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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짧은두루미 Jan 16. 2019

할 수 있는 만큼만 한다는 것

작은 노력도 인정해주기

당사의 한정된 채용인원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하여 귀하의 우수한 능력과 자질에도 불구하고 부득이 면접대상자로 선정되지 못하였음을 알려 드리오니 널리 양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2013년 모 기업의 대졸 공채 전형을 진행 중이던 내가 실제로 받은 메일의 일부다. '한정된 채용인원'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수한 능력과 자질을 가진' 자들 보다도 더 훌륭한 인재가 되어야 했다. 그랬기에 토익 시험에서 985점을 받았을 때는 만점이 아니라고 속상해했고, 반액 장학금을 받았을 때는 전액 장학금이 아니라고 속상해했고, 여자들이 취업 시장에서 불리하다는 것을 느꼈을 때는 심지어 남자로 태어나지 못했음에 속상해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취업을 하고 나서도 평가는 끝나지 않고 이어졌다. 연말 성과 시즌이 되면 일 년동안 잘한 것을 팀장님께 어필해야 한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어째서인지 잘했던 건 좀처럼 떠오르지 않고, 못했던 것, 실수했던 것들만 끊임없이 떠올랐다. 늘 남들보다 더 많이, 더 잘, 더 완벽하게 해내야만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나의 작은 노력들은 빛을 발하지 못한 채 모두 묻혀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우연히 지금의 요가원에 들어선 것이다. "이마가 정강이에 닿지 않아도 돼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세요." 그 말이 나한테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모른다. 무엇을 하든 잠을 줄여가며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열심히 해야만 인정받을까 말까 한 세상에서, '할 수 있는 만큼만'해도 되는 일이 있다니! 이렇게 나에게 친절함과 사랑을 베푸는 명상을 자비명상이라고 한다. 내가 들었던 요가 수업 속에 자비명상이 녹아있었던 것이다. 그 친절함과 자비에 마음을 빼앗긴 나머지, 회사까지 그만두고 요가 강사가 되겠다고 나서기에 이르렀다.


지도자 과정 속에서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칭찬하는 연습을 한다. 하루 일정이 끝나면 항상 되돌아보기 시간을 가지며 오늘 내가 잘했던 점, 칭찬해주고 싶은 점을 발표한다. 처음엔(사실은 아직도) 좀처럼 생각해내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사소한 것이라도 잘 한 점은 분명 존재한다. 졸음을 이기기 위해 일어나서 수업을 들었다든가, 안 되던 동작을 잘하고 싶어서 수업 전후로 연습을 했다든가, 티칭 연습을 할 때 떨지 않기 위해 숨을 깊게 쉬었다든가.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내가 의도하고 노력했던 부분들을 인정해주는 연습을 한다. 가끔은 유치하단 생각이 들 때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이런 노력들을 알아주었을 때 비로소 막혔던 숨통이 트인다.


스스로의 노력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의 노력 또한 알아봐 줄 수 있기도 하다. 지도자 과정의 첫 주, 이곳에선 판단과 평가가 없을 것이라는 선생님들의 말에 속으로 콧방귀를 뀌며, 어떻게 판단, 평가를 안 할 수가 있지?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학교에서, 사회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평가받아왔듯, 나 또한 나 자신을, 또 다른 사람들을 내 멋대로의 기준대로 판단하고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판단 평가 없을 거란 그 말이 진심이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한다. 노력하고 있음을 알아주고, 아낌없이 칭찬해주는 선생님들 덕분이다.


자비명상의 잘못된 예

요가뿐만 아니라 자비명상 클래스에 들어가면서 부족한 나를 그 자체로 바라봐주는 연습, 온전히 받아들이는 연습, 괜찮다고 말해주는 연습을 꾸준히 이어왔다. 그러다가 너무 자비로워진 나머지, 요가 가기 귀찮은 내 마음에 귀 기울여 집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는다거나, 티비를 사랑하는 나 자신을 알아차려 하루 종일 소파에 누워 티비만 보기도 하는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비명상의 잘못된 적용 사례다.


마치 내 이야기가 아닌 척 선생님께 질문했다. 자비명상을 하면서 사람들이 게을러지면 어떡하냐고.

선생님은 대답했다. "명상은 정신승리가 아니에요. "

그렇다. 내가 했던 건 자비명상을 빙자한 정신승리였다.


완벽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실수투성이인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도, 내 갈 길은 가야 한다. 내가 가는 길이 늘 완벽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멈춰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 무언가 하다가 살짝이라도 어긋나면 '리셋'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가? 나는 그림을 그리다가도 조금 이상하다 싶으면 새 종이를 꺼내 들곤 했고, 인생도 스무 살부터 다시 살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리셋해서 처음부터 시작하면 완벽하게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자비명상은 나에게 "인생은 어차피 리셋이 안되니, 못난 부분도 받아들이는 걸 연습하라"는 메시지를 주었다.


자비명상의 실패도, 커리어의 실패도 모두 패인은 '비전의 부재'에 있었다고 결론 지어본다. 내 갈 길이 무엇인 지를 모르겠으니, 조금만 힘들어도 자꾸만 멈춰 서는 것이다. 모든 것에 앞서, 내가 어떤 요가 강사가 되고 싶은 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 지 먼저 명확히 하겠다는 의도를 세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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