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정령 파렌하이트
1. 그녀의 정령 파렌하이트
K는 강남역 대로의 횡단보도를 건너는 중이었다. 순간, 향기가 얼굴을 스쳤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우르르 길을 건너는 뒷모습들은 모두 낯설었다. K는 코끝에 머무는 향이 사라지는 게 아쉬워 초록불이 깜박이는 것도 잊고 횡단보도의 흰 줄 위에서 머뭇거렸다.
디올의 파렌하이트는 K가 무척 좋아하는 향수였다. 파렌하이트 향을 맡으면 문득 아득한 곳으로 공간이동을 하곤 했다. 그곳은 눈 덮인 겨울밤 도시 속 고요한 공원이기도 했고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가을 숲 속 산장의 난롯가 앞이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가 있었다. 그는 겨울밤의 하얀 공원에서는 검은색 코트에 와인색 목도리를 두르고선 한쪽 손에 다른 손의 가죽장갑을 벗어 들고 따뜻하게 데워진 손으로 K의 손을 녹여주었다. 산장의 난롯가 앞에서는 목을 두껍게 감싸는 아가일 무늬 스웨터를 입고 장작을 집어넣다가 K에게 미소 짓곤 했다. 그에게 어깨를 기댈 때면 파렌하이트는 K의 몸 전체로 스미는 듯했다. 아니, 파렌하이트가 그녀를 감싸안는 느낌이다. 그러나 향이 사라지면 그도 함께 사라졌다.
말하자면 파렌하이트는 K에게 이상화된 남성의 정령을 보여주는 매개체였다. 지니가 튀어나오는 알라딘의 램프처럼 말이다. 그 어떤 남자 친구에게도 파렌하이트를 선물하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K의 환상 속에 있는 정령은 현실의 누구에게도 덧씌워질 수 없었다. 우연히 이 향수를 쓰는 이와 잠깐 교제했을 때 K는 향을 자주 맡을 수 있어 기쁘면서도 오히려 상상에 흠뻑 빠질 수만은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 정도로 좋아했다면 자기 몸에 뿌리는 방법도 있지만, 일상이 되면 환상이 희미해질 것은 분명했기에 K는 결코 직접 사용하지 않았다.
향수에도 유행이 있는지, 파렌하이트 향을 우연히라도 맡게 되는 순간은 점점 드물어졌다. 강남역 대로에서 거의 십 년 만에 향과 조우한 횡단보도 위에서 K는 정령과의 상상이 추억으로 멈췄음을 깨달았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는 말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못 보던 새에 정령은 더 이상 살아 움직이지 않았고 그의 미소는 빛바랜 흑백 사진처럼 고정되어 있었다. 아쉬움과 그리움에 묘한 안도가 섞여 들었다.
어쩌면 이제는 누군가에게 이 향수를 선물해도 되지 않을까.
K는 깜박이는 초록불이 꺼지기 전에 서둘러 남은 길을 건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