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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수의 왕 Feb 04. 2022

<파우스트 박사> 토마스 만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에 관한 단상들을 차례로 적어보려고 합니다.


좋아하는 책을 다시 읽었던 경우를 제외하고는 최근 몇 년 동안 이처럼 한 책에 푹 빠져 있었던 적이 없었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아주 재미있게 읽었는데, 제가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들 그리고 책을 읽으며 떠오른 연상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파우스트 박사>에 대한 일반적인 소개글을 보면 무척 어려운 토마스 만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작품이란 식으로 정의를 내려버리는 바람에 읽고 싶은데 차마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분들도 많으실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어렵다고 말하는 가장 큰 이유, 즉 읽기를 어렵게 만드는 장애물로 음악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서 첫 번째 편인 이번 글에서는 <파우스트 박사>에 들어있는 음악에 관한 제 단상을 적어보겠습니다


토마스 만이 고전 음악을 (특히 바그너를) 아주 좋아한 작가이고, 어린 시절에 바이올린을 배운 경험까지 있다 보니, 이 <파우스트 박사>가 아니더라도 그의 작품이나 에세이에서 고전음악이 소재로 등장하는 글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그가 젊은 시절을 보낸 뮌헨 역시 음악 환경에 관해서는 유럽에서도 아주 대표적인 도시 중 하나이니 그런 문화적 배경이 그에게 음악과 친해질 수 있는 많은 기회를 부여했을 것이고, 독일을 떠나 망명을 시작한 이후에도 유럽 출신의 많은 작곡가와 지휘자 그리고 음악이론가 (이번 소설에는 특히나 아르노가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죠) 들과 교류를 하며 더 깊은 애정과 이해를 갖게 되면서 <파우스트 박사>의 본문에는 음악 이론서에나 등장할 법한 깊이 있는 작곡가와 작품에 대한 해설 등이 등장합니다.




어떠한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이 <파우스트 박사>에서 우리는 성장 소설의 요소들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당연히 주인공의 일생을 담은 이야기니 그렇게 될 텐데, 천재 음악가의 모습을 그려내기 위해 각 시간대별 성장기에 음악이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세세하기 묘사할 필요가 있었을 터이고, 그런 이유로 독일을 대표하는 작곡가들의 음악 세계에 대한 묘사들이 상세하게 나옵니다. 특정 곡들에 대한 해석 역시 소설의 많은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데, 하지만 이런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 등장하는 음악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작가 스스로 소설 속에 이런 대목을 삽입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시도하는 언어와 음악의 결합을 멋진 이론으로 뒷받침할 생각이었다. 음악과 언어는 원래 한 묶음이고, 근본적으로는 하나이며, 언어는 음악이고 음악은 언어라는 것, 언어와 음악이 분리된 상태에서는 늘 서로 의존하고 서로를 모방하며, 서로의 수단이 되고 양자는 서로의 실체적 요소가 된다는 것을 완강히 주장했다. 음악이 어떻게 처음에는 언어이며, 언어로 미리 생각되고 구상될 수 있는가를 그는 다음 사실을 통해 나에게 보여 주겠다고 했다. 즉, 베토벤이 언어로 작곡하고 있는 것을 사람들이 목격했다는 것이다. “그가 수첩에다 무엇을 적고 있지?” 하고 어떤 사람이 물었다. “작곡을 하고 있는 중이지.” 하고 다른 사람이 대답했다. “그런데 그가 적고 있는 것은 음표가 아니라 단어라네.” 사실 베토벤의 방식은 그랬다. <파우스트 박사 1 : 318쪽>


소설 속의 문학적인 묘사, 즉 언어(단어)를 통해 자신이 만들어 내고자 하는 캐릭터와 작품의 서사에 포함될 음악적 특성을 전달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요즘 세대의 읽기 방법들이 예전과는 좀 다르게, 먼저 읽고 자신의 생각과 감상을 정리한 후 타인의 생각과 감상을 알아나가며 이해의 폭을 넓히기보다는 우선 참고서적이나 글을 읽고 제시된 해설에 따라서 내 생각을 맞춰가며 읽는 경우가 많이 보이는데, 이런 글 읽기 방법들이 아마도 <파우스트 박사>와 음악에 관한 이해할 수 없는 장벽을 스스로 만들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음악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소설의 이해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다는 또 다른 예로 쇤베르크라는 작곡가와 그가 주창한 12음 기법을 꼽을 수 있습니다. 


