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사막과 루비와 신궁 이야기

<올리브빛 감정선> - 34

by 하 연

오늘도, 나는 긍정과 부정의 씨앗을 모두 남긴 채로 하루를 끝마쳤다.

이런 느낌이 어떤 건지는 잘 안다.


낯선 지구인들의 왁자지껄하면서도 끈끈한 사회와, 천부적인 차이로 나는 그들과 어울릴 수 없음을 느낄 때, 나는 잘 안다.

낯선 사람이 아니더라도, 나는 줄곧 그래왔다.


나는, 나의 집단 속에서도 칭송과 경외, 그리고

거리감을 동시에 느껴오며 살아왔다.


그래서 이 느낌이 어떤지는 잘 안다.

익숙하다.


물론 나는 이들을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 중 특히 한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했다.


게다가 이곳은 지구인들의 고향도 아니다.


벌써 이 푸른 태양과 붉은 사막의 화폭을 고향으로 삼게 된 사람들도 많기는 하지만.


그렇다면 그들을 지구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사막과 하늘은 루비와 사파이어같은 색이라서

내가 이만큼이나 어울릴 수 있었다.


헤스티리안과 데메테리안, 우리들의 공통점.

우리는 문명을 두 손으로 쌓아올렸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그래도 내가 이들 사이로 가장 섞이기 힘든 점은, 바로 언어다.


나는 이들의 언어를 우리 종족 중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는 사람이지만, 표현이라는 건 언제나 서툴다.


그리고 지금은, 다친 손가락이 가장 신경쓰인다.

내가 그동안 쌓아올린 명예와 영광의 현재에 치명적이다.


“상처를 어둠 속에 담가두면 회복된다니 굉장히 철학적인걸.”

세실리아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실제 상처보다도, 내가 그 상처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더 중요해. 몸의 상처든, 마음의 상처든.”


“그래서 어둠 속으로 상처를 감추어야 한다는 거야? 틀린 말은 아니네.”


나와 세실리아는, 마르스테라(Marsterra)의 수도, 트리닉의 어느 중심가에 있는 카페에 마주앉아 ‘카페’라는 음료를 즐기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카페는 ‘카페’만 팔지는 않았다. 세실리아는 저 멀리 시골 온실에서 재배한 홍차를 주문했다.

그녀는 홍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의 다친 오른손을 잡아들더니 상처를 요리조리 살펴보고 있었다.


“우리 외가 집안은 대대로 대장장이였거든. 조상 대대로 금속뿐만 아니라 정말 여러 재료로 도구를 만드는 장인들이었어.” 내가 말했다.


“정말? 가족들 이야기 더 해줄래? 궁금하다.”

세실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인간들이 ‘루비’라고 부르는 보석의 색을 닮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슬쩍 쓸어넘겼다.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는 풍습은, 확실히 헤스티리안과 데메테리안 문화의 공통분모였다.


“우리 외가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던 이 무기는, 대단히 강력하지만 사용하기가 대단히 위험해. 그러다보니 이런 사소한 상처들은 그냥저냥 달고 살아왔지 뭐.”

나는 장궁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사실 세실리아는 이미 이 활과 화살을 자주 봐왔을 터였다.


“활시위를 잘못된 자세로 당기면 바로 손가락을 베이고, 또 활시위를 잘못된 자세로 놓았다간 크게 다칠 수 있거든.”


“근데, 지난번에 난 네가 짧은 화살을 이상한 받침대에 걸어서 쏘는 것도 본 적 있어. 그건 어떤 무기야?”


세실리아는 내 손을 놓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다리를 꼬며 편안한 자세로 앉았다.


나는, 그녀의 눈동자와 내 눈동자가 정렬되는 것을 느꼈다.


세실리아는 언젠가 자주색에 가까운 내 눈이 굉장히 특이하다고 말한 적이 있지만, 그것은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여기 온 뒤로 지금까지 세실리아와 비슷한 연녹색 눈을 가진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마치 우리 집안 친척들처럼 희고 창백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살결은 묘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편전이나 장전이나 다를 거 없어. 사용하기 좀 더 위험할 뿐. 내가 원하는 대로 현상할 수 있는 무기니까.”

“그렇구나.”


나와 세실리아는 음료를 다 마신 뒤, 카페를 나와 말없이 산책을 했다.

