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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크 타이프 Jan 09. 2018

플라톤의 저작들에 관하여 1

- 진실은 불편하고 진리는 요원하다

진실은 불편하다

볼 때마다 신기한 것이 있다. 바로 컴퓨터 게임이다. 게임 속 멋진 캐릭터와 화려한 액션이 구현되는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자면 신비감이 들 정도다. 화면 속 무사는 같은 남자가 봐도 멋있고, 엘프(elf)라 통칭되는 팔등신 미녀는 매혹적이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허상이다. 이들을 직접 만나보겠다고 컴퓨터를 뜯어본들 남는 것은 부품 몇 개 납땜해 놓은 메인보드뿐이다. 이들 캐릭터의 창조주라 할 수 있는 게임 프로그래머는 그 실상을 잘 알고 있을 것 같다. 캐릭터의 멋진 모습은 결국 수많은 숫자, 기호, 알파벳을 조합한 프로그램 언어에 불과(?)하단 사실을. 그래서 어찌 보면 컴퓨터 게임이나 프로그램에 문외한인, 아니 무뇌에 가까운 나 같은 사람이 더 행복할지 모른다. 나는 허상인 캐릭터들을 보며 감탄하지만 프로그래머들은 그 아름다운 허상 속에 숨겨진 수많은 프로그램 언어들을 떠올리며 괴로워할지 모른다. 진실은 이렇게 때로는 실망스럽다.  


진실에의 대면은 비단 실망감 정도가 아닌 비극으로 끝나기도 한다. <오이디푸스 왕>의 오이디푸스가 그렇다. 그리스 테바이의 존경받던 왕 오이디푸스는 선왕이었던 라이오스 왕의 살인범을 잡아 복수하고자 아폴론 신전에 신탁을 구한다. 하지만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밝힌 ‘진실’을 접하고 분노하며 괴로워한다. 그 진실은 바로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아버지 라이오스 왕을 살해한 장본인이라는 사실이다. 오이디푸스는 결국 그 진실에 괴로워하며 자신의 눈을 찌르고 테바이를 떠난다. 


오이디푸스가 접한 ‘진실’은 두 가지 중첩된 비극을 담고 있다. 첫째는 오이디푸스 자신은 정작 모르고 있었던, 자기 아버지의 살인범은 결국 자신이었다는 그 자체로서의 ‘비극적 진실’이다. 하지만 그 비극적 진실은 또다시 ‘비극적 결과’를 낳는다. 오이디푸스가 결국 자신의 눈을 스스로 찌르고 테바이를 떠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받아들여야 했던 진실은 그의 운명이었을지 모른다. 애초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 라이오스 왕과 어머니 이오카스테는 아들의 손에 죽게 될 것이라는 불길한 신탁을 피하고자 아들을 산에 갖다 버렸다. 그러나 훗날 그 예언은 운명처럼 사실이 되었다. 


하지만 오이디푸스가 결국 자신의 눈을 스스로 찌른 것도 그의 주어진 운명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이는 진실을 모른 채 오이디푸스 자신이 내린 저주를 스스로 실천한 것이다. 결국 그 저주는 운명이라기보다는 오이디푸스 자신이 만든 ‘필연’에 가깝다. 


살인범이 그 누구든...
그가 악했던 만큼 흉악하게 저주받은 생애로 끝맺게 되기를!
- <오이디푸스 왕> 中

이렇게 진실은 ‘알면 다치는,’ 비극적 결말을 가져오기도 한다. 하지만 진실을 모른 채 행한 말과 행동은 또 다른 비극을 부른다. 여러모로 진실은 불편하다. 


사실과 진실그리고 진리

진실 얘기를 하다 보니 문득 개념상의 혼란이 찾아온다. 진실과 유사한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하면서도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진 단어들이다. ‘사실’이란 말이 그렇고, ‘진리’란 말도 알듯 말듯하다. 국어사전에 따른 단순한 정의에 따르면, ‘사실’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며, ‘진실’은 거짓이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진리’는 참된 이치라고 한다. 덧붙여 진리의 철학적 정의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승인할 수 있는 보편적인 법칙이나 사실’이란다. 영어사전을 찾아보니 사실은 fact로, 진실과 진리는 truth로 쓰이지만 세 단어 모두 truth로 쓰이기도 하는 것 같다. 


명확하진 않지만 이 세 단어 간의 위계(hierarchy)와 차이(difference)가 감지된다. 사실(fact)은 ‘실제로 있었던 일’을 의미한다지만 철학의 눈으로 보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은 없다. “인간은 사실을 실재, 혹은 물 자체(things itself)로 파악할 수 없으며,” 인간의 감각과 관념을 통해 파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인식한 사실은 이미 사실이 아니다.”(문학비평용어사전) 그렇다. 인간들 사이에 유통되는 '사실'이란 것들은 어찌 보면 거짓에 가깝다. 


