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와 바니타스

어차피 인생무상

by 미키

오 너무 싼데! 쏠쏠히 재밌는데! 하며 중고 물건 사기를 몇 년.

중고 앱과 벗으로 몇 년 지내다 보니 가끔 묘한 부작용을 느낀다.

물욕이 쑥 내려가곤 한다.


첫 증상은 매장에서 나타났다. 오래간만에 '정가'라는 것을 라벨로 보니 0이 하나 더 붙거나 앞자리가 바뀌어 있다. 이게 이렇게 비쌀 물건인가? 이거 중고 앱에서 비슷한 거 본 거 같은데? 그건 1/3 가격이던데?라는 생각에 물건을 내려놓게 되었다. 꼭 필요한 물건이면 사들고 돌아오지만 급한 게 아니거나 단순한 기호성 물건이면 '언젠가 중고 거래에 나올 수도 있겠지.'라는 막연한 기대로 충동이 가라앉았다.

관심 두던 물건이 중고 앱에 올라오면 막상 시들해지는 게 두 번째 증상이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물건들이 중고 앱에 올라온다. 쓸모 없어지는 물건이 이렇게나 많다니! 물건 설명에 붙은 구입 당시의 상황은 가지각색이지만 팔 때의 사연은 몇 가지로 귀결된다. 여행 중에 예뻐서, 결혼식에 가려니 필요해서, 딸아이 주려고, 선물 받아서 가지게 되었다가 초기의 설렘은 사라지고 그야말로 쓸 데가 없어진다. 사이즈가 안 맞아서, 더 이상 필요가 없어서, 옷장이 가득 차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어서 중고 앱에 내놓는다. '100만 원에 산 물건인데 3만 원에 팔아요.' '사놓고는 3번밖에 안 신었어요.' 등 중복되는 판매 사유를 반복해 보게 되니 구매욕이 점점 졸아들었다. 상품 설명을 올린 이가 원래 가격을 써 놓으면 더 그랬다. '그래... 사 봤자 내가 뭐 얼마나 입겠어.' '100만 원짜리를 사도 결국은 이렇게 헤어지는 관계(?)인데 물건이란 게 참 덧없네.'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내 사이즈도 충분히 불어났지. 또 불어나겠지."
"이제껏 없이도 잘 살았는데 굳이 필요가 있겠어."

"내 옷장도 터질 지경인데. 이것부터 내다팔아야 하지 않겠니."
"거금을 주고 사도 이렇게 헐값이 되다니, 물건이란 게 참 덧없네."


물론 그동안 아주 잘 써왔던 물건이었다던가 무척 아끼던 건데 이사로 어쩔 수 없이 내놓는다던가 하는 내용도 있다. 나름의 소임을 다한 물건들이고 주인들은 그 효용을 충분히 누렸을 것이다. 새 주인을 만나면 다시 제 역할을 해낼 것이다. 나의 중고 가방이 지난 3년간 내 외출을 돕고, 중고 디지털 피아노가 3년간 아이의 오락기 역할을 하고, 중고 레고 박스가 놀이를 풍부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간 숨은 보물 창고처럼 느껴지던 중고 거래터가 '물건들의 무덤'처럼, 그것도 줄초상처럼 보이는 순간도 오다니. '왜 굳이 중고를 사?'라며 중고 물건에 대해 불신 혹은 불쾌감을 보이던 사람들의 심정은 이런 거였을까?


그리고 최근 읽은 책의 정물화가 떠올랐다. 결국은 시들어 버리는 꽃, 과일, 널브러진 사치품, 해골 등을 통해 인생무상을 상징하는 바니타스 정물화다.

Pieter Claesz (17세기) 부는 자랑하고 싶은데 겸손은 해야겠고 종교적 상징도 있어야겠고 해서 나온 종합 정물화랄까.


still-life-with-peacock-pie_pieter-claesz__67121__27312.1565906867.jpg 같은 작가의 그림. 이 정도쯤은 남기고 버려야 부자 아니겠음? 하는 느낌이 온다..


화려한 꽃,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낸 음식, 넘치고 흘리고 버려도 아무렇지 않을 듯한 풍요로운 순간에 그야말로 'still' 버튼을 눌러 인생의 허무함을 'play' 시키는 정물화(still life)라니. 끊임없이 올라오는 중고 물건들의 홍수 속에서 오히려 물욕이 사그라드는 심정이 얼핏 겹쳐졌다. 그림을 주문한 17세기 네덜란드의 무역상도 아닌데 말이다.


그림을 주문했을 과거의 신흥 부자만큼 부는 없지만 그만한 풍요는 누리고 있어서일까? 중고 거래 역시 모든 것이 넘치는 과잉의 결과이자 순환으로 보여서일 수도 있겠다.

그나마 새로운 제조를 낳지 않는다는 것에서 조금이나마 위안을 삼자. 순환 중에선 선순환 아니겠나. 지난번에도 말했듯이, 중고 패딩 거래로 오리 한 마리, 라쿤 한 마리는 살릴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당분간 거래 버튼을 누를 것 같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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