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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크 타이프 Dec 22. 2017

기본소득에 대한 정치철학적 소고

- 자유주의, 공화주의, 그리고 숙의 민주주의

뜨거운 이슈, 기본소득

전 세계적으로 기본소득 이슈가 뜨겁다. 기본소득은 모든 개인에게 조건 없이 지급하는 소득이다. 노동 여부나 재산 규모 등을 따지지 않는 것이다. 역사상 전례가 없을 정도로 커진 불평등과 ‘제4차 산업혁명’으로 일컬어지는 급격한 변화, 이에 따른 대량 실업 위협이 기본소득 도입의 배경이다.


불평등이 어느 수준에 이르면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붕괴될 수 있다는 데에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많은 경제학자들이 동의한다. 첩첩산중이라 했던가. 인공지능과 같은 제4차 산업의 발달은 대규모 실업을 발생시킬 것이다. 새로운 일자리가 다시 창출될지는 의문이다. 결국 인간이 조만간 노동으로 생계를 꾸릴 수 없는 “경제의 특이점”에 도달하게 될지 모른다. 불의 발견, 농업혁명, 산업혁명을 거쳤던 ‘선형적(linear) 성장’의 시대는 끝났다. “그렇다, 이번에는 다르다.”(케일럼 체이스, <경제의 특이점이 온다>)


기본소득에 대한 논점들

기본소득은 이러한 급격한 ‘특이점’ 이후의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하나의 대안이다. 전 세계 많은 나라들은 이미 기본소득 실험을 진행 중이다. 특히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기본소득 도입을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있다. 스위스는 2016년 기본소득 도입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친 바 있다. 핀란드 정부는 2017년 1월부터 2년에 걸쳐 실업급여 대상자인 2,000명을 표본으로 월 560유로(약 70만 원)의 기본소득 지급을 시행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몇 년 전부터 기본소득에 대한 정치권의 논의가 활발하다.


사회적 의제에 대한 논의는 곧 ‘찬성과 반대’의 이분법적 논란으로 귀결되며 각각의 논점을 낳는다. 기본소득을 둘러싼 논점들은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노동 윤리의 차원에서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 소득을 지급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반대론자들은 노동하지 않는 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소득의 지급은 부당하고 주장한다. 반면 찬성론자들에 따르면, 소득의 권리는 노동의 대가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사회의 ‘공유 자산’에 대한 권리에서 비롯된다. 기본소득은 취업 노동 이외의 무수한 활동에 대한 ‘사회적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 돈을 주면 게을러진다는 우려가 있다. 반면 기본소득을 받더라도 사람들은 게을러지지 않고 여전히 자신의 일을 지속한다는 주장도 있다.


셋째, 기본소득 지급을 위한 재원 마련에 관한 의견 차이가 있다. 일부에서는 기본소득은 결국 ‘증세’의 문제이며, 부자들에게 부당한 세금 징수로 귀결되기 때문에 기본소득을 반대한다. 그러나 또 다른 일부에서는 증세의 정도는 정치적 결단의 문제이며 사회적 합의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또한 선택적 복지를 위한 막대한 행정비용을 기본소득 지급으로 전용하고 공유자원 이용수익을 배당하는 등의 방식을 통해 기본소득을 지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점들은 결국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기본소득의 ‘정당성’과 ‘실현가능성’이 그것이다. 기본소득의 정당성 문제는 행정적 기술, 정책적 처방 차원에서의 고민을 넘어선다. 기본소득은 모든 시민을 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각계각층에 걸쳐 올바르고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는 제도라 인식되지 않으면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 정치적 담론이 필요한 이유다. 정치적 담론이 구축하고자 하는 것은 정치적 질서(political order)이며, 이 정치적 질서가 있어야만 그 속에서의 모든 행위들이 이해되고 정당화될 수 있는 틀(framework)이 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의 정당성을 고민하는 데에 있어 정책적 차원이 아닌 ‘정치철학적’ 고민으로 추상화의 수준이 한 단계 높아져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본소득의 정당성

