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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키 Feb 28. 2019

서른아홉,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해

늦었다고 하기엔 절박한 서른아홉


 

 

  친구네 집은 구룡반도를 마주 보는 바닷가의 아파트다. 불 꺼진 거실 창으로 보이는 홍콩의 밤바다는 고층건물들의 불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오전 비행기를 타고 오느라 새벽부터 부산을 떤 데다가, 도착해서는 친구와 함께 해산물을 요리해 각자의 아이들을 먹이고 치우고 씻기고 재우느라 지쳐 아이와 함께 잠들려는 것을 가까스로 일어나 마주한 홍콩의 첫 야경이었다. 안개처럼 몽롱한 머릿속으로 반짝이는 불빛이 들어오니 아까의 피곤함과는 달리 아늑하고도 노곤했다. 곧이어 친구도 잠을 쫓느라 빨개진 눈으로 침실 문을 열고 나왔다.
  “이제 와인 마실까?”

  “응. 조금만 마시자.”
  친구 집엔 헝가리 장인이 화려하게 세공을 한 크리스털 와인 잔이 있다. 친구가 결혼도 하기 전, 친구 어머니가 신혼살림으로 주겠다며 여행 중에 사 오신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쌓인 먼지를 설거지하는 데 시간을 쓰느니 1분이라도 더 앉아 쉬는 게 나아하며 우린 각자 쓰던 머그컵이며 아이가 마시던 캐릭터 컵에 와인을 따랐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달지도, 떫지도 않은 온화한 맛의 피노누아가 한 잔, 두 잔 비워졌다. 안주도 필요 없었다. 그보단 오랜만의 수다가 절실했다. 친구네 묵으러 와서 가능하게 된, 몇 년 만에야 마주한 한밤의 술자리였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하지? 친구를 만나면 할 말이 주르르 쏟아질 것 같았다.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5학년 때 만났으니 이제 30년을 향해 가는 친구다. 국민학교 이후론 서로 다른 동네, 다른 나라를 살던 때가 잦아 오랜만에 보는 경우가 많았고 그때마다 나누어야 할 새로운 이야기들은 쌓여 있었다. 십 대 때는 꿈과 힘든 공부와 어설픈 이성관계에 대해 편지를 나누고 이십 대 때는 서로의 연애와 직장생활의 사건들을 몇 시간이고 수다 떨었다. 삼십대로 접어들면서 결혼의 압박에 대한 괴로움, 이루지 못한 꿈, 진짜 하고 싶은 일 등을 토로하던 우리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주부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서른아홉이다.

  주섬주섬 이야깃거리를 찾는 입이 뻐끔거리는 것만 같았다. 전화나 메시지로는 새로 이사한 아파트가 습하다거나, 아이가 입학한 학교가 걸어서 20분 거리라든가, 아이 시력이 점점 나빠져서 걱정이라든가 하는 내용으로도 한 시간을 떠들었다. 하지만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홍콩 밤바다 앞에서, 잠을 떨치고 일어난 이 귀한 시간에 어울리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아이가 자라고 내가 늙어가는 것 빼고 내게 무슨 이야기가 있을까. 5년째 계속해오는 일은 비전 없이 반복되고 있었고,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을 묻어두고 있는 것도 여전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앞에 두고서 확인된 내 속의 공허가 귀를 웅웅 울릴 듯 부풀었다. 막막해진 내겐 친구의 눈빛도 가라앉은 것처럼 느껴졌다.


  아이들이 깰까 싶어 조용한 목소리로 서로의 근황에 대해 띄엄띄엄 대화를 나누는 사이, 친구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소호 거리에 괜찮은 카페 겸 베이커리가 있어. 보는 순간 그곳에서 일하고 싶더라.”

  “정말? 한번 들이대 보는 게 어때?”

  “의사소통도 잘 안될 텐데. 나이도 많고…”
  “나이 많으니까 앞뒤 볼 것 없이 철판 깔고 나서 보지... 우린 외국인이니까 더 무안할 것도 없지 않니. 안되면 말고.”
  친구 일은 쉬운 듯 격려한다. 친구에게 하는 말은 사실 내게 하는 말이다. ‘무안해도 해 보지. 안 되어도 어쩔 수 없지만 해 봐야 알지. 더 이상 미루면 안 돼.’ 친구에게 반사되어 돌아온 내 말에 스스로 찔렸다.  


  두서없이 이런저런 화제를 떠돌다가 서로의 피곤을 더 이상 눈감아 줄 수 없을 때쯤 이젠 체력 키우는 게 급선무라며 술자리를 대충 치우고 잠자리에 들었다. 놀기 위해서라도 몸을 돌봐야 하는 나이, 서른아홉이다. 『스물아홉, 늦었다고 하기엔 미안한』이란 책이 있던데 내게 서른아홉은‘늦었다고 하기엔 절박한’이다. 이 절박함을 바닥으로 삼는다면 조금씩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까. 40대에는 새로운 이야기들을 안주 삼아 와인을 비울 날이 올까. 홍콩의 밤바다만큼 반짝이는 눈빛으로 나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길. 그럴 수 있길.   



  + 이 글을 쓰고 몇 해가 지나 마흔에 들어선 지 한참이다. 한국에 돌아온 친구는 그 뒤로 두 줄의 경력을 더 만들었다. 나는 잠긴 서랍 속의 글을 하나씩 꺼내고 있다. 종이에 썼다면 벌써 모서리가 닳았을 글들이다. 절박함은 둔해지고 대신 조금 유연해진 것 같다. 멈춘 것 같았던 이야기는 느리게 재생되고 있다. 이야기는 일상에서 벗어나지 않았지만 꿈도 일상에 편입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캐릭터 컵에 담았던 와인처럼. 게다가 이젠 크리스털 잔을 반짝이게 닦아 와인을 담을 여유도 생겼다. 그러나저러나 와인은 맛있을 거라는 것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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