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야 조금만 천천히 돌아주렴
아이가 잠든 조용한 밤. 거실 창 너머로는 성당의 첨탑이 은은하게 빛나고 라디오에서는 밤에 어울리는 호른 소리가 고요히 어둠을 가른다. 나무가 많은 개천 쪽도 조용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끄럽도록 떠들며 나무 사이를 날아다니던 새들도 다 잠이 들었나 보다. 그 많은 새들은 모두 어디서 잠이 들까. 짹짹거리던 부리를 가슴 깃에 파묻고 잠이 들겠지. 한 둥지엔 가족이 몇 마리나 될까.
밤거리를 달리는 버스에서 저 멀리 줄줄이 늘어선 아파트들을 본다. 메마른 풍경에도 호기심은 든다. 노란빛, 하얀빛에 제각각 다른 베란다 풍경을 가진 집들은 손가락으로 서랍 열듯 꺼내어 볼 수 있을 것만 같다. 성냥갑 같은 아파트라는 말은 아마도 그 네모진 모양새를 말하는 것일 텐데 나는 식구들이 성냥개비처럼 들어가 있는 성냥갑 내부를 떠올리게 된다. 잠깐 걸리버가 되어 살며시 성냥갑 하나를 밀어 연다. 파마머리를 한 아내가 식탁에 김이 오른 찌개 냄비를 옮기고 늦게 퇴근한 남편이 흰 난닝구 차림에 막 감은 머리를 털며 식탁 의자에 앉는다. 조심조심 성냥갑을 밀어 닫는다.
이웃의 기척이 잦아들고, 불빛이 하나 둘 꺼지고, 적막함이 이불처럼 동네를 덮는 것을 나는 소리로 안다. 이때가 되면 라디오 소리는 생명을 가지고 일어선다. 생명을 가진 것들은 모두 잠들었기 때문이다. 일하고, 먹고, 치우고, 씻고, 움직이던 사람들이 날아다니고, 쪼아대고, 지저귀는 새들과 다름없이 밤의 장막 아래에서 죽은 듯 잔다. 우리를 잠들게 하고, 잠든 것들이 속한 밤을 바라보면 아무리 기술이 발달하더라도, 사람은 지구의 그늘에선 축 늘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구나 하고 안심하게 된다.
밤이 주는 평온과 안락함을 만끽하다가 잠이 든다. 등을 대고 눈을 감으면서 밤에 항복하고 잠에게 감사한다. 아침이면 10분만~ 하며 좀 일찍 잘 걸 후회할 걸 알면서도 또 늦은 밤이다. 지구야 조금만 천천히 돌아 하며 밤 속으로, 잠 속으로 구부러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