기본소득의 정당성에 대한 철학적 고민은 특히 이제 막 도입 논의가 시작되는 한국의 입장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threshold)이다. 특이한 것은 기본소득에 관한 논의는 – 우리가 언뜻 추측하는 것과는 다르게 – 좌파와 우파의 이분법적 프레임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기본소득의 주요 주창자들은 보수주의 정치사상가들이다. 예컨대 19세기 자유주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과 20세기 자유지상주의자 밀턴 프리드먼을 꼽을 수 있다. 「기본소득이란 무엇인가」의 저자, 다니엘 라벤토스(Daniel Raventós)는 기본소득의 이념적 뿌리를 좌파적 복지제도가 아닌, 공화주의와 자유주의라는 보수적 전통에서 찾고 있다.


자유주의와 기본소득

다니엘 라벤토스의 주장처럼 기본소득의 정당성을 공화주의와 자유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면 그 이념적 ‘접점’은 어디인가? 이를 위해 공화주의와 자유주의를 과연 어떻게 정의 내릴 수 있는지를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자유주의의 이념적 스펙트럼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기본적으로 정치적 담론의 세계에서 하나의 확정되고 완결된 정의(definition)를 상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일련의 학자들은 자유주의를 – 자유주의라 묶을 수 있는 것들을 – 정의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앨런 라이언(Alan Ryan)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자유주의를 다루고 있는가, 아니면 (복수로서의) 자유주의들을 다루고 있는가?” 그에 따르면, 유명한 자유주의 사상가들은 많다. 하지만 이들이 모두 자유주의에서 논하는 관용, 정당성, 복지국가, 민주주의의 가치 등에 대한 경계들(boundaries)에 있어 모두 같은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다. 심지어 이들은 자유주의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의견의 일치를 보이지 못하는 ‘자유주의들’이다. 그럼에도 앨런은 나름대로의 통합된 자유주의라는 것이 있어야 하며, 자유주의라는 정신적 흐름이 지속적인 교정(revision)을 거치고 있음을 강조한다.


자유주의와 같은 정치적 담론의 세계에도 분명 ‘회색 지대(grey area)’가 존재한다. 명확히 ‘자유주의는 무엇이다’라는 최종적 결론(final closure)은 없다. 다만 우리는 자유주의의 전통 속에 흐르는 거대한 사유의 덩어리들을 발견할 수 있다. ‘자유와 평등’이 그것이다. 결국 자유주의는 자유와 평등에 관한 이야기이며 이러한 자유와 평등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에 관한 논의라 할 수 있다.      


존 롤스(John Rawls)는 자유주의 전통 속에 흐르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서로 경합될 수 있는 사유들을 정치적 영역에서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 ‘정의(justice)’라는 관점에서 고민했다. 그의 책「정치적 자유주의」에서 존 롤스는 민주사회에서의 정치적 정의(political justice)에 관한 첫 번째의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시민은 자유롭고 평등하며 협동할 수 있는 사회의 온전한 구성원이다. 전 세대에 걸쳐 시민들의 사회적 협동이 가능하도록 공정한 조건을 규정하는 가장 적합한 정의관은 무엇인가?
(What is the most appropriate conception of justice for specifying the fair terms of social operation between citizens regarded as free and equal, and as fully cooperating members of society over a complete life, from on generation to the next?)
- John Rawls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그는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기본적 제도들을 위한 지침으로 두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첫째, 시민 각자는 평등한 기본권과 자유에 입각한 온전하고 적절한 제도(scheme)에 대해 동등하게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는 점이다. 둘째,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은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즉 이들 불평등은 공정한 기회의 평등 아래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직위와 직책에 결부되어야 하며, 현존하는 불평등이 최소수혜자 계층의 이익 개선에 가장 효과적으로 기여할 수 있도록 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롤스가 제시한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에 있어서의 두 번째 조건(현존하는 불평등은 최소수혜자 계층의 이익 개선에 기여해야 한다는 조건)은 기본소득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하나의 단초를 제공한다. 이 두 번째 조건을 결과-평등주의가 아닌 기회-평등주의로 해석한다면, 최소 수혜자들에게 기회를 평등하게 제공하기 위해 기본소득을 허용할 가능성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롤스가 기본소득에 관해 명백히 찬성하는 입장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노동 윤리’의 차원에서 기본소득 개념을 반대하고 있는 것 같다. 즉 열심히 일한 시민으로부터 거둔 세금을 노동을 포기한 채 ‘말리부 해변에서 서핑이나 즐기는 사람(Malibu surfer)’을 위해 쓰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본소득은 ‘노동 윤리’의 관점이 아닌 최소수혜자의 ‘기본적 권리’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봐야 할 문제다. 또한 롤스가 말하는 사회는 “공정한 협동의 체계”이며, 이 사회 속에서 인간은 일생을 통해 정상적이고 충분히 협동적인 사회의 구성원 – 즉 시민 – 이 될 수 있는 존재다. 협동의 체계로서의 사회는 “그 자체로 전 생애에 걸쳐 인간이 필요한 것들을 얻을 수 있고 필요한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 인공지능의 발달과 4차 산업혁명 등으로 인간이 조만간 노동으로 생계를 꾸릴 수 없는 “경제의 특이점”에 도달한다면, 우리 사회는 기본소득을 보다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지 모른다.