트리닉 중앙 광장, 삼중 중력장 생성기, 그리고 막 마르스테라 중앙의사당을 지나쳤을 즈음에 세실리아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위달리르, 지난번에 마르스테라 본회의에서 가결된 새 안건에 대해 들은 적 있어?”


중앙의사당 정원을 가로지르는 산책로는 굉장히 아름다웠다.


데메테리안들의 기준으로는 굉장히 고전적인 분위기의 정원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볼 수 없는, 그들의 고향에서 공수해올 수밖에 없는 재료로 만든 조형물들도 보였다.


“들었어. 전쟁을 시작한다며?”

“응. 그리고 나는 ‘안타레스 함대’를 이끄는 군인이야. 높으신 분들이 그렇게 정했다면 나는 그에 대해 충실히 따라야 해.”


세실리아는 약간 주눅든 표정과 함께 화사하게 펼쳐진 정원 대신 땅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알고 있어. 내가 뭘 해주면 좋을까?”

나는 걸음을 멈추고 세실리아의 얼굴을 비추는 푸른 석양과 검은 그림자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무언가 욕망에 사로잡힌 표정, 어딘가 두려움에 가로막힌 눈빛.


참 기분 나쁜 순간이었다.

무엇이 이 여자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나를, 사랑해줄래?”


세실리아 요한센 화이트. 그리고 위달리르 샤프로네 바티르의 사랑은 여기서 만나게 된다.


푸른 사막과 루비와 신궁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된다.


나는 나의 고항으로 찾아왔던 세실리아의 사촌, 에드가 화이트 르페브르와 함께 헤스티리안을 대표해서 이곳으로 왔다.


에드가는 그곳에서 큰 환대를 받았고, 무엇보다 나의 사촌 누나이자 헤스티르의 위대한 지도자, 이브 샤프로네 바티르가 그를 좋아했다.


“왜, 다시는 못 돌아올 것처럼 말하는 거야?”

나는 에메랄드보다 밝게 빛나는 눈동자가 다가옴을 느꼈다.


그녀의 앞머리가 나의 앞머리와 살포시 만나 나풀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제서야 그녀의 입술이 느껴졌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에서 바라보았다.


“티리안이나 테리안이나,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은 똑같구나.”

나의 말 한 마디에 그저 해맑게 웃는 그녀.


말 한마디조차 필요없는 사랑이었다.


그런데 그 때, 나는 세실리아의 등 뒤로 어렴풋이 저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또 하나의 붉은 머리카락을 보았다.


키가 조금 작은 기계 생명체 하나와 함께 레더햇을 눌러쓴 채로 우리가 걸어온 길과는 반대 방향에서 다가오던 그 붉은 소녀는 자연스럽게 허리춤에 찬 권총집으로 손을 가져갔다.


세실리아는 아직 그들의 존재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시력과 동체시력을 비정상적으로 타고난 나는, 또다시 평범한 사람들과는 조금 다름을 느꼈다.


관점이 달랐던 것이다.


아무튼, 그 두 사람은 우리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다가, 목소리가 겨우 들릴 즈음 먼저 키가 작은 쪽이 붉은 소녀에게 말했다.


“저 사람은 마르스테라 주민등록망에 등재되지 않은 거주자가 맞습니다. 하지만 누구인지는 알겠네요.”


“여기 빌붙어사는 녀석들 중에 우리 주민등록망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어디 한둘이던가? 난 그냥 언니를 보고 싶어서 왔다고.”


그녀는 자연스럽게 다시 손을 내렸다. 그저 습관인 것 같았다.

세실리아는 그녀를 보더니 나를 볼 때와는 또 다른 종류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베키! 이게 얼마 만이야?”

“언니, 로니도 아니고 베키가 뭐야. 설마 내 이름도 잊은 건 아니겠지?”

“멋있잖아! 연방보안관 일이 엄청 바빴다고 아버지에게 들었어.”


“바쁘기는 무슨. 아빠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어. 그냥 나한테 관심이 별로 없으신 것 같기도 하고.”


“너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근데 그쪽은 혹시…”

세실리아는 기계 생명체를 보고는 말을 줄였다.


