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리 삶에 생존만 있는 게 아니라 사치와 허영과 아름다움이 깃드는 게 좋았다. 때론 그렇게 반짝이는 것들을 밟고 건너야만 하는 시절도 있는 법이니까.” 소설가 김애란의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 중 한 구절이다. 코로나19 속에서 ‘생존’이 삶의 화두인 이 시절, 우리에겐 반짝이는 징검다리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미술은 다리를 이루는 단단한 징검돌 중 하나이다.
위로의 미술
지난해 여름, 한국화가 김보희의 개인전이 열린 삼청동 금호미술관 앞에는 사람들이 줄지어 섰다. 코로나19로 집콕이 장려되고 문화 활동이 절멸되어가던 때였음에도 이 전시는 약 두 달간 총 1만 8천여 명이 관람하며 국내 현역 작가의 전시로는 최고의 흥행 기록을 남겼다. 흥행의 요인으로는 VTS의 멤버로 미술 애호가인 RM이 관람하며 SNS에 소개한 것이 꼽히지만 “작가가 그린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이 코로나19 시대에 위안과 치유가 되어주는 듯하다.”라는 큐레이터의 설명이 그보다 더욱 와닿는다.
그림은 위로가 된다. 음악, 영화, 책 등 예술이 위로를 전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중 미술 작품은 가장 짧고도 가장 긴 시간으로 우리를 위로한다. 1초의 눈 맞춤으로도 미술은 관람자의 정신을 휘어잡을 수 있으며, 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외형으로 유한한 생을 사는 인간을 전율케 한다. 그 효과는 신체로 옮겨가기까지 하여 스탕달 신드롬- 미술품이나 예술 작품을 본 순간 격렬하게 일어나는 각종 흥분과 탈진 현상-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만큼 마음과 정신에 빠르게, 깊숙이 관여하는 미술은 위로의 힘도 세서 슬픔을 녹여내곤 한다.
김보희의 작품은 실제로 보는 제주 이상의 감상을 낳는다. 푸르른 바다의 재현을 넘어 바다 앞에서 느끼게 되는 감동과 감화까지 전한다. 그림 앞에서 우리의 감각은 고양되고 사고는 확장된다. 녹아내린 슬픔을 평온으로, 기쁨으로, 새로운 발견으로 바꾸어내는 것이 미술의 위로다.
취향의 미술
SNS가 주요 소통 수단이 된 지금, 미술 작품은 개인의 취향, 혹은 트렌디함을 드러내는 소품으로도 작용하곤 한다. 요즘의 인테리어 사진에서 자주 등장하는 ‘무심히 놓인 액자’ 안에는 앙리 마티스나 피카소의 간결한 드로잉이 담겨 공간의 주인이 ‘모던하고도 고급스러운 취향’임을 슬며시 전한다. 심미성에 집중된 미술관의 공간 자체도 SNS의 사진에 멋진 배경이 된다. 그 때문인지 흥행하는 전시는 촬영에 적합한 장소나 작품인 경우가 많다. SNS에 올라간 멋진 사진들로 바이럴 마케팅되어 새로운 관람객을 전시장으로 불러들인다.
이런 트렌드에 대해 “미술을 유행으로만 즐기는 것 아닌가?”, “예술 작품이 소품일 뿐인가?”라는 비판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유행으로 소비하고, 소품으로 소모하는 것 또한 미술을 즐기는 여러 방법 중 하나이다. 꾸준히 즐기다 보면 자신의 취향도 생기게 된다. 일단 유행하는 그림을 걸기 위해 액자를 샀다면 다음에는 다른 그림을 찾아보게 될 것이다. SNS에서 좋아 보이는 전시에 갔다가 자신의 인생 작품을 만날 수도 있는 일이다.
어떤 동기에서건 미술관을 찾는 이들은 늘고 있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2년에 한 번 집계, 발표하는 문화향수실태조사에 따르면 미술 전시 관람률은 2012년 10.2%에서 2018년에는 15.3%까지 높아졌다. 미술관을 목적지로 하는 택시 이용률이 2018년 7, 8월에는 2017년의 같은 기간보다 234% 증가했다는 연구 보고도 있다. 늘어가는 관람객과 함께 그들의 취향 역시 세분화되고 발전할 것이다.
가치의 미술
늘어난 것은 관람객의 숫자뿐만이 아니다. 미술품의 거래액도 늘었으며 렌털 시장도 확대되고 있다. 갤러리들의 ‘미술품 장터’인 화랑미술제의 2021년 작품 판매액은 예년의 2배를 넘겼다. 젊은 관람객의 비중도 늘었다고 한다. 최근 미술품 투자에 대한 MZ 세대의 관심이 높아졌음을 보여주는 일례다. 부자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미술품이 ‘아트테크’라는 이름으로 주식이나 부동산과 같은 투자 대상으로 각광받고 있다.
미술품 거래 플랫폼 아트앤가이드를 운영하는 김재욱 대표는 미술품 투자에 대해 ‘감가상각이 일어나지 않고, 금융상품의 리스크를 낮추는 포트폴리오 효과가 있으며, 수익률이 높고, 시장 가능성이 크며, 환금성이 있다.’는 것을 장점으로 꼽았다. 세제 혜택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 포인트이다. 고가의 미술품을 공동구매해 일부 지분을 가질 수 있는 ‘조각 구매’도 새로운 투자 형태로 등장해 ‘아트앤가이드’ 외에도 ‘아트투게더’, ‘테사’ 등 플랫폼이 증가했다. 실물 작품을 디지털 자산화하여 NFT(Non Fungible Token 대체 불가 토큰)의 기술로 소유권을 증명하고 거래하며, 새로운 작품까지 자유롭게 만들 수 있는 시장도 준비되고 있다.
마음을 위로하고, 취향을 대변하는 미술은 다양해진 구매 방법으로 가치 투자의 대상이 되어 우리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우리도 한 걸음 더 나아가 미술과 벗해 보는 게 어떨까.
-------------------------
*기업 사보의 기고글이라 조금 딱딱하지만 오랜만에 미술 관련 글이라 역시 즐겁게 쓸 수 있었다. 예전에 브런치에 쓴 글의 인용문을 다시 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