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나의 중고물건 연대기
나는 중고물건을 좋아한다.
어느 정도로 좋아하냐면, 하루 중 가장 자주 확인하는 앱이 당근마켓이고, <아름다운 가게> 근처를 지날 일이 있을 때면 좀 더 돌아가더라도 꼭꼭 들르며, 어디엔가 빈티지 스토어가 있다거나 벼룩시장이 열린다고 하면 귀가 쫑긋 설 정도로 좋아한다. 왜 그럴까? 막내여서 헌 것을 물려받는 데 익숙해서일까? 보통은 좀 더 저렴해서? 그래서일 수도 있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당연히 새 물건도 좋아한다. 똑같은 물건일 경우, 새 것이 헌 것보다 좋은 건 물론이다. 중고물건을 좋아한다는 건 중고만이 가진 특성을 좋아한다는 것. 중고가게와 중고물건에는 몇 가지 특성이 있다.
중고물건에는 '시간'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중고가게'에는 퇴적된 시간의 지층이 보인다.
장충동 근처 잡지사에서 근무할 때, 마감으로 밤샌 뒤엔 후배와 동대문까지 걸어가 새벽 첫 차 시간까지 쇼핑을 하곤 했다. 지하층부터 꼭대기까지 돌고 돌았는데, 생각해 보면 거의 똑같은 옷들을 어떻게 그리 질리지도 않고 봤는지 참 체력도 좋았단 생각이 든다.
중고가게에는 그 큰 패션몰을 꽉 채운 옷보다 더 다양한 패션이 있다. 십 년도 더 전에 유행한 빈티지 모자, 2년 전쯤 유행했던 백화점 브랜드 원피스, 아빠가 젊은 시절 걸쳤을 법한 가죽점퍼, 과거에 해외에서 공수해 고이고이 관리해 입은 듯한 버버리 레인코트, 입으면 당장 가을 단풍놀이 단체 여행객의 일원이 될 수 있는 등산용 바람막이 등. 하나하나 볼 때마다 찰나에 떠오르는 이미지와 스토리의 재미가 중독적이다. 돌고도는 유행의 서클을 한 바퀴 휙 돌아 다시 원점에 온 나이가 되니(내가 대학생일 때 유행하던 게 지금 유행하고 있어!) 지나간 유행 중에 내게 맞는 것을 다시 고를 수 있는 것도 중고가게의 묘미다. 시간의 지층을 뒤질 수 있다니. 물론 운이 좋아야 화석을 찾을 수 있지만.
이 운, 우연성도 중고가게의 매력이다. 중고가게에는, 혹은 앱에는 내가 찾는 물건이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다. 오늘 있을 수도, 내일 있을 수도, 갑자기 나타날 수 있다. 필요했던 물건을 우연히 만나는 기쁨은, 물건이 '당연히' 있는 마트에서의 쇼핑보다 더 크다. 그렇게 중고가게에서 딱 만났던 스테인리스 냄비, 과일 채반, 아이의 모자, 남편의 와이셔츠(참 많이도 샀지!)는 볼 때마다 그 순간의 작은 기쁨이 떠올라서 기분이 좋아진다. 왜 친구도 약속을 잡아 만날 때보다 우연히 만났을 때가 더 반갑고, 기억에 남지 않는가?
혼돈의 카오스 같은 복잡성은 또 어떤가. 주로 아이들이 참가하는 시나 구청 주관의 대형 벼룩시장에 가보면 정말이지 말 그대로 벼룩이 튀어나올 것 같은 구닥다리 잡동사니부터 저거 함부로 팔았다고 엄마한테 등짝 스매싱당하지 않을까 싶은 위험한(?) 상품까지 천차만별의 구경거리를 만날 수 있다. 자기 집 차고나 앞마당에 물건을 내놓는 미국 가라지 세일에서는 심지어 빈 플라스틱 세제통에 50센트를 붙여놓은 집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센존 옷을 15불에 살 수도 있다. 집을 통째로 탈탈 터는 에스테이트 세일에서는 한국산 호랑이 무늬 밍크 담요를 만나기도 했다. 이런 재밌는 구경거리가 또 어딨지?
가라지 세일이나 벼룩시장, 당근마켓 등의 직거래에서 만나는 판매자와의 스몰톡과 에피소드도 중고거래의 특성이자 추억거리이다. 물론 진상은 잊고 싶은 기억이 되지만(요즘 그렇게 당근에 진상이 많다며;;). 옛 주인의 이야기, 우리 집에 오기까지의 여정이 곁들여진 물건은 더 애틋해지곤 한다.
그러니 중고가게를 계속 기웃거린다. 굳이 덧붙이자면, 물건을 재활용하는 것이니 지구 환경 개선에 미약하나마 일조하는 윤리적 소비도 되는 셈이다. 더불어 확실히 저렴하다! (남편의 매끈한 고급 셔츠는 3500원이었다!) 윤리적 + 합리적 소비를 조장하기 위해(실은 자랑하기 위해) 앞으로 나의 중고물건 연대기를 하나씩 올려보려 한다. (조금만) 기대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