    주인공 아드리안이 갖고 있는 음악 미학에 대한 중요한 사상을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에서 가져오다 보니, 쇤베르크라는 이름은 이 소설을 읽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선결 요소라고 여겨지기도 하는데요, 주인공의 대사를 통해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을 언급했지만, 그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쇤베르크가 대로했고 그래서 개정판에서는 토마스 만이 그에 관해서 자신이 소설 22장에 언급한 음악 이론은 쇤베르크가 창시한 아이디어란 내용을 부록에 첨가하기도 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토마스 만은 이 12음 기법이 가지고 있는 이론적 특징을 마방진이라는 아이디어와 접목시켜서, 알프레드 뒤러의 목판화가 가지고 있는 중세와 연금술이라는 요소까지를 포함하는 소설 속 여러 이야기의 한 축을 만들어 내고 있는데, 이런 내용을 가지고 '파우스트 박사>와 음악에 관해 의견을 밝힌 많은 글들이 쇤베르크를 높이 세워진 제단 위에 신의 형상으로 만들어 가고 있지만, 제 생각은 쇤베르크와 그의 음악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 것과 이 소설을 읽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토마스 만이 직접 쓴 <Die Entstehung Des Doktor Faustus - The Genesis of Doctor Faustus>에서 작가는 최초에 쇤베르크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던 것은 그가 추구하는 진정한 음악 이론과 자신이 소설 속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어 묘사한 방향과는 많은 차이가 있기에, 오히려 그의 이름에 누가 될까 봐 언급하지 않았다는 고백이 나오는데, 꼭 이런 작가의 생각을 모르더라도 소설에 등장하는 음악의 내용에 관한 묘사는 주인공이 갖추고 있는 성격과 그 성격이 주인공과 함께 성장하며 그를 둘러싼 주변 상황의 변화에 따른 사고의 발전 방향을 보여주기 위한 문학적인 묘사이지 쇤베르크의 작품을 듣고 안 듣고 또는 그의 음악 이론을 알고 모르고 와는 전혀 상관없는 글들이기 때문이지요.


바그너의 작품에 관한 묘사들이나 바흐나 베토벤의 작품에 관한 묘사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작가가 그렇게나 심혈을 기울여 아르노 등의 협조를 통해 세밀하고 정확한 음악 비평을 쓰게 된 이유는 천재 작곡가의 일생을 그린 소설에 음악적 내용이 너무 수준 낮게 묘사되어 소설의 문학적 완성도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지 글을 읽는 독자들이 당시 최고의 음악 비평가이자 철학자였던 아르노만큼 음악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아닙니다.


아, 물론 음악에 관한 애정과 감상의 경험이 많다면 소설의 핵심에 가까이 가기가 훨씬 더 수월한 것은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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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예가 적절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와인에 관한 유명한 만화였던 <신의 물방울>을 읽은 경험이 있는 독자라면, 주인공 시즈쿠가 얼마나 와인과 관련된 정보에 무지한지, 동시에 그와 함께 만화 속에서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가는 수습 소믈리에 미야비가 얼마나 와인의 외적인 정보에 능통하고 있는지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와인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의미와 즐거움을 발견하는 데 있어서 미야비의 정보는 크게 의미가 없게 그려지는데요,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파우스트 박사>를 읽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음악사에 등장하는 명 작곡가와 그들의 작곡이론에 대한 '넓고 얇은 지식'이 아니라 진정으로 음악을 사랑하고 즐겨 듣는 감성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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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내용 중에 등장하는 음악을 미리 듣고 어느 정도 감상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대목은 크게 보면 2군데 정도 등장합니다. 소설 서사를 진행하는 핵심 부분은 아니지만 이 대목이 그려내는 감성이 느껴진다면 작품 전체에 흐르는 느낌을 이해하기가 훨씬 쉬울테니까인데요


첫 등장은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중에 이졸데가 부르는 노래이며 그리고 또 한 부분은 생상스의 오페라 <삼손과 델릴라>에 나오는 데릴라의 주요 아리아입니다. 


첫 번째 부분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주인공 아드리안과 작중 화자인 주인공의 절친 차이트블룸은 뮌헨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문화 살롱에 초대를 받고 참석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 외에도 다양한 문화계 인사들이 문화 살롱에 참석하는데 그중에는 당시 인기가 높았던 바그너의 오페라를 부르던 가수들도 있죠. 어느 날 이졸데 역을 주로 맡던 유명 소프라노가 모임에 나와 <트리스탄과 이졸데> 중에 나오는 한 부분을 부르게 되는데, 작중 화자인 차이트블룸은 그녀가 부르는 노래를 듣다가 너무도 감정적으로 흥분하고 격해져서 자신도 모르게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싶다는 욕구에 휩싸이게 됩니다.


