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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수의 왕 Nov 23. 2021

돈 지오반니

지난 10월 29일은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지오반니>가 프라하에서 세계 초연을 한 날입니다.


여러 음악 관련 트위터 계정에서 이 소식을 전하는데 영국의 잡지 그라모폰은 여기에  <돈 지오반니> 추천 음반 기사의 링크까지 더해서 올려주고 있습니다. 호기심에 링크를 타고 들어가 기사를 읽다 보니 특유의 도전정신이 발동해서 <돈 지오반니> 추천 음반들을 향한 저의 도장깨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모차르트의 많은 오페라 중에서도 <돈 지오반니>는 서사구조나 음악적 짜임새의 밀도가 상당히 높은 편입니다.


한밤 중에 벌어지기 시작한 지오반니의 기행이 새벽을 지나 그날 저녁 최후의 만찬까지 이어지는 데 이 모든 사건들은 단 하루가(24시간이) 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이루어지며 이 각각의 에피소드에서 돈 지오반니는 서로 다른 3명의 전형적인 특징을 지닌 여성 캐릭터를 상태로 그가 가진 전근대적 태도와 사고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주인공 돈 지오반니는 전형적인 전근대적 사고를 갖춘 악한입니다. 돈 후안을 모델로 해서 이야기가 쓰였다고 하지만, 모든 여성을 향해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며 사랑을 쫓는 돈 후안의 전설과는 조금 결이 다르게, 돈 지오반니는 채워지지 않는 갈망을 향해 비열하고 비도덕적이며 폭력적인 전근대적 남성상을 드러냅니다. 


처음에는 돈 지오반니에게 당하고만 있던 피해자들은 점차 새로운 사회가 지향하던 모습을 자생적으로 갖추게 되는데, 귀족과 농민이라는 계급적 차이를 뛰어넘어 피해자들 사이에 수평적인 협력 관계가 형성되는 과정이 바로 그것이죠. 


 극본을 쓴 다 폰테는 이런 스토리라인을 희극이라는 장치를 통해 기존 체제의 사회적 모순을 비꼬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오히려 그제까지 그가 장기를 보이던 코미디 형식(오페라 부파)을 반대하고 좀 더 진지한 음악을 만들고 싶어 했다고 하는데요, 


이런 대본가 와 작곡가의 대립이 Drama Giocoso (유머가 들어있는 진지한 극)라는 색다른 장르의 오페라를 창작하게 만들었다고 하며, 모차르트의 위대한 예술성이 극한에 달하던 순간을 빛내주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모차르트와 다 폰테가 팀을 이뤄 제작한 <피가로의 결혼>에서도 구체제를 상징하는 백작과 새로운 시민계급 간의 대결 양상이 드러나지만, <돈 지오반니>에서 처럼 극적인 대립을 보이지는 않죠.


이런 전근대적 사고에서 근대적 사고로 넘어가는 전환기의 작품인 탓에 돈 지오반니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사함을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반성을 거부하는 일반적인 기독교적 윤리의식과도 거리가 먼 행동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정리해 보면 전형적인 전근대적인 사고를 갖추고 있지만 동시에 기독교적인 윤리의식과는 반하는 새로운 형태의 악한이 탄생하고 있는데요,




음악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더라도 아주 독특하고 재미있습니다. 


바리톤과 베이스가 각각 맡고 있는 주연과 조연의 역할도 많은 오페라들이 보여주는 음악적 구조와는 다른 모습이죠. 