공화주의와 기본소득

공화국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꽤나 친숙하다. 우리 헌법은 제1조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명시하고 있다. 헌법 첫머리에 나오는 말인 만큼, 공화주의 원리는 우리 정치 제도의 기저에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공화국, 공화주의라는 말은 우리에게 무척이나 낯설다. 공화국이 무엇인지, 공화주의가 무엇인지 명료하게 말하기는 참으로 힘들다. 속 시원한 정의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필립 패팃(Philip Pettit)은 공화주의 사상의 핵심을 ‘비지배로서의 자유(freedom as non-domination)’으로 규정한다. 그에 따르면, 비지배적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법적 평등과 사회경제적 평등이 필요하다. 한편, 비롤리(Maurizio Viroli)는 공화국을 법과 공공선을 기반으로 주권자인 시민들이 만든 정치적 공동체라 정의하면서 공화주의적 평등을 이렇게 규정한다. “공화주의적 평등은 단지 시민적∙정치적 권리만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다. 모든 시민들이 존엄(dignity)과 자존감(self-respect)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정도의 사회적∙경제적∙문화적 조건들까지 보장해 주는 것이 공화주의적 평등이다.”


비롤리는 공화주의적 평등과 관련한 두 가지 원칙을 소개하고 있다. 첫 번째 원칙은 마키아벨리로부터 정립된 것으로, 어떤 시민도 가난(poverty) 때문에 공적인 명예로부터 배제되거나 빈곤하다는 이유로 평판을 잃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원칙은 루소에 의해 정립되었다. 즉 적어도 공화국에서는 어느 누구도 자신을 팔아 하인이나 피보호자가 되어야 할 만큼 가난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어느 누구도 사적인 혜택을 미끼로 다른 시민의 굴종(obedience)을 매수할 정도로 부유해서도 안 된다.


비롤리가 소개한 공화주의적 평등과 관련한 두 가지 원칙은 기본소득을 정당화할 수 있는 – 오히려 자유가 아닌 평등 차원에서 – 단초를 제공한다. 마키아벨리가 정립한 첫 번째 원칙은 정부의 역할을 요구한다. 시민들이 너무 가난해서 일자리를 구할 수 없거나 교육의 기회를 가질 수 없는 상황을 막아야 하는 것이다. 공화국은 가장 부유한 자나 가장 강한 특권을 지닌 자가 경쟁에서 이기는 자가 아니라 우수한 사람(the best people)이 이기는 국가를 지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경쟁이 공평하고 공정해야 한다.


루소가 제시한 두 번째 원칙은 공화국이 어떤 시민이라도 삶의 밑바닥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일할 권리를 비롯해 사회적 권리들을 보장해 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비롤리는 이러한 사회적 권리들을 복지 국가적 차원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복지국가 정책들은 평생 국가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을 양산할 위험을 가지고 있다. 또한 사회적 권리들은 공적 구호(charity)와 같은 동정적 행위를 통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이 가진 당연한 권리로서 보장되어야 한다.


