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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라보 Nov 24. 2024

일상의 언더독에 대한 소회_
손톱깎이

뷰티일상




깎이 에게,


오늘은 너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감사의 마음을 전하려고 해.

늘 어둔 서랍 속에서 조용히 기다리다 나를 위해 헌신하는 네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이제야 제대로 깨닫게 되었거든. 


손톱을 내칠 때마다 네게 악역을 맡기곤 했지만, 한 번도 그 고마움을 표현한 적이 없다는 걸 알았어. 넌 항상 궂은일을 깔끔하게 정리해주고, 때로는 큐티클까지 제거해 주지. 한낱 '손톱깎이'라 불리며, 손톱 만을 위한 도구로 취급된다는 게 참 억울할 거야.


내가 무리한 요구를 할 때도 있었어. 코털이 도발하는 걸 보고 무의식적으로 너를 집어 들었던 때, 기억나? 그때 내 실수로 피가 났는데 난 너에게 온갖 욕을 다 퍼부었지. 결국 너는 차디찬 욕실 바닥으로 내 팽개처졌고. 난 너를 '어벤저스'로 착각했던 거야. 미안해.





생각해보니, 누가 너에게 손톱깎이 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너는 정말 속상할 것 같아. 심지어 너를 '스메끼리'라고 부른다지? 자존심 많이 상 할거야. 너는 멀티플한 초능력자인데 말이야. 난 네 이름이 적어도 '스위스 아미' 정도는 돼야 한다고 행각해. 그만큼 너의 역할은 다양하고 소중하다는 뜻이야.

언젠가 내가 너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었을 때, 너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어야 해. 


사실 너의 능력은 이미 세계적으로 인정 받았어. '쓰리세븐(777)'이란 너의 별칭은 진정한 기술의 결정체와 동의어가 되었거든. 너의 멀티플한 기능, 그리고 군더더기 하나 없는 매끈한 몸과 피부 덕분에 많은 이들이 너를 좋아하게 되었지. 한때 중국 사람들이 너를 데려 가려고 새벽부터 줄을 서서 기다렸다는 얘기도 있잖아. 그런 전설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몰라. 






그런데, 요즘 걱정이 하나 생겼어. 눈이 흐릿해 져서 손톱을 깎다가 살을 깎는 일들이 생겨. 피가 나면, "아, 이런 젠장~" 하지. 정말 미안해. 뻔뻔스럽지만 부탁하나 할게. 돋보기를 쓴 듯 나를 좀더 신중하게 대해 주었으면 해.


그리고 또 하나, 너에게 참 미안한 게 있어. 이사람 저 사람에게 너를 빌려준 일이야. 너는 나만 바라만 보는데, 나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너를 보낸 적도 있었어. 그럴 때마다 너는 수치심이 들었을 것 같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너의 역할을 다하고 나에게 돌아왔어. 앞으로는 오직 내 곁에만 있도록 할게.





솔직히 너 없이는 일상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아. 여행과 출장 중에 너를 집에 두고 갔던 날을 기억해? 몇 날 며칠을 톱들이 치고 올라오는 걸 방치하다가 얼마나 쪽8렸는지 몰라. 너의 빈자리를 그때 비로소 깨달았지.   


그래서 오늘 이 편지를 통해 너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 너는 나의 일상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작은 영웅이야. 참, 얼마전에 코털깎이를 입양했어. 앞으로 그에게 갈 일은 없을 거야. 이제부터 너를 더 소중히 여기고,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도록 할게. 그리고 나도 루테인이라도 먹고 너와 함께 더 안전하고 정확하게 미션을 완수할 수 있도록 심기일전 할게.


나의 소중한 깎이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담아..


PS) 과연 나의 어떤 재능이 이 사회에 쓰이고 있는걸까? 그것은 유익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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