그렇다면 거짓이 없는 사실, 즉 진실을 밝히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밝혀지지도 않는 진실을 뒤집는 것은 오히려 쉽다. 특히 정치라는 공간에서는 더욱 그렇다. 지난 2015년 시위 도중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농민 백남기 씨가 죽었다. 그의 사망진단서를 작성했던 서울대병원 측이 밝힌 사인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병사’였다. 경찰의 물대포가 죽음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한참 뒤(정치권력의 지형이 바뀜에 따라) 그의 사인이 뒤바뀌었다. ‘병사’가 아닌 ‘외인사’, 즉 병이 아닌 외부 충격으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외인사가 아닌 병사가 진실이라는 보장도 없다. 하지만 최소한 이전에 내린 ‘병사’라는 사인이 진실이 아니었을 가능성은 훨씬 더 높다. 이렇게 진실은 밝혀내기 어렵지만 왜곡하거나 변질되기는 너무나 쉽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보자. 멜레토스를 비롯한 고발자들에 의해 법정에 세워진 소크라테스는 자신에 관한 진실을 밝히고자 했다. 고발자들은 소크라테스가 빈약한 논리 등을 고집하는 듯 필요 없는 짓을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멜레토스는 소크라테스가 청년에게 해로운 영향을 주고 국가가 인정하는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그를 비난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고발자들을 구분하고 예전부터 자신을 고발해 온 자들을 향해 자신은 어설프게 자연학을 연구한 적도, 궤변을 늘어놓은 적도 없다고 항변한다. 새 고발자 멜레토스를 향해서는 대화를 통해 멜레토스의 무지와 모순을 지적한다. 그러나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법정은 30표의 차이로 유죄를 결정한다. 유죄에 대한 형량 결정에 있어서도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입장을 굽히거나 선처를 동냥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은 국가적 귀인으로 대접받아야 한다고 항변한다. 그러나 표결 결과 법정은 그에게 사형을 언도한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소크라테스의 주장이 거짓 없는 사실, 즉 진실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누구도 진실을 밝힐 수 없을지 모른다. 진실을 온전히 밝혀, 있는 그대로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다 해도 그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소크라테스와 고발자들 사이에서 진실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던 것일지 모른다. 실재(things itself)가 인간의 세계를 접하는 순간 이것은 인간의 감각과 관념, 기억과 시간, 언어와 맥락으로 오염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법정에서도 이러한 ‘오염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법학자 김성돈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의 내면에 있는 사실은 외부에 있는 객관적 사실과 다르다. 자신이 왕자가 아님에도 왕자라고 착각할 수도 있고, 남의 돈을 빌렸으면서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에 내면 속에 간직하고 있는 사실대로만 이야기한다고 해서 이를 ‘거짓말’이라 하지 않는다. 법률 용어에서도 ‘허위진술’이란 객관적 사실에 반하는 내용의 진술이 아니라 ‘내면 속 기억에 반하는 사실의 진술’을 의미한다. 따라서 법정에서 위증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관점에서 ‘진실에 반하는 진술’을 하는 경우가 아니라 주관적 관점에서 ‘기억에 반하는 사실을 진술’해야 한다.”(김성돈. 2007. 『로스쿨의 영화들-시네마 노트에 쓴 이야기』. 효형출판. p. 179.)


어찌 보면 인간의 세계에서 진실의 문제는 발견(discovery)의 문제가 아니라 설득(persuasion)의 문제일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진실이라 믿는 것들에 대한 우리 자신의 소신을 - 어떠한 압력과 부당한 권력에도 - 굽히지 않는 것이다.  

나는 여러분에게 복종하기보다는 오히려 신에게 복종할 것이다. 
나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결코 지(知)를 사랑하고 추구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 <소크라테스의 변명> 中

한편, 진리는 진실과는 또 다른 무엇이다. 직관적으로 진리는 진실보다 한 수 위라는 생각이 든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승인할 수 있는 보편적인’ 그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진실은 개별적이나 그 각각의 진실 속에는 보편적인 참된 이치, 진리가 숨어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 개념적 위상에 있어서, 그리고 각각에 필요한 철학적 사유의 강도에 있어서 사실, 진실, 그리고 진리의 관계에는 분명 위계가 존재한다. 진실은 사실보다 위에 있고 진리는 그 진실보다 위에 있거나 그 속에 깊숙이 숨겨져 있다. 


사실은 거짓에 가깝고 진실은 사실이 아닌 오히려 ‘거짓’에서 찾아야 할지 모른다. 하나의 단편적 사실로는 결코 진실을 도출해낼 수 없다. 연관된 여러 개의 사실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것이 진실이며, 거짓의 거짓이 오히려 진실일 수 있다. 사실로부터 진실을 도려내기 위해서는 논리적 사유 또는 추론(logos)이 필요한 것이다. 사실이 감각(sense)의 문제, 관찰(observation)의 영역이라면 진실은 사유(thinking)의 문제요, 논리(logic)의 영역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작가의 말처럼 진리는 “진실을 종합”한다. 


사실과 진실, 진리의 개념적 논의는 이쯤에서 접어두자. 이들의 개념을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나의 능력 밖이다. 진리가 무엇인지 명쾌하게 정의하기는 너무나 어렵다. 진리는 부분들(사실 또는 진실)을 넘어(para~) 존재하는 전체로서의 모수(parameter)다. 진실은 불편하고 진리는 요원하다. 


그래도 얻은 것은 있다. 사랑과 비슷한 그 어떤 것, (진리로서의) 필리아(Philia)를 명쾌하게 정의하지 못했던 플라톤의 경험을 공유했으니 말이다. 

뤼시스와 메넥세노스, 
지금은 늙은 사람인 나도, 그리고 자네들도 우스운 자들이 되어 버렸네. 
여기 이 사람들이 떠나면서 이렇게 말할 테니까 말일세. 
우리가 스스로 서로의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아직 친구가 무엇인지 발견해 내지 못했다고 말일세.
- <뤼시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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