기본소득과 숙의 민주주의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정신(spirit)은 분명 기본소득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사상적 기초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가능성이 곧바로 기본소득의 정당성을 완성하는 종점(final closure)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기본소득의 도입을 결정하기 위한 전 사회적인 담론은 이제 시작 단계에 있다.


사회적 담론과 민주적 정치과정을 진지하게 거치지 않고 일부 정치권의 이슈몰이와 엘리트 정치를 통해 기본소득 도입 여부를 결정할 수는 없다. 기본소득은 모든 시민에 걸쳐 적용되는 국가적, 전 사회적 의제다. 기본소득을 도입할 경우 시민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고 상충하는 지점이 존재한다. 이러한 의제를 전문가나 소수 엘리트들이 결정하도록 방치한다면 그 정당성의 두께는 얇을 수밖에 없다. 또한 사회적 합의를 생략한 결정은 이후 발생하는 부작용의 크기를 키우는 결과를 가져온다.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기 위한 긴 여정이 남아있는 것이다.      


기본소득 도입 여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어떻게 이끌어야 할 것인가? 이를 위한 하나의 아이디어로 ‘숙의 민주주의’를 제시할 수 있다. 건만과 톰슨(A. Gutmann & D. Thompson)은 정치체제의 한 형태(a form of government)로서의 숙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를 이렇게 정의한다.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이 서로 수락할 수 있고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generally accessible) 논거를 교환하며 결정을 정당화화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숙의 민주주의를 거쳐 이루어진 결정(또는 결과) 은 시민들 모두에게 구속력을 가진다. 하지만 동시에 그 결정이 미래의 변화와 도전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열려 있다.


위 두 학자에 따르면, 숙의(deliberation)를 통한 결정은 그 결정으로부터 혜택을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또한 숙의 과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각자의 도덕적 논거 등을 서로 교환하면서 더 넓은 시각을 갖고 공통의 이익을 고민해 볼 수 있다. 사고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숙의를 통해 양립 불가능한 가치를 양립할 수 있도록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반대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가진 가치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결국 숙의는 외적-집단적 차원에서 모든 구성원이 동등한 조건에서 참여하는 집단적 의사 결정 과정이다. 동시에 내적-반성적(internal-reflective) 차원에서 찬성과 반대의 이유를 판단해보는 사고의 과정이기도 하다.


숙의 민주주의 아이디어들

기본소득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위한 숙의 민주주의적 접근은 어떤 방식으로 구체화될 수 있을까? 앳커맨과 피쉬킨(B. Ackerman & J. Fishikin)이 제시한 ‘숙의의 날(Deliberation Day)’ 아이디어를 기본소득 논의에 응용해보는 것은 어떨까? 이 두 학자는 투표를 위한 과정에 숙의 민주주의적 요소를 도입하는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총선 1주일 전 새로운 공휴일을 제정해서 유권자의 일부가 함께 모여 관련 이슈에 대해 토론하고 총선에서 반드시 투표하기로 약속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이러한 숙의의 날을 보낸다 해서 시민들이 하루 만에 자신의 입장을 바꾸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대규모의 집단적 숙의 과정을 통해 시민들 간의 정치적 의사소통은 한층 더 성장할 수 있다. 기본소득과 같은 긴 호흡의 의사소통이 필요한 의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결말을 짓고,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그 의제에 대한 대화와 대규모의 의사소통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숙고의 날’과 같은 이벤트는 ‘해볼 만한’ 실험일 수 있다.


물론 오히려 대규모의 의견 교환 과정 속에서 오히려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시민들 간에 갈등이 증폭될 수 있고 의견의 극단화(polarization)가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효율적인 결정을 위해 일부 시민들은 관련 정보와 이슈에 대해 적당히 모르고 지나가는 ‘합리적 무지(rational ignorance)’를 선택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과정에 있어 일어나는 갈등은 그 자체로 문제라기보다는 조정을 거쳐야 하는 자연스러운 ‘과도기’라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피쉬킨의 말처럼 숙의의 날과 같은 의사결정 이벤트에 참여한 사람들에겐 분명히 변화가 일어난다는 점이다.


