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로울 때가 있고, 타이트할 때가 있어야 한다.
앙당물은 입매.
끝까지 빳빳이 서 있는 수염.
다리 옆으로 꼭 붙인 꼬리.
일을 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좋아하는 스크래처 위에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는 온이의 자세가 뭔가 비장하다. 겨울이라 베란다 쪽 문을 열어두지 못해서 아쉽다는 표현을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흑미가 다가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인지 아주 단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온이의 표정이 왠지 우습기 짝이 없다.
깨발랄하고 언제나 어떤 장난을 할까 고민하고 있는 흑미에 비해 늘 진중하고 얌전한 온이지만 이렇게 다리옆에 단단히 꼬리를 붙이고 앉은 모습은 처음인 것 같다. 손도 너무나 공손하게...
자신만의 루틴을 가지고 있는 온이는 이른 아침 나를 깨우고 나서 아침 산책을 위해 준비하는 나를 지켜보고 있다가 나가기 전에 "냐~"하며 아침밥을 조른다. 그렇게 아침을 대접받고 나면 창밖을 바라보다가 흑미와 엎치락뒤치락하며 놀고 나서는 조용히 방에 들어가 몸을 뉘인다. 시계도 못 보는 이 녀석만의 루틴인 듯하다.
이 아이는 매일 같은 루틴을 체크리스트에라도 적어놓은 듯 한 가지씩 해 낸다.
나도 이 아이를 보며 오늘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번 주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번 달에는 무엇을 해 내야 하는지를 다이어리에 적어두고 매일 검토를 한다. 하지만 한 살 한 살 먹어가며 그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동기가 흐려지고는 한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루틴을 만들고 할 일을 적어두는 것일까. 이것들을 잘하고 나면 나는 어떻게 변하는 걸까.
매일 집에서 자신만의 루틴으로 삼시 세 끼(?)를 먹고, 밖을 바라보며, 동생을 돌보고(?), 생각에 잠겨 있는 온이는 막 우리 집에 왔을 때부터 매해 새로운 모습을 보이곤 했다. 올해에는 깨방정인 흑미라는 동생이 생기고는 동생을 배려할 줄 알게 되었고, "냐~"하고 울기도 하며, 다소 의젓한 형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작년보다 올해 더 긴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었고, 작년보다는 올해 좀 더 긴 번역을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꽤 많이 웃었고, 꽤 많이 울었던 한 해의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 지금 생각해 보면 한 없이 행복하다고 느낀 날도 있었고, 세상이 무너지도록 슬픈 날도 있었다. 아직 다 살지 못한 나에게 이러저러한 일들이 일어나고도, 작년과는 조금은 다른 나의 삶이 있다는 것, 새로운 만남도 있었고, 새로운 기쁨이 있었다는 것은 매우 감사한 일인 것 같다.
그러한 일들은 모두, 내가 지금 당장 해야 할 일들에 손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매우 지루한 오늘이지만, 체크리스트에 오늘 해야 할 일을 적어두고, 벽돌 깨기를 하듯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해 두었더니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아주 조금씩은 변화했던 것은 아닐까.
온이가 매해 성장하듯, 나도 그렇게 성장해야지.. 하고 오늘도 생각한다.
흑미도 내년에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겠지. 온이와 흑미가 내년에는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소리를 내주고 행복을 느꼈으면 좋겠다. 그만큼 나도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울고 더 많이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다. 그러려면
생각할 때, 일 해야 할 때, 움직여야 할 때 꼭 그것들을 해야겠지.
오늘은 나도 없는 꼬리를 말고 나에 대해, 행복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아야겠다.
온아, 같이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