을 업체가 어디 있겠나. 그리고 종이는 생산된 이후 몇 년이 지나면 변질되어 잉크가 종이에 잘 입혀지지 않는 등 상품 값어치가 크게 떨어진다고 한다. 더 큰 문제는 달력 하나를 만드는데 한 종류의 종이만 쓰이는 게 아니란 사실. 달력의 표지, 달력의 속지, 거치대로 쓸 종이, 이렇게 최소한 세 가지의 각기 다른 종이가 필요하니 최소 3 롤의 종이원단을 구매해야 한다는 사실.
시작했다고 해서 모든 걸 내가 도맡아야 하는 건 아니다
생각해 보니 달력을 소량 제작해야 하는 나로서는 선택의 여지 자체가 없었다. 이 종이를 쓰고 싶고, 저 종이는 마음에 안 들고, 그렇게 종이를 고르고 자시고 할 필요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지류회사에서 가지고 있는 자투리 종이원단이 있으면 그냥 그것을 사용해 제작할 수밖에. 자투리 종이원단이 남아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황송한 일이다. 그나마 자투리도 없으면 다른 회사에 알아보는 수밖에. 아니면 이미 대량 생산해 놓은 기성품 달력에 가게 로고 정도 추가해서 만드는 수밖에.
불행이자 다행이다. 내가 마음대로 종이를 고를 수 없어 불행이지만, 또 어찌 보면 종이 고르는 고민이 없어졌으니 다행이라면 다행. 자투리로 남아 있는 종이 원단의 재질이 내 마음에 안 들 수도 있지만, 그건 내 마음이고 정작 완성품을 받는 고객들은 그 자투리 종이의 질감과 느낌을 더 좋아할 수도 있으니 이것 또한 모를 일. 처음 해보는 일이니 과거 데이터이나 경험도 전무. 그러니 또 어찌 보면 고객이 좋아할지 안 할지 노심초사 걱정할 필요도 없네.
시작이 반. 시작의 반은 내가 하되, 나머지 반은 남이 해준다. 달력 제작을 도모한 건 나지만, 그 시작을 도와주는 다른 사람들이 없다면 그 시작은 시작되지 못할 것이다. 종이원단회사의 자투리와 인쇄업체의 노하우와 알 수 없는 고객의 반응, 이런 게 없었다면 나의 시작은 시작되지 못했을 것이다.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게 무조건 피곤한 일도 아니고, 오히려 내 마음대로 안되니 남의 마음대로 일이 굴러가준다. 시작이 반. 무슨 일이든 시작하기가 어렵지 일단 시작하면 (남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도와주니) 일을 끝마치는 건 그리 어렵지 아니함. 이 말도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