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북 테라피스트 깽이 Jan 27. 2023
대학교 2학년 여름.
이제 성인이 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나름 어른이 되었다며 늦은 밤거리를 쏘아다니기도 하고, 대학생이라며 미팅하기도 바쁜 주변 친구들에 비해 도준은 좀 더 어른스러웠다. 땅에 시간을 버리기보다는 좀 더 빨리 돈을 벌어 한시라도 빨리 부모님의 그늘아래서 벗어나 몸도 마음도 성인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일까, 주변친구들이 권하는 미팅자리도, 여자 아이들의 흥미 어린 시선이나 어딘지 모르게 가녀린 코맹맹이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런 그도 관심을 갖게 된 이가 이연서,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랐다. 교양과목이 거의 같았던 터라 자주 보게 되었다. 처음부터 눈에 띈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바람에 나부끼는 하얀 커튼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화장기 없는 그녀의 얼굴이 빛나 보였다. 여자라면 담을 쌓고 있던 도준이었기에 말을 걸어보기는 커녕 쳐다보지도 못했다. 행여 눈이라도 마주칠까 겁을 내었다.
그녀에게 관심을 가진 것이 도준만은 아니었는지 주변에 함께 밥을 먹는 친구 녀석이 그녀에 대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요즘 우리 학교에서 인기 많은 여자애가 누군지 아느냐며 그녀가 연서라고 했다. 그때까지 이름도 몰랐던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일부러 멋을 부리지 않아도 예쁜 그녀. 늘 밝게 웃고 인사도 잘하는 그녀.
어딘지 모르게 모성본능을 일으키는 가녀린 그녀이지만 당찬 부분도 있어서,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하면 가감 없이 따진다고 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같은 과의 이연서라고 합니다. 김도준선배님이시죠? 공부를 열심히 하신다며... 수업에 대한 이야기는 선배에게 물어보라고 서준선배가 이야기하시더라고요. 잘 부탁드려요~ 특히 과제위주로? "
장난을 섞어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한 번도 움직인 적이 없는 마음이 언제부터인지 쿵쾅쿵쾅 두 방망이 질을 쳐대고 그 소리가 밖에 까지 들릴까 겁이 난다. 도준은 행여 자신의 마음이 드러나 얼굴이라도 붉히게 될까 얼른 인사를 하고 돌아선다.
"아. 그래.."
하지만 마음으로는 벌써 열두 번은 넘게 그녀의 손을 잡고 나야말로 잘 부탁한다며 이야기를 한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더 해맑게 웃으며 매번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그에게 무슨 과목을 들을 것인지, 무슨 과목을 들어야 하는지 상의해 오고 도준의 시간표와 비슷한 자신의 시간표를 짜 왔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수업을 듣고, 그녀와 함께 그룹으로 과제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상이 되었다. 그녀는 주변에 항상 많은 친구들을 몰고 다녔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두 그녀를 좋아했다. 당연히 함께 수업을 하고 과제를 하는 인원이 도준말고도 대여섯은 그녀의 지인이었다. 도준은 그녀가 일부러 함께하자고 매번 손을 끌었기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 그룹에 낀 상태였지만 말이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3학년 때던가..?
"선배, 나 선배 좋아해도 돼요?"
연서와 함께 다니는 지연이라는 친구. 당시 내 주변에는 CC라며 연인으로 발전하는 커플이 몇 있었다. 하지만 도준은 그런 시간에 되려 자신의 일을 하는 것에 집중을 했다. 토익점수를 올려두거나, 그 밖에 중국어나 일본어를 공부하고, 과외를 하는 것 같은.. 그러다 보니 이렇게 고백을 받는 일이 한 해에도 몇 번은 있지만 매번 거절해 왔다. 그게 함께 하는 그룹의 아이였다면 그 아이는 꼭 고백 후 그룹에서 빠져나갔다.
"미안해. 나는 너와 그럴 마음이 없어. "
이 학교에 들어오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던가. 재수는 절대로 안 시켜 준다는 부모님의 말씀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얼른 어른이 되고 싶어. 얼른 독립하고 싶어. 그러기 위해서는 대학도 높은 점수로 졸업을 해야 했다. 그래야 좋은 곳에 취직을 할 수 있고, 보다 빠르게 부모님한테서 헤어 나올 수 있다. 언제나 부모님은 말했다. 너 때문에 우리가 억지로 이렇게 함께 사는 거라고...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어째서 자신 때문에 그들이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일까. 도준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과 같을 수 없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해맑게 웃을 수 없었다. 누군가를 만나고 웃고 떠들 수가 없었다. 그들의 아무 생각도 없는 깔깔거림이 귀에 거슬렸다. 그런데 어느새 그녀가 그의 마음에 한자리를 차지했다.
자신을 숨기느라 온 힘을 다했다. 여기서 무너지면 안 된다고.. 절대로 그녀가 자리한 이 마음속의 한 구석이 점점 넓어져서는 안 되는 거라고. 그러면 다 망치는 거라고... 그렇게 숨기고 숨겨온 마음이었다.
그런데 졸업과 동시에 그 마음의 댐이 무너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