이 두 역할이 바리톤과 베이스라는 음역 배정을 통해 함께 극을 이끌어 나가는 모습을 보면 전 개인적으로 돈 지오반니와 레포렐로가 하나의 인격체 안에 포함된 두 개의 자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현실(윤리적, 체제적 규범)과 이상(숨겨진 욕망) 사이에 갈등하는 인간의 태도를 두 개의 자아로 묘사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해 보면 오히려 극의 내러티브를 설명하며 끌고 가는 레포렐로가 현실에 갇힌 자아이며, 그가 꿈꾸는 욕망을 상상 속의 대리인인 돈 지오반니가 가상의 세계에서 (레포렐로의 상상 속에서) 실현해 나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동시에 과연 어떤 자아가 진정한 주인공(작중 화자)일까라는 의문이 생기는데, 실제로 노래를 부르는 분량도 돈 지오바니와 레포렐로 사이에 큰 차이가 나질 않습니다. 그리고 돈 지오반니와 상대해야 하는 3명의 여성 캐릭터 중에 돈나 엘비라는 오히려 레포렐로와 더 많은 장면을 공유하게 되고, 돈나 안나는 첫 장면 이후에는 주로 자신의 약혼자인 돈 옥타비오와 같이 등장하기에 실제 돈 지오반니가 상대하는 여자 가수는 체를리나 정도이죠. ( 이 오페라의 가장 대표곡 중에 하나인 이중창 "La cidarem la mano"를 돈 지오반니와 체를리나가 부르고 있습니다)


오페라에 등장하는 3명의 여자 캐릭터는 모두 소프라노 음역의 가수가 맡게 되는데, 캐릭터의 성격을 목소리의 특징을 통해 미묘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돈나 안나에는 드라마틱 소프라노가, 돈나 엘비라는 리리코 스핀토의 목소리질을 갖춘 소프라노가 그리고 체를리나 역은 가벼운 수브레토 소프라노가 주로 맡게 되는데, 각 목소리 질의 특징에 맞춘 다양한 아리아와 중창이 교묘하게 하모니를 이루며 완벽한 음악적 구조를 만들어 나가게 됩니다.


기타 남자가수들이 맡게 되는 역들도 음역의 차이보다는 음질의 차이를 통해 역할을 구분한 느낌이 드는데, 지옥의 문이 열리는 느낌의 목소리를 들려주어야 하는 기사장은 베이스 중에서도 낮게 깊은 음질의 가수가 맡아서 땅 속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분위기를 노래하게 되고, 체를리나의 약혼자인 마제토는 적당히 낮고 경직된 느낌을 주는 그렇기에 기사장보다는 조금 더 부드러운 베이스가 부르게 되고, 돈나 안나의 약혼자인 돈 옥타비오는 본인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펼쳐지는 상황에 약간은 휘둘리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가벼운 음질(Leggero 레쩨로)의 테너들이 부르고 있습니다.


현대의 완성도 높은 소설을 보더라도 이렇게 서로 다른 성격의 주인공들이 많이 등장해서 전체적인 구조가 완벽한 작품이 흔치 않은데, 이걸 음악적으로 균형을 잡고, 캐릭터 간의 대칭적 관계를 음의 높이나 목소리의 성격 등을 통해 완성시켜 나간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작업은 고전주의라는 형식미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음악적 양식에 기반을 두고 이루어집니다.




다양한 아리아와 중창들이 등장하는 이 오페라에서 모차르트가 드러내는 음악적 특징이 잘 담겨있는 부분을 하나만 고르라면 전 2막 2장에 나오는 6중창인 "Sola sola in buio loco  (All alone in this dark place)"를 뽑고 싶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e29O-fHN6M



집단의 감정이 하나의 사건(인물)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중창인데요, 작은 웅성거림에 이어 돌아가면서 한 명씩 각자의 감정을 분출시키는데, 이 모습에 서로 감정이입이 되어가며, 점차 하나의 집단 감정( 반 돈 지오반니 공감대 형성)이 형성되어 나가는 모습이 음악적으로 완벽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을 계기로 확실하게 돈 지오반니 대 나머지 사이의 대결 구도가 완성되며 위기를 넘어 결말로 향하게 되죠.


