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브빛 감정선> - 56
때늦은 겨울비가 내리는 25년의 연말, 검단호수공원행 기차는
푹푹 찌는 열기를 싣고 송도에서부터 북쪽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었다.
50년이 지난 쿠로즈미 켄고의 노래는 그 나이와 세월을 넘어
당당히 나의 모던 타임즈 컬렉션 속에서 계양을, 계남의 청명한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는 명실상부 21세기의 이정표가 되어 우리에게 애증 아닌 애정 어린 눈빛으로 도시를,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수많은 별빛들 중 하나였다.
세상엔 수많은 빛줄기가 있지만, 쿠로즈미의 <Rainy 246>에서 그러하듯
저마다의 빗줄기들 중 하나를 맞고 있을 뿐이었겠지만.
소년의 푸르른 스포츠카가 내뿜는 전조등 불빛과 미등의 햇무리, 그리고 그의 헤일로는, 명백히 2025년의 인천국제공항을 향하여 뻗어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송도달빛축제공원행은 남쪽으로, 검단호수공원행은 북쪽으로.
송도, 주안, 부평, 계양, 청라, 검단 사람들의 열기는 겨울 한반도의 북풍에도 흔들리지 않고, 인천의 지하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대로 더 북쪽으로, 계속해서 북쪽으로 나아가면
경의중앙선에 몸을 싣는 파주와 문산 사람들의 터전이 나올 것이었다.
어른으로 가는 길엔, 여름으로 가는 문이 필요했다.
겨울이 되어야만 여름이 그리워지는 그런 치졸한 태도는 아니었다.
그들의 낭만적인 블루스 음악은 필히 계양보다는, 계남에 어울리는 화폭에 담길 만한 3월의 진달래꽃, 그리고 4월의 복사꽃과 같아서
부천을 떠나온 나는, 여전히 고향을 떠나지 못했고
검단호수공원행 증기기관차의 시간 속에서, 여전히 사람들의 열기에 힘겨워하고 있을 뿐이었다.
올리브색으로 덧칠한 시집의 원고를 작업하며
어둠 속에서는 빛날 수 없는 소설을 그리며
나는 여전히 불면증에 시달렸고, 계양의 공기는 적막하기만 했다.
과거의 나는 이곳에 없어야 했다.
계양산의 나는 존재하지 않는 나였다.
그렇다고 <계양행 증기기관차의 맨 앞칸에서>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어스름 자유로>가 실존하지 않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지금의 나는 이곳에 없어야 할까.
그럼에도 계남로의 하루카는 소녀에서 어른이 되었다.
사람들의 상처와 흉터가 각각의 개인을 만든다.
마치, 공장에서 태어난 스마트폰들이 모두 저마다의 삶을 사는 것처럼.
끽해봐야 일련번호만을 부여받는, 대기업의 빛나는 정수들이
한 사람을 만나서, 그와 함께 수많은 모험을 떠나는 것처럼.
엔지니어들에게 그것은 제품의 수명이 닳아가는 자연 현상일 뿐이지만
닳아빠지듯이 살아도 좋으니까, 그런 것이다.
기계가 사람을 만나서, 사람과 함께한다는 것은
사람이 사랑을 만나서, 삶을 함께한다는 것은
시가 태어나서, 사람들과 함께한다는 것은
각각의, 저마다의 고유한 삶을 사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의 상처와 흉터가 각각의 사람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랑은, 즐거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음악이 태어나서 사람들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은
그렇기에 음악은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나의 수많은 다른 글들은
나의 어느 그림자를 대변하길래, 평생 나에게 밟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 모든 그림자는 저마다의 존재자에게 밟히고 있다.
그림자 밟기는, 그림자의 존재자적 숙명이다.
무엇이든 밟고 나아가는 삶밖에 살 수 없는 인간이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엔지니어들에게 그것은 푸르른 스포츠카를 만드는 꿈일 뿐이다.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올리브빛, 하늘빛 증기기관차를
상처와 흉터를, 저마다의 사랑을 만들고 있을 뿐이다.
드넓은 복사골의 벌판이 나와, 하루카와, 우리의 친구들을 만들었으니
이제, 나는 하루카와의 추억을 완성하러 떠나야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