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 『돼지책』을 읽고
#33 돼지가 되지 않는 방법: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 『돼지책』을 읽고
남자는 즉사했으나 아들은 기적적으로 살아나 인근의 병원으로 후송됐다. 그런데 응급실에서 환자를 맞닥뜨린 의사가 별안간 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더니 이렇게 소리친다. "맙소사, 이 애는 내 아들이에요!" 그렇다면 아이의 아빠는 도대체 누구인 걸까? 익히 접했을 이 수수께끼는 사람들이 흔히 가지고 있을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제대로 겨눈다. 과연 아이는 둘 중 누구의 아들일까. 죽은 남자? 아니면 의사? 사실 아이는 두 사람 모두의 아들이다. 둘 중 한 사람이 아이의 아빠가 아닌 엄마, 즉 여의사였으므로.
이 수수께끼의 정답을 알았을 때 느꼈던 당혹감이 영국의 그림책 작가 앤서니 브라운이 쓰고 그린 『돼지책』(허은미 역, 웅진주니어, 2009)을 읽으며 새삼 떠올랐다. 그는 적확한 문장과 시선을 묶어두는 그림들로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들을 우리 앞에 슬그머니 던져놓았다. 책은 길게 말하지 않는다. 짧은 문장, 멈춘 듯 단정하고 나른한 그림들이 무척 쉽게 읽히면서도 곱씹을수록 쓴웃음 나게 신랄하다. 앤서니 브라운은 1983년 『고릴라』로 영국도서관협회에서 그 해 최고의 그림책에 주는 케이트 그린어웨이 상과 커트 매쉴러 상을, 『동물원』으로 또다시 케이트 그린어웨이 상을 받으며 세상 속의 권위와 편견을 그림책으로 통렬하게 풍자해왔다. 『돼지책』이 꼬집고자 하는 것 역시 권위와 편견이라는 범주 안에 놓인다. 천연덕스러운 글과 그림으로 가사노동에 대한 성(性)적 고정관념의 민낯을 가감없이 들춰낸다.
다른 것보다도 이 책이 그림책이라서 무척 반가웠다. 개인의 사고 속 고정관념의 발원지가 어디일까를 생각해보다보면 더더욱 그렇다. 부모님과 선생님 같은 어른들의 말씀, 심심할 때마다 펼쳐보았을 동화책과 그림책, 학교라는 곳에 처음 들어가 받아본 교과서…… 그렇게 어린 시절 부지불식간에 무수히 접하고 들었을 모든 것들이 바로 고정관념을 포함한 우리의 의식세계를 먹이고 키워낸 자양분 아니었겠는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어린 시절에 체험될 무언가의 올바름에 대해 고민하는 일은 무척 중요하다.
사려 깊지 못한 교과서나 동화책, 그림책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아빠는 서류가방을 든 정장차림으로 출근을 하고, 엄마는 앞치마를 두른 채 잘 다녀오시라고 인사를 한다. 아빠는 사무실 책상에 앉아 일을 하고, 엄마는 채소가 담긴 장바구니를 들고 귀가한다. 너무 구식 아니냐고? 이런 것들이 바로 지난 해 국가인권위원회가 초·중등 교과서 90종을 분석하며 지적한 교과서 속 삽화들의 내용이다. 그림책도 마찬가지다. 2015년 성균관대 아동청소년학과에서 연구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초등교과서에 수록된 그림책 59종에서도 여성의 가사노동 활동 묘사가 남성에 비해 4배 정도 많았다고 한다. 아이들이 이런 교과서와 그림책을 주변 환경으로 자라난다면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도 자연히 동반성장할 수밖에 없다. 고민 없이 답습되어온 교육의 틀에 균열을 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 하나의 균열이 점점 커져 낡은 틀을 허물 때까지 말이다. 1986년 세상에 처음 나온 이 『돼지책』이 아직도 우리에게 긴요한 이유다.
책에는 아침마다 "여보, 빨리 밥 줘."를 외치고는 '아주 중요한' 회사로 휑하니 가버리는 남편과 "엄마, 빨리 밥 줘요."를 외친 뒤 '아주 중요한' 학교로 휑하니 가버리는 아이들이 나온다.(pp.3-4) 맞벌이를 하면서도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다림질을 하는 아내의 일에는 '아주 중요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지 않는다. 정말로 아주 중요한 일은 뭘까. 왜 우리 집이라고 부르면서 정작 그 우리 집을 돌볼 가사 노동은 우리가 다 같이 하지 않고 여성, 특히 아내 또는 어머니의 전유물로 남겨두는 걸까. 학교를 위해서 회사를 위해서 나 자신을 먹이고 입히는 일, 내가 사는 공간을 돌보는 일 같은 건 아내에게 또는 엄마에게 떠밀어 둬도 좋은 삶을 과연 떳떳한 일인분의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제 몸 하나쯤 각자 건사할 줄 아는 것, 나 하나만큼은 스스로 책임지며 살아가려는 자세, 정말로 아주 중요한 일이란 그런 게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