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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크 타이프 Jul 12. 2019

[정치 에세이] 한일 무역분쟁의 논점 1

무역은 평화를 촉진한다?

일본, 한국을 향해 방아쇠를 겨누다

7월 초, 일본은 대한(對韓) 반도체 소재의 수출규제를 시작으로 한국을 향한 경제 보복을 시작했다. 한국의 정부와 기업들의 난감한 기색이 역력하다. 정부는 급히 일본의 수출규제에 대한 WTO 제소를 검토하고 있다.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은 7월 7일 일본으로 출국했다. 고래 싸움(미-중 무역전쟁)으로 새우등이 터질 지경인데, 또 다른 고래(일본)가 이번에는 새우등을 직접 터뜨리려 한다. 시쳇말로 어이가 없다.      


무역은 평화를 촉진한다?

활발한 무역이 국가 간 (정치적) 평화를 촉진한다는 아이디어는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다. 18세기의 철학자들, 그리고 19세기 전통적 자유주의자들은 ‘무역이 평화를 촉진한다(Trade promotes peace)’고 믿었다.      


가령 몽테스키외는 “통상은 자연스레 평화로 이어진다(The natural effect of commerce is to lead to peace)”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국가 간 무역은 상호 의존성을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임마뉴엘 칸트 역시 저서 <영구 평화론>에서 지속적 평화는 세 가지 기둥, 즉 대의 민주주의와 국제기구, 그리고 경제적 상호의존을 기반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오늘날의 정치학 이론들도 (무역 등을 통한) 경제적 상호의존이 국가 간 정치적 갈등을 줄여주는지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이들 연구 대부분은 최소한 무역과 평화 간의 긍정적 관련성을 확신한다.  

    

무역과 평화의 관련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무엇이 독립변수(원인)이고, 무엇이 종속변수(결과)인지는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 예컨대 서로 정치적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국가들이 오히려 훌륭한 무역 파트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무역이 평화를 촉진하는가, 아니면 오히려 평화가 무역을 촉진하는가? 무역과 평화는 분명 관련이 깊지만 여전히 ‘모호성(ambiguity)’을 내포한다.      


더구나 한-일 관계는 ‘무역 → 평화(trade → peace)’ 명제가 잘 들어맞지 않는다. 언론 보도와 같이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뤄진 지 50년이 넘도록 한국은 단 한 차례도 대(對) 일본 무역수지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중앙일보 2019년 7월 8일 자 기사 중)


일본 입장에서는 54년 간 대한 무역 흑자를 누리고 있음에도 한국과의 ‘과거사’ 문제에 있어 한 치의 물러섬이 없다. 한국 정부는 대일 관계에 있어 “경제적 교류는 정치와 다르게 보아야 한다”는 ‘투 트랙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경제 영역인 무역과 정치 영역인 평화의 관련성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정치적 평화가 훼손되면 무역 관계도 훼손된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 전술한 ‘무역은 평화를 촉진한다’라는 명제가 지닌 논리적 필연성(inevitability)이다. 중학교 때 배운 명제, 명제의 역, 그리고 대우 명제를 생각해보자. ‘무역은 평화를 촉진한다’는 명제가 참이라면 그 대우 명제 역시 언제나 ‘참’이다. 즉 정치적 평화가 훼손되면 무역 관계도 훼손된다(no peace → no trade)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적 귀결은 국제정치경제의 경험적 명제이기도 하다. 당장 미국의 대북정책을 살펴보자. 지난 6월 30일 한미 정상회담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북한의 영변 핵시설 폐기를 대가로 개성공단을 재개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반대했다. 북한이 우라늄 농축시설 등 핵시설 5곳을 더 폐기하지 않는 한 개성공단 재개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무역을 통해 평화를 촉진하는 전략은 미국의 안중에 없다. 안보 문제가 명확히 해결되지 않으면 경제 교류는 허용할 수 없다(no peace  → no trade)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중국도 이 대우 명제를 확인시켜 준 바 있다. 2016년 주한미군이 한국 영토(롯데 그룹 소유 골프장) 내( 사드(THAAD,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를 결정하자 중국 정부는 대대적인 ‘경제 보복’을 단행했다. 관광 등에 있어 ‘한한령’ 조치를 내렸고, 롯데마트는 중국 내 점포 99곳 중 87곳이 영업정치 처분을 받았다. 중국은 이러한 경제 제재가 사드 배치라는 정치 안보 문제와 무관하다고 주장하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올 것이 왔다

결국 올 것이 왔다. 이번엔 일본이다. 위안부 문제는 수십 년 동안 한-일 간 정치적 갈등의 중심에 있었다. 2017년 한국 정부는 화해치유재단을 해산시켰다. 이 재단은 2015년 박근혜 정권 당시 한일 양국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 종식을 조건으로 설립한 재단이다. 2018년 한국 대법원은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해 일본 기업이 손해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에 일본은 1965년 체결된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강제징용 피해에 대해 개인에게 배상할 의무가 없다고 맞섰다.


그리고 결국 7월, 한국을 상대로 한 경제적 보복을 시작했다. 반도체 등 핵심 소재의 한국 수출 규제 조치를 단행한 것이다.  정치적 갈등은 경제적 갈등을 촉발한다는 명제를 재확인시켜주고 있다.     


한국 정부의 ‘투 트랙 전략’, 과연?

무역이 평화를 촉진할 수 있다. 그렇다면, 평화가 없으면 무역도 훼손된다는 점은 논리적으로 – 그리고 경험적으로도 – 도출되는 ‘참(true)’이다. 대일 관계에 있어 한국은 ‘투 트랙 전략(정치와 경제의 분리)’을 고집하며 이러한 논리적 필연성을 간과했다.


이번 일본 수출제한 조치에 대해 한국은 “WTO 협정에 배치된다”는 입장으로 응수하고 있지만, 이 또한 투 트랙 전략의 연장선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지난 10일 청와대는 30대 그룹 총수들을 불러 기업 차원에서의 대응을 촉구했다.


이것이 한일 간 정치외교적 갈등이라는 근본 원인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다. “지금의 위기는...정치가 못해서, 외교가 무너져서 초래된 것인데...정말 어떻게 불을 끄려는지 걱정이 태산”(이종철 바른미래당 대변인)이라는 정치권의 지적은 일리가 있다. (중앙일보 2019년 7월 8일 자 사설, “기업에 짐 떠넘기지 말고 외교적 돌파구 찾아라.”)      


과거사 이슈는 한일 간 “지속적인 논란의 진앙”이었다. 양국 간 해묵은 정치적, 역사적 갈등은 언제든지 경제적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방아쇠였다. 서로 부모를 욕하고 화해도 하지 않은 사람끼리 사이좋게 돈거래하는 경우를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 참고문헌: Irwin, Douglas A. Free Trade under Fire / Douglas A. Irwin. 2nd ed. Princeton, N.J.: Princeton UP, 2005. Pr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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