차이트블룸은 극 중에서 고전을 가르치는 인문학 교수로 등장하며 매우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전형적인 독일의 지식인을 대표하는 성격으로 그려지는데 바로 이런 게르만적 성격이 어느 지점에서 선동적이고 파괴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그런 음악 앞에 감정적으로 무릎을 꿇고 감화되는 듯한 모습을 통해 독일인들이 스스로 자만했던 독일 민족과 독일 정신이 갖는 합리성과 논리성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소설의 이런 대목에서 만약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화자가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제대로 경험해 본 적이 있었다면( 정말로 그 상황에서 여가수에게 무릎을 꿇고 싶을 정도로 감동을 받은 경험이 있다면) 작가의 의도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동감할 수 있을 테고, 자연스럽게 작가의 의도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제가 읽은 민음사판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 적절한 주석도 달리지 않고 심지어 번역에도 무성의함을 보이고 있는데, 


"그렇지만 고백하자면 나는 그 당시 오를란다의 목소리처럼 여장부다운 목소리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거부하기 어려웠다. 풍만한 체격과 힘찬 목소리, 극적인 발성의 완숙한 기교에서 우리는 아주 정열적인 영혼을 지닌 왕실 여인 같다는 환상을 떠올리곤 했던 것이다. 그녀는 예컨대 '그대는 민네 부인을 모르는가?'라는 이졸데의 대사 다음부터 그녀가 무아지경에 빠져서 부르는 '그 불꽃 내 생명의 빛이라 할지라도, 나는 망설임 없이 웃으며 그걸 꺼 버린다네' (이 대목에서 여가수는 한쪽 팔을 정열적으로 아래쪽으로 내리치는 동작을 통해 과장된 연기를 보여 주었다)라는 구절에 이르는 동안 하마터면 나는 우레 같은 박수갈채를 받으며 의기양양하게 미소 짓고 있는 그녀 앞으로 달려가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을 뻔했다. 더구나 이번에 그녀를 위해 피아노 반주를 맡았던 사람은 아드리안이었는데,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설 때 그 역시 미소를 지었고, 그의 시선은 거의 눈물을 흘릴 지경으로 감격한 나의 표정을 스치고 지나갔던 것이다."  (28장)


소설에 등장하는 음악에 대한 묘사 대부분이 음악이 품고 있는 정신과 철학 등에 관한 것인데 반해 이 부분에서는 음악에 진정으로 감동을 받고 있는 감정적인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역자는 오페라의 가사에 나오는 'Frau Minne'를 문자 그대로 '민네 부인'이라고 번역했는데, 사실 중세 독일 문화나 문학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은 일반 독자의 이해를 위해 '사랑의 여신' 정도로 번역을 해주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고요, (사랑을 노래하던 중세의 음유시인(기사) 민네징거를 떠올려 보시면...)


실제로 소설에서 묘사된 <트리스탄과 이졸데> 2막의 1장 끝장면이 주는 감동을 느껴본 경험이 있으시다면 왜 니체가 생의 후반부로 가면서 왜 그토록 젊은 시절 경도했던 바그너의 음악에 관해 데카당스 하다고 이야기하는지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토마스 만이 소설 속에 굳이 이런 장면을 넣게 된 감정에 공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독일어의 이해도 잘 안되고 음악의 구성도 익숙지 않은 바그너의 오페라를 좋아하게 되다는 것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Z4i0MrQdOw


영상의 10분 42초 부근부터가 바로 소설에 등장하는 부분이며, 이졸데의 독창이 진행되면서 13분 12초를 지나는 순간 소설 속 화자가 울컥하게 되는 바로 그 유명한 클라이맥스가 전개됩니다.


그리고 횃불을 끄기 위해 오페라 무대 위에서 이졸데 역의 가수들이 연기하는 과장된 몸짓까지도 묘사하고 있는데요, 오페라에서는 이렇게 불이 꺼지고 나서 밤이 시작되는 부분을 이성을 비추는 빛이 소멸하며 비이성적인 욕정이 상승하는 부분으로 이끌어 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해서는 안될 사이인 트리스탄이 등장하여 두 남녀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금지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이 토마스 만 시대의 독일 지성인에게는 친근하겠지만 현대의 우리에게는 매우 낯선 음악일 수 있는데 반해서 두 번째로 등장하는 중요한 곡은 오히려 당시의 독일 사람들에게 낯설고 현대의 우리에게는 익숙한 음악입니다.