한편 파킨슨과 맨스브리지(Parkinson and Mansbridge)는 숙의 민주주의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숙의 민주주의를 실행하는 제도들을 개별적이고 단편적으로 연구하기보다는 전반적인 체계 내에서 다양한 여러 제도 간의 상호작용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특히 정치적 갈등을 해결하는 하나의 체계로서 ‘숙의체계(deliberation system)’를 소개한다. 숙의체계는 정치적 갈등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화를 기반으로 한 접근 방식(talk-based approach)을 강조한다. 각자의 의사를 표현하고, 입장을 제시하고, 상대방을 설득하는 공적 대화를 중시하는 것이다. 원활한 숙의체계 속에서 사람들은 상대방을 억압하려 하거나 무작정 무시하기보다는 ‘설득’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키려 노력한다.


맥켄지와 와렌(Mackenzie and Warren)이 소개하는 미니퍼블릭(minipublic)도 기본소득을 논의하기 위한 체계 차원에서의 아이디어가 될 수 있다. 미니퍼블릭은 20명 내지 500명 정도의 참가자로 구성된 숙의 포럼이다. 특정한 의제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고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충분한 기간 동안 운영되는 포럼이다.


에필로그

일부 사람들은 정치철학이 사회와 세계로부터 멀찍이 물러나 있다고 여긴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사회 문제에 대한 정치철학적 고민은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해결을 위한 거시적 방향을 모색하는 출발점이다. 정치철학은 사회적 의제에 대한 담론을 형성하며 사회적 합의를 위한 하나의 정신(spirit)을 구성하는 작업이다. 더구나 사회의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는 지점에서는 수많은 정책적, 기술적 설계의 변화가 필요하다. 이러한 설계의 정신적 뼈대를 구성하는 작업은 정치철학적 고민에서 시작된다.


기본소득이란 의제는 고착화되고 구조화된 불평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급진적 아이디어다. 동시에 매우 효과적인 처방이 될 수도 있다. 또한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는 단순히 복지정책의 문제가 아니다. 4차 산업 혁명 이후 급격히 변화할 사회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의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소득의 정당성과 실현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회적 대화의 장(場), 숙의의 공간이 필요한 시점이다. 여러모로 한국 사회도 이제 기본소득에 대한 담론의 규모(scale)를 키우고 담론의 밀도(density)를 높일 때다.



[참고 문헌]

다니엘 라벤토스, 이한주, 이재명 옮김, 2016, 「기본소득이란 무엇인가, 책담

케일럼 체이스, 신동숙 옮김, 2017,「경제의 특이점이 온다」비즈페이퍼

프리드리히A.하이에크 지음, 서병훈 옮김, 1997,「법, 입법 그리고 자유-3권」, 나남

한면희, “기본소득의 정치철학”, 허핑턴포스트, 2017.2.7.자 기사     

A. Gutman & D. Thompson, 2004, Why Deliberative Democracy?

B. Ackerman & J. Fishkin, 2002, “Deliberation Day,” Journal of Political Philosophy (June).

Alan Ryan, 2012, “Liberalism,” in The Making of Modern Liberalism, p. 21.

Duncan Bell, 2014, “What Is Liberalism?” Political Theory, Vole. 42-6.

Goodin, R.E., 2000, “Democratic Deliberation Within,” Philosophy & Public Affairs,

 Vol.29, No.1.

J. Parkinson & J. Mansbridge, eds., 2012, Deliberative Systems: Deliberative

 Democracy at the Large Scale.

John Rawls, 1988, “The Priority of Right and Ideas of the Good,” Philosophy and   Public Affairs, Vol.17.

John Rawls, 1993, Political Liberalism.

Maurizio Viroli, 2002, Republicanism.

Philip Pettit, 1997, Republicanism: A Theory of Freedom and Gover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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