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를 만들고 가신 할머니
2일 차
저녁이 되자 조문객은 점점 많아졌다. 나와 사촌동생들은 밥을 푸고 국을 뜨고 도우미 아주머니가 덜어놓은 반찬들을 챙겨 손님상으로 계속 날랐다. 반찬이 떨어질라치면 도우미 아주머니는 이것저것 주문을 넣으라고 조언했고 큰고모의 주문에 따라 밥과 반찬, 국을 실은 카트가 속속 들어왔다. 단체로 온 이들은 술도 찾았다. 맥주와 소주를 나르고 빈 안주 그릇을 채웠다.
상과 상 사이가 좁아지고 소음의 데시벨이 점점 높아졌다. 어느 정도 식사가 끝나고 술상으로 넘어가자 허리를 펼 수 있게 되었다. 사촌동생과 나란히 서서 어디에 뭘 채워드려야 하나 하고 손님들의 상 위를 살폈다. 장례식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99%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 따져 보면 아빠의 동료라던가, 숙부의 동창생, 숙모의 형제자매, 고모부의 친구 등으로 나와 연이 닿아 있을 사람들이다. 길에서 지나쳐도 절대 모를 사람들이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 등을 마주대고 밥과 술을 먹고 있는 모습이 신기했다.
'우주 같네.'
천체물리학자가 들으면 우스울 소리겠지만 각각의 궤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나와 타인들의 인생이 어느 순간에는 이렇게 겹치기도 하겠구나 싶었다. 그 접점을 만들어준 할머니의 아흔두 해 삶은 그러니까 빅뱅만큼이나 대단한 것이었다. 식당을 채운 사람들은 흩어진 별들처럼 반짝여 보였다. 빈소를 떠나면 다시 각자의 궤도로 돌아갈 것이다. 더 이상 할머니가 안 계시다는 것이 그제야 새삼스러워졌다.
3일 차
발인은 아침 7시라고 했다. 일요일 아침이라 한산한 도로 위로 촉촉하게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빠와 숙부, 고모들은 2박 3일 동안 입었던 상복을 벗고 짐을 챙기는 중이셨다. 무릎이 불편한 아빠 대신 제단에 올라가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내렸다. 텅 빈 사진 자리를 둘러싼 장미는 꽃잎이 조금씩 힘을 잃고 있었다. 나는 빈 종이 박스를 찾아 장미를 하나하나 뽑아 담았다. 서른 송이쯤 되는 장미가 수북이 쌓였다.
병원 측의 안내에 따라 모두 영안실로 가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뵈었다. 얼굴만 빼고 온몸을 하얀 포로 감싼 할머니는 아주 작은 고치처럼 보였다. 할머니의 시신은 대학병원의 안치실에 옮겨질 예정이라 작은 이송용 침대에 뉘어 있었다. 할머니는 생전에 시신기증에 동의하셨다. 메스를 든 이들이 이 작고 마른 몸에 부디 예를 다해주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아빠는 할머니의 얼굴에 마른 얼굴을 대고 우셨고 큰고모는 미안하다고 오열하셨다. 언니는 할머니께 다가가 마지막 기도를 속삭이며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나는 장미 한 송이를 할머니 가슴에 올려드렸다.
성당에서 나온 이들이 할머니께 성수를 뿌리고 마지막 송가를 불러준 뒤 할머니는 이송용 차에 오르셨다. 병원 측은 정중한 인사 후 트렁크를 닫는 손짓과 소리까지 신경 써서 유족들에게 예의를 갖춰 주었다. 봄비로 검게 젖은 길을 천천히 달려 차는 사라졌다.
그렇게 장례식이 끝났다. 친척들은 인사를 나누고 갈길을 정해 차를 나눠 타고 헤어졌다.
장미는 꽤 오래 살아남아 우리집의 식탁과 부엌 창과 선반장 위를 향기로 채웠다.
가끔 전철을 타거나 백화점 푸드코트처럼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왁자했던 그날의 식당이 떠오른다. 할머니로 인해 교차되었던 타인들이 혹시 여기 전철 안에, 길게 줄을 선 매장 안에 섞여 있더라도 난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런 순간 군중이 낯익게, 가깝게 느껴진다.
장례식에서 오랜만에 근황을 파악한 사촌과는 서로 하는 일이 비슷하다는 것을 알고 더 자주 연락하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할머니의 세 아들들의 여섯 딸들은 일하는 분야가 비슷해져 있었다.
할머니는 사라지셨지만 할머니가 만들어놓은 우주 언저리에 내가 있다. 우주 속의 모두가 순항하기를, 어딘가에 계실 할머니가 편안하시기를 빈다.
할머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