많은 오페라 중에서 모차르트의 작품에서 처럼 음악적인 전개를 통해 극의 내러티브가 가져야 하는 감정을 발전시켜 나가는 경우를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데 모차르트는 항상 뛰어난 중창을 통해 극의 진행과 캐릭터들 사이에 형성되는 분위기를 정확하게 매칭 시키고 있습니다 




자 그럼 우선 그라모폰이 추천하는 음반들을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Historic choice



1936년 글라인드본 페스티벌의 돈 지오반니 프로덕션을 스튜디오에서 재 녹음했다고 알려진 프리츠 부쉬 지휘의 음반인데요, 


글라인드본 페스티벌은 모차르트 오페라를 주로 연주하는 것으로 유명하죠. 실황팀이 그대로 참가해서 인지 전체적으로 생동감과 활기가 넘쳐흐릅니다. 20세기 중반의 스타일과 달리 오히려 요즘 유행하는 오리지널 편성의 연주와 훨씬 가깝게 느껴지는 해석이며, 가수들 역시 각자의 역을 충분히 소화해 내고 있는 모습입니다.


53년의 푸르트뱅글러 잘츠부르크 실황 음반 등에 비해서 음질도 월등히 뛰어나고, 진지한 주제를 희극적인 시선을 통해 풀어내고 있는 원 작품의 성격과도 훨씬 부합하는 해석을 보여줍니다.


특히 유연한 목소리를 통해 강약 조절을 능숙하게 해내는 레포렐로 역의 살바토레 바깔로니가 아주 맘에 듭니다. 존 브라운리의 돈 지오반니는 우아한 목소리로 주인공의 특정한 단면만이 부각되는 느낌이지만 호흡이나 리듬에 있어서 상당히 여유 있는 노래를 들려줍니다 



2. Modern Choice




그라모폰은 모던 초이스란 카테고리 하에 2020/21 시즌부터 메트 오페라의 음악감독을 맡은 야닉 네제 새갱이 지휘한 돈 지오반니를 꼽고 있습니다. 


이 음반은 상당히 독특합니다. 음악적 개성이 뛰어나다기보다는 상품성이 뛰어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데, 각각의 역할을 맡은 가수들과 오케스트라를 독립적으로 놓고 생각해 보면 어느 음반과도 뒤지지 않는 소리들을 들려주지만 하나의 총합으로 생각했을 때는 글쎄(?)라는 의문부호가 붙는데요, 가장 거슬리는 예가 바로 돈 옥타비오를 부르고 있는 빌라존입니다. 


여타 돈 지오반니의 음반들을 보면, 오페라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이태리 오페라 전문의 유명 테너들이기보다는 모차르트 오페라의 스페셜리스트들을 주로 기용하는데, 이 음반에서는 빌라존이 아주 감미로운 목소리로 감정적인 돈 옥타비오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될 경우 돈나 안나의 노래들과 성격이 상충하는 장면들이 많이 생기게 되죠. 그리고 마제토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더 경직되어 보이게 되고요.


이런 식으로 각각의 아리아를 따로 떼어놓고 하이라이트 음반으로 만든다면 꽤나 인기 높은 상품이 될 듯한데 음악적으로 전체적인 균형을 잡는 데는 약간 어색한 느낌이 듭니다.


지휘자의 성격대로 음악은 에너지가 넘치고 생동감 있게 진행됩니다. 극적인 반전 부분에 있어서 소리의 다이내믹 차이도 꽤 크게 들려주고요, 하지만 스튜디오가 아닌 실황에서 이런 효과를 만들기 어렵기 때문에 생동감 있는 리듬이 실제 무대의 생동감과는 거리가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3. Historically informed choice


 


 가디너의 모차르트와 헨델 그리고 바흐 연주는 항상 안전한 선택이 되어줍니다. 상당히 세련된 소리를 들려주며, 안정적인 리듬의 선택을 통해 간혹 원전악기 연주를 듣다가 놀라게 되는 독특하고 즉흥적인 튀는 리듬도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녹음 중에는 <티토왕의 자비>와 <피가로의 결혼>등이 명음반으로 많이 선택되는데 그라모폰의 이번 <돈 지오반니> 선택은 약간은 의외였습니다.


