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했으면 남미 여행 정도는 가야 하는 거 아니야?

46일간의 남미여행의 시작, 퇴사

by 목짧은두루미

직장인들에게도 꿈이 있나요?

내 얕은 인간관계 내에서 편협하고 성급하게 판단해보건대, 모든 직장인들의 꿈은 '퇴사'가 아닐까 싶다. 신입사원 시절의 일이다. 보고자료는 항상 이면지를 활용해야 한다는 지침이 내려왔다. 자연보호에 원가절감까지,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만한 합리적인 지침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실수로 새 용지에 보고자료를 인쇄했을 땐 멀쩡한 자료를 파쇄기에 갈기갈기 갈아버려야 했고, 이면지가 부족할 때는 이면지를 만들어내야(?) 했다. 그 이후로는 없는 이면지를 만들어 내기 위해 의미 없는 프린트를 잔뜩 뽑는 것이 내 업무에 추가되었다. 회사는 늘 이런 식이었다. 목적을 알 수 없는 일을 바쁘게 하는 곳. 전무님이 주말에 출근하시니 우리도 나가야 한다는 말에 꼭두새벽부터 출근해 할 일 없이 눈알만 이리저리 굴리던 날, 나의 꿈도 명확해졌다. 나의 꿈은 퇴사다.


“ㅇㅇ”면 “ㅇㅇ”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서울에 있는 모 대학을 나왔으면 최소 대기업 정도는 가야 하는 거 아니야? 대기업 몇 년 차면 무슨 차 정도는 끌어야 하는 거 아니야? 결혼 한 지 몇 년 됐으니 이제 아기 낳아야 하는 거 아니야? 안타깝지만 나는 살면서 한 번도 이런 굴레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다.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는 이 굴레는 평생 내 삶을 옥죄었지만, 가진 것이라곤 성실함뿐인 나에겐 놀랍게도 이런 식의 '정해진 경쟁에서 이겨내는 것'이 가장 쉬운 일이었다. 나다워지는 것, 내 길을 개척하는 것은 나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게 아니라 자기계발서에 나오는 멋진 사람들만 하는 것인 줄 알았다. 그래서 평범한 나는 그 좋다는 퇴사를 하면서까지 그 굴레를 쓰고 나왔다. ‘퇴사하면 세계여행 정도는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스스로 생각했다.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세계여행의 꿈을 꿔본 적 없는 쫄보였는데도 말이다.

꿈은 따로 있었다. 나에게 긴 여행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내 인생 여행지인 발리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발리는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 아닌가. 내 인생이 평생 그래왔듯, 이번에도 내 마음이 향하는 곳 대신 ‘ㅇㅇ정도는 해야 할 것 같은’ 곳이 퇴사 여행지로 선정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팔자에도 없는 남미 여행이었다.


택시를 타고 가다 손과 발이 묶여 납치된 이야기, 골목에 들어갔다가 총격전이 일어나 황급히 도망 나온 이야기, ‘남미 여행’ 하면 떠오를 법한 그런 스펙터클한 이야기는 없다. 요즘 배틀트립이나 짠내투어와 같은 여행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아 나도 여행 가고 싶다’란 생각이 좀처럼 들지 않는다. 여행마저도 ‘배틀’로 접근해 여행에 순위를 매기는 요즘의 현실에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배틀’로서의 가치는 전혀 없는, ㅇㅇ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아서 간 남미 여행이다. 쫄보도 남미에 갑니다.

쫄보라서 중간까지밖에 못오른 엘 찰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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