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북 테라피스트 깽이 Jan 25. 2023
웬일로 아버지가 맛있는 걸 먹으러 가자고 했다. 민혁은 평소 바쁜 아버지의 권유가 싫지 않았다. 엄마의 얼굴은 이제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되어 버렸다. 책장 한켠에 액자로만 남아있는 엄마의 얼굴은 이미 민혁의 머리에서도 지워져있었다. 아주 어렸을 적 병원에서 힘겨운 얼굴을 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엄마의 숨소리만 기억할 뿐이다.
결국 엄마는 돌아가셨지만, 아버지는 민혁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하면서도 집에서 음식을 해 먹거나 요리를 가르쳐 주곤 하셨다.
아버지를 따라 간 레스토랑은 어느 고급 호텔 라운지였다. 높은 천장에 아름다운 샹들리에가 눈이 부셨다. 아버지가 보너스라도 받으신 걸까. 배정이 된 자리에는 이미 선객이 자리하고 있었다.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아버지가 민혁의 팔을 잡아끌었다.
"일찍 오셨네요."
"온 지 얼마 안 되어요. 앉으세요"
단정한 옷차림을 한 여자가 아버지와 만나고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지인을 통해 만나게 되어 서로 좋은 마음으로 만나고 있다고 한다. 그 여자의 옆에는 민혁보다 살짝 나이가 위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조신하게 앉아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자리였기에 민혁은 당황했지만, 자신과 비슷한 표정을 한 건너편 여자아이 때문에 계속 어이없는 얼굴을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쪽도 아무것도 모른 채 따라온 것일까.
어쨋든 그 만남 이후로 몇 달이 안 가서 아버지의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민혁에게 엄마가 생긴 것이다.
더 이상 아버지는 요리를 하지 않았고, 민혁은 청소를 하지 않았다. 엄마라고 불러야 하는 여자가 원래부터 자신의 일인 것처럼 집안의 모든 일을 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민혁은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나 게임하는 시간도 늘어났다.
그 여자의 딸은 원래 창고로 쓰였던 방을 새 단장을 해서 들어와 함께 살게 되었다. 민혁보다 2살이 많다고 '누나'라고 부르라고 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누나'가 없었기에 민혁은 차마 입으로 부르지 못했다. 용건이 있을 때는 고개를 숙인 채 "저기..." 하고 말을 걸었다.
민혁의 '누나'가 된 연서는 그런 민혁이 귀엽다. 2살밖에 어리지 않지만 아직 그녀보다 키가 작은 고1짜리 민혁이 동생이 된 것이 매우 기뻤지만 처음 생긴 남동생이기에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래서 학교의 동갑내기 남자아이들에게 하는 것처럼 툭툭 말을 내뱉었다.
"야, 편의점 안 갈래? 가면 내가 먹을 과자 좀 사다 줘"
만 원짜리 지폐를 한 장 내밀면서 한마디 덧붙인다. "나머지는 너 먹고 싶은 거 사 먹어도 돼" 용돈을 주고 싶었던 걸까. 민혁은 아무렇지 않게 돈을 내밀며 과자 셔틀을 시키는 연서가 좀 무섭게 느껴졌다. 게다가 더 위축이 되는 건 너무나 당당하고 자존감이 높은 연서의 말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연서가 다니는 고등학교는 성적이 좋은 상위 클래스의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인 데다가 늘 전교 5등 안에 드는 그녀의 성적 때문에 더 거리감이 느껴졌다.
" 내 동생? 너무 귀여워~ 내가 말을 걸면 부끄러워서 대답도 못한다니까? 근데 요리는 또 얼마나 잘하는지~ 지난번에는 까르보나라를 만들어 줬는데 진짜 맛있었어~ 부럽지? 우리 엄마는 요리도 못하는데~ 요리 잘하는 동생을 두다니 나는 행운아야~ 너무 귀여워서 자꾸 괴롭히게 된다니까~"
학교에서 돌아와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연서의 목소리가 방에서 흘러나왔다. 그녀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민혁은 전혀 몰랐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책상에 앉아 책을 열었지만 민혁의 귀에서는 아까 연서가 했던 말이 귀에서 떠나지 않는다. 평소에 자신에게 잔심부름을 시키거나 장난을 친 것도 연서의 호감의 표시였던 것을 깨닫게 되었다. 연서의 그런 의문스러운 행동들이 싫지는 않았지만, 그 이유를 알게 되고부터는 좀 더 가깝게 느끼게 되었고 민혁 역시 연서를 조금씩 편하게 대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고3은 연서에게도 매우 바쁜 한 해였다. 연서와 친해질 수 있을 것을 기대했던 민혁이지만 약대를 목표로 하는 연서는 매일을 독서실에서 보내야 했다. 그녀가 원하는 대학에 가서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대학생이 되고 나면 조금은 자신을 돌아봐 줄까. 아니야 더 바쁠지도 모르지. 밤낮없이 바쁘게 공부하는 연서를 위해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민혁은 연서에게 줄 초콜릿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