늘 그렇듯이 부드럽고 무난한 음질의 가수들을 선택하는 지휘자이기에 특별히 뛰거나 모난 부분은 없지만 반대로 그만큼 개성적인 노래를 듣기도 쉽지 않고, 이번 특집 기사를 쓴 그라모폰의 에디터 리처드 로렌스의 지적처럼 템포 역시 오페라의 내러티브가 진행되어가는 내내 일정하고 안정적인 모습만을 보이기 때문인데요,


개인적인 생각은 어쨌거나 모차르트의 기존 오페라 부파와 달리 Dark side가 들어있는 이 오페라에서는 음악의 다이내믹과 템포가 변화의 폭이 큰 내러티브의 진행에 어느 정도는 감정적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관점으로 만들어진 프레임안에 들여다 놓기에는 가디너의 연주는 전체적으로 너무 모노톤으로 들려옵니다.


4. The Top Choice



다행히도 최고의 음반에는 저와 의견이 일치합니다.

줄리니의 이 오래된 녹음은 아직도 이 작품에 대한 최상의 표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실 일반적으로 돈 지오반니는 바리톤이 그리고 레포렐로를 베이스 또는 베이스 바리톤이 맡는 경향과 달리 여기에서는  그 반대로 주인공 목소리의 톤을 설정하고 있는데, 처음에 제가 하나의 캐릭터 안에 두 개의 의식이 드러나는 느낌이라고 말했던 부분을 생각한다면 누가 선이고 누가 악 일지 누가 규범적이고 누가 욕망의 한계를 뛰어넘는 연기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휘자마다의 생각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레포렐로가 전체 드라마의 중심화자 역할을 해나간다고 해석을 하는 경우에는 줄리니의 선택이 훨씬 잘 들어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소프라노역에 존 서덜랜드와 엘리자베스 슈바르츠코프는 약간은 저와 생각의 결이 다른데, 비록 돈나 안나의 노래가 훨씬 더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담고 있더라도 캐릭터의 스타일이 극 전체에 걸쳐 훨씬 변화가 적고 안정적인 감정을 발산한다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조금은 엽기적이더라도 이 두 명의 소프라노가 서로 바뀐 롤을 불렀다면 어땠을까 (즉 그런 해석을 한 번쯤 듣고 싶은 욕심이 제 개인적으로 있다는) 하는 상상을 하곤 합니다.


이 연주가 일종의 벤치마크가 되다시피 한 탓에 현재도 돈나 엘비라 역에는 가곡 가수에 가까운 성격을 보이는 훨씬 더 성악적으로 안정적이고 정돈된 목소리의 가수들을 기용하곤 하는데, 돈나 엘비라는 시종일관 안절부절못하고 자신의 감정에 휘둘리는 모습을 보이는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는 점을 생각해 보면 안타깝긴 합니다


 



그라모폰이 선택한 음반들을 쭉 다시 들어보면서 (특히 야닉 네제 새갱은 이번 기회를 통해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습니다) <돈 지오반니>에 대한 제 생각을 돌아보게 되었는데, 그렇게 내린 제가 꼽은 최고의 연주는 유튜브에서 보게 된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실황 공연 영상입니다. 


물론 몇몇 성악가의 수준이 많이 아쉽기는 하지만( 동일한 페라라 프로덕션을 리코딩할 때는 몇몇 가수가 교체되었습니다) 아바도의 템포 설정이나 실황의 생생한 분위기 그리고 돈 지오반니와 레포렐로를 맡은 주연 가수들의 뛰어난  연기는 압권이었던 것 같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V1yNgiEvIQ



음반으로 출시된 녹음은 훨씬 이 오페라가 가진 성악적 디테일을 살리려고 하다 보니, 가수들의 노래 하나하나에 집중하고 있고 그럼으로써 전체적인 흐름이 많이 경직된 느낌입니다.




이 외에도 기회가 된다면 꼭 보고 싶은 프로덕션은 2014년 카스퍼 홀텐의 영국 로열 오페라 하우스 프로덕션입니다. 


요즘 주가가 천정을 찌르는 무대 디자이너인 Es Devlin의 그로테스크한 무대가 아마도 가장 큰 이유일 텐데요,


 


돈 지오반니의 결론을 홀로 남겨져 버림받은 자의 감정을 통해 지옥의 느낌을 재해석했다고 알려져 있는 이 멋진 무대를 실황으로 꼭 한번 보고 싶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T9wfcBKpJw


무대 위로 뿌려지는 환상적인 이미지가 시선을 확 끌어당기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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