“부관 르페브르입니다. 원래 마르스테라 시민들에게 제 이름을 말해주지는 않습니다만, 당신은 이곳의 시민이 아니군요. 제 소개를 하자면 발렌티나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발렌티나 르페브르는 모자를 벗으며, 세실리아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정중히 인사를 했다.


나는 당연히 그 인사에 화답을 해야 했다.


“위달리르입니다. 저는 오히려 이름보다는 성을 아무에게나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냥 위달리르라고 불러주세요.”

보안관 베로니카 화이트는 조금 건조하게 대답했고, 부관 발렌티나 르페브르는 따뜻하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나는 보안관이 정말 언니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세실리아보다 더 날카로운 눈매와, 궂은일을 많이 한 듯한 손만 빼면.


“그럼요.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저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쪽도 잘 알다시피, 에드가에게 이미 모든 이야기를 다 들었어요.” 부관이 말했다.


부관 발렌티나는 다시 모자를 눌러썼다. 그녀의 기계 육신과 진한 갈색 머리카락은, 확실한 존재감을 내뿜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데메테리안들이 보기엔 얼핏 사람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특히 호박색 홍채에서 빛나는 눈빛이, 너무나도 사람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기로, 그 눈빛은 에드가 르페브르와 판박이처럼 닮아있었다. 성이 같으니 당연하지만, 혈족이었던 것이다.


“언니가 다시 함대로 복귀한다길래 그 전에 한 번 보려고 뒤를 좀 밟았어. 알다시피 이 도시에서 나와 티나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보안관이 말했다.


“그러시겠지. 같이 걸을까?” 세실리아가 말했다.

“좋지. 이 근린공원은 언제 와도 아름다운 곳이야. 본회의가 열릴 때만 빼면.” 그렇게 우리는 넷이서 정원 산책로를 마저 걸었다.


곁에서 걸어가는 두 자매의 모습을 보니, 이들 또한 혈족이지만 완전히 도플갱어처럼 닮아있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베로니카는 세실리아보다 미세하지만 좀 더 키가 크고, 머리에 곱슬기가 조금 더 들어가있었다.

그리고, 발렌티나의 키가 작다고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 셋에 비해 상대적인 비교일 뿐이었다.


정원을 벗어나고 산책로도 막바지에 이르자, 시야가 탁 트인 트리닉 중앙 광장 뒤편의 평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실리아와 베로니카는 묵은 회포를 풀듯이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었고, 나는 주로 발렌티나와 함께 이곳이 아닌 나의 고향, 베스티아 행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종합해보자면, 나는 너무나도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두 분은 언제부터 그런 사이였죠?”

보안관이 대뜸 웃으며 물었다.


그 의문을 덩어리로 나눈다면 절반 이상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사랑을 하고 있었다.

이 도시를 사랑했고, 데메테리안들의 터전을 사랑했다.


그리고, 나는 세실리아를 사랑했다.


“바로 좀 전부터, 방금 전부터 이런 사이였습니다.”

나는 세실리아와 베로니카, 발렌티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세실리아가 활짝 웃었다. 활짝 피어난 장미꽃처럼.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좋아요. 나는 내 할 일이 있어서 가 봐야 해요. 바쁘지 않다는 말은 거짓말이거든요. 경찰이란 항상 그런 존재니까요.” 보안관이 말했다.


“맞습니다. 잠깐이었지만 만나서 즐거웠습니다.” 부관이 말했다.

베로니카와 발렌티나는 그렇게 작별인사를 했다.


넷은 다시 둘과 둘로 흩어졌다.

보안관과 부관은 주차해두었던 차를 찾아서 돌아갔다.

나는 아직 석양이 비추는 도로 위를 쉭 하고 달려가는 경찰차를 바라보았다.


“세실리아, 나도 영원히 이곳에 머물 수는 없어. 그리고 너도 그런 상황이라는 거 알아. 하지만 마지막엔 꼭 너와 함께할 거라는 걸 약속할게.”


세실리아는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눈만을 바라보았다.


적어도, 나는 그 시간을 영원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에게도 의지할 수 있는 가족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얼마나 외로운 삶을 살아왔을까.


그리고, 눈물방울을 조금 머금은 세실리아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

“나에게 소중한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주어서 고마워.”


나는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 많이 다르지만, 처지는 비슷했다.

외로운 삶이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루비와 사파이어와 같은 사막과 하늘엔, 바람이 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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