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너와 헤어질 수 있을까.
결혼 전까지 부모님 집에서 함께, 아니 얹혀살았던 터라 나만의 살림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그때는 '내 살림 = 결혼 후 신혼살림'이었으니 신혼살림에 대한 소망이기도 했다. 몇 개의 소망 중 늘 첫 줄에 두었던 것은 "욕실에는 절대! 아무 글자도 박히지 않은, 사은품 수건이 아닌 그냥 수건 걸기"였다.
집에 있던 수건은 늘 글자가 박혀 있었다. 000 칠순 기념, 000 아기 돌잔치 기념, 000 감자탕 개업 기념, 00 슈퍼마켓 등등.... 이를 닦으면서, 볼일을 보면서, 화장을 지우며, 머리를 말리면서 일 년 365일 수건의 글자를 봤다. 아마 욕실에 있는 텍스트 중 가장 큰 텍스트가 아닐까? 이런 수건은 여행 갈 때 한 두 개 챙기려고 보면 더욱 눈에 거슬린다. 그게 공짜 물건이어서, 쓰던 것이라서보단 여행 중에 일상을 툭, 끄집어내는 것 같았달까. 호텔에서 만나는 폭신하고 산뜻한 수건과 엄청나게 대비되어서였을 수도.
아무튼 어지간히 더러워지거나 찢어지지 않으면 매일 세탁하며 주야장천 썼으니 대단한 노출 효과일 텐데, 정작 그 돌쟁이 아가가 자라는 걸 보거나 수건 속의 가게에 가본 적은 없으니 희한하다. 수건이 해질 즈음엔 또 다른 이름을 박은 사은품 수건들이 새로이 걸렸던 걸 생각하면 우리 엄마의 발은 넓고, 사은품 수건의 활동 영역도 비슷하게 넓은가 보다.
아니, 더 넓었다. 미국까지 따라올 정도로.
결혼을 하고, 미국 유학 중이던 남편이 먼저 살고 있던 아파트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는데 시댁 역시 사은품 수건파? 였고, 한국에서부터 수건을 싸들고 간 남편 덕에 나는 낯선 미국 땅에서 반가운 한글을 욕실에서 독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하하.. 안녕? 김주성 내과 개원 기념 수건님. 그런데 개원한 지 벌써 십 년... 이 되셨군요.;;
그래서 수건을 사러 갔다. 직접 사러 가보니 의외로 수건은 비싼 생필품이었다. 생필품은 좀 싸던가, 아니면 가격대가 다양해서 선택의 폭이 넓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한국이었으면 싼 건 여기서, 비싼 건 저기서 하는 식으로 쇼핑의 상식과 지식에 세일에 대한 혜안까지 차고 넘쳤겠지만 처음 간 미국에서는 어딜 가야 더 싼 걸 살 수 있는 건지, 더 싼 건 어느 정도의 질인지 알 수가 있나. 생활용품 마트로 가장 대중적이라는 곳에 가서 내 생각보다 비싼 수건을 보고 근근이 생활해야 하는 유학생 부인 입장에서 조금은 손이 떨렸지만... 그래도 샀다. 사은품으로는 절대 들어오지 않을 진한 남색과 갈색으로.
욕실 선반에 차곡차곡 수건을 개켜 넣고 걸어놓고 흐뭇했다. 그런데 미묘하게 길이가 짧았다. 한국 수건으로는 양 끝으로 긴 머리카락을 감쌀 수 있었는데 얜 안 잡힌다. 서양인에 비해 내 머리가 큰 건가? 비교해 보니 한국 수건의 길이가 좀 더 길었다. 그래도 꿋꿋하게 써보려 했지만 게으름이 이겼다. 빨래를 미루다가 예전 수건을 급히 꺼내 쓰고(버렸어야 했는데!), 다시 써보니 길이가 익숙해서 편했다.(안 버리길 잘했지!) 진한 색 수건은 다른 빨래와 섞어 빨다가 하얀 보풀이 조롱조롱 달려 조금씩 남루해졌다.(사은품 수건이 연한 색인 건 이유가 있군) 아이를 낳고 나서부턴 수건에 뭐가 적혀 있건 깨끗하기만 하면 됐지, 신경 쓸 겨를이 없어졌다. 특히 한국에 들어와 시댁에서 지낼 땐 항상 수건을 푹푹 삶고 섬유유연제로 마무리하신 시어머니의 노고 덕에 올이 보송보송하게 살아 부드러운 수건에 감탄하며 사용했다. 역시나 어딘가의 기념 자수가 꼭꼭 박혀 있었지만 내 집이 아니고 내 수고가 아니니 사은품이건 아니건 친정에서처럼 감사히 쓰는 게 당연했다.
내가 직접 수건을 사고, 빨래를 돌려야 하는 살림을 다시 시작하자 사은품 수건이 반갑기까지 했다. 누가 사은품 맘에 안 든다고, 가질래? 하면 단번에 대신 가져올 정도였다. 글자가 박혀 있으면 어때, 수건은 많을수록 좋지! 막 쓰고, 빨래가 미뤄져도 괜찮고, 헐면 걸레로 쓰면 되고~
그렇게 몇 년을 쓰고 있는데.. 이제 다시 누군가를 기념하는 게 아닌 우리 집 수건을 슬슬 갖고 싶어 지는데... 수건은 왜.. 헐지 않는 거지! 아직도 짱짱하다. 심지어 어머니가 주신 국번이 두 자리인 비치 타월조차 멀쩡하다. 가끔 옷을 쏠아먹는 좀조차 사은품 수건은 피해 간다. 문고리에 걸려 찢어진 수건을 걸레로 써봤는데 물을 먹으니 너무 무거워서 걸레의 자격에서 탈락했다. 멀쩡하니 이대로 버리는 것은 환경파괴 같다. 이러다가 사은품들이랑 백년해로하겠어. 과연 이들과 헤어질 수 있을까!
하던 차에 어느 SNS에서 반가운 글을 봤다. '여름에 유기견 쉼터에는 수건이 많이 필요하니 이참에 새로운 수건으로 바꾸시라.'는 내용이었다. 이거다 싶어 마음이 바뀌기 전에 바로 온라인에서 수건을 주문했다. 여름에는 두꺼운 수건이 잘 마르지 않으니 최대한 얇은 것으로. 예전이라면 색이며 디자인, 몇 수짜리인지를 봤을 텐데 이젠 실용성이 먼저다.
예전에 카펫을 보내드렸던 유기견 센터가 어디였더라. 인터넷에서 다시 찾아봐야겠다.
그동안 나와 가족의 얼굴과 몸을 닦아주었던 000 돌잔치, 000 창립기념 수건들아 고마웠어.
여전히 수건으로서의 훌륭한 능력을 이젠 멍멍이들에게 발휘해 주렴.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을 거야.
나는 여기 있지만 너흰 엄청 발이 넓으니까.
다른 이름으로 또 우리 집에 흘러들어와 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