생상의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는 국내에서 전곡 상연을 보기가 쉽지는 않은 작품이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데릴라의 아리아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는 많은 분들이 사랑하는 메조소프라노(소프라노도 많이 부릅니다) 아리아인데요, 2막에서 삼손의 비밀을 알기 위해 데릴라가 부르는 사랑의 감정이 물씬 풍겨 나는 '아름다운' 곡입니다. (소설에서 아름답다는 표현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한번 읽어 보시죠)



<파우스트 박사 2권 317~320쪽 사이>

”노래는 놀라울 만큼 온화하고 부드럽고 희열도 느껴지는 호소력을 갖고 있었다. 선율 또한 비슷했다. ~ 특히 이 선율이 두 번째 절정에 이를 때 너무도 청아한 바이올린 소리는 풍만한 노래와 감미롭게 어우러졌다가는 구슬프고 매력적으로 결미의 음을 반복했다. ~ 불링거 씨가 ‘기가 막히게 아름답군요!’ 라고 말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심미주의자들이 사용해 왔던 틀에 박힌 어조였다. 그런 어조는 ‘아름답다’라는 감상적인 판단과 기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아드리안이 웃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이만하면 진지한 사람도 이런 곡을 추천할 수 있다는 걸 아셨겠지요. 그것은 정신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오히려 전형적으로 감각적인 것이지요. 그렇지만 감각적인 것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화폐 전문가 크라니히 박사가 한마디 거들었다. ‘그렇지만 예술에서는, 이 영역에서는 사실 오로지 감각적이기만 한 것은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정신에 호소하지 않고 오로지 감각적인 흥미만 돋우는 모든 것은 저속하다라는 어느 시인의 말에 따라자면 그런 것은 저속합니다’ 

고상한 말이로군요’ 아드리안이 말을 이었다.”

"인간의 정신은 정신적인 것의 필요에 응할 뿐 아니라, 감각적 아름다움이 유발하는 동물적 본능의 우울에도 깊이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관념론자들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정신은 심지어 터무니없이 저속한 것을 숭배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필리네는 결국 보잘것없는 창녀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빌헬름 마이스터는, 작가와 별로 다르지 않은 인물인 그는 그 여자를 존중한단 말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감각적 본능으로 순진하게 저지른 죄는 저속함을 면피하게 되는 것이지요."


음악에서도 그런 원칙을 제대로 존중할 것 같지만, 그렇게 나가면 음악에서 활동할 수 있는 마당이 현저히 위축되지요. 만약 가차 없이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기준만 들이댄다면 도대체 음악에서 뭐가 남겠습니까? 그런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바흐 풍의 곡이 두어 개 정도 남겠지요. 그런 것 말고는 도대체 들을 만한 곡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주인공 아드리안은 이 노래에 관해서 "감각적 아름다움이 유발하는 동물적 본능의 우울에도 깊이 빠질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소설의 전개 과정에 중요한 복선이 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oHQXogDsA0



그리고 여러 장면이 지난 후 화자인 차이트블롬은 아드리안의 음악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죠


<파우스트 박사 2권 421쪽>

 "결국 감정이란 결코 믿을 게 못 된다는 것을 아드리안의 음악은 너무나 잘 표현하고 있다"




사실 음악의 이해가 없더라도 작품의 이해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을 드리고는 있지만, 작가가 속해있던 시간과 장소가 가지고 있는 문화적 배경과 대한민국에서 21세기 초라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배경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소설에 등장하는 몇몇 작곡가나 작품의 이름을 좀 외우고 있다고, 그렇기에 지적인 듯 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경박함을 소지한다는 것은 더더욱 그 문화적 차이를 좁히는 데 걸치적 거리기만 할 뿐일 텐데요, 작가는 책 2권 139~140쪽에서


"우리는 모든 예술을 대표하는 음악이 고고한 고립으로부터 벗어나 천박해지지 않으면서도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는 공통의 기반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음악의 문외한도 늑대 계곡 장면이나 ‘신부의 꽃다발’ 소절 혹은 바그너를 이해하듯이, 그런 쉬운 음악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와 같은 생각을 화자를 통해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음악의 문외한도 이해하는 음악은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와 바그너의 오페라들인데요,


이런 관점을 현재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아마 한국의 대부분의 독자는 토마스 만의 시대에 독일 문화 애호가들이 생각하고 있던 음악의 문외한 수준의 경험조차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작가가 이런 표현을 했던 것은 당시 뮌헨 등 독일의 주요 도시에 있던 오페라 하우스들의 가장 인기 높은 레퍼토리를 의미하는 것 같은데요, 음악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더라도 품위유지를 위해 즉 사교계의 허영과 사회적 지위 그리고 체면을 위해 베버나 바그너의 오페라를 보러 다니던 시대상을 표현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파우스트 박사>를 읽기 위해서 제가 생각하는 소설의 이해에 도움이 되는 최소한의 음악 2곡을 (작품 속에 등장하는) 소개해 드렸는데, 이미 소설을 읽은 분들의 생각이 궁금해지네요. 


그럼 다음 편에서도 계속해서 이 소설에 관한 제 단상들을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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