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도 월간으로 출간되고 있는 유명한 경제 전문지인 미국의 포브스지에서 바흐 음악의 대표곡들에 관한 음반평을 싣고 있는 기사를 우연하게 보게 되었습니다.
제목은 "The Real Top 10 Bach Recordings"인데, 내용을 보니 영국의 클래식 음반 비평지인 Gramophone에서 선정한 바흐 톱 10 리스트에 문제점을 제기하고 이 글을 쓴 기고가 개인의 선호가 들어간 새로운 톱 10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기사는 Jens F. Laurson이 작성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분의 개인적인 취향을 살펴볼 수 있겠네요 ㅎㅎ)
요는, 영국 잡지인 그라모폰에서는 너무 화이트-앵글로 연주자 편향적이다 라며 좀 더 다양한 관점으로 진정한 최고 연주를 꼽아 보겠다는 것인데요, 나름 흥미진진합니다.
톱 10 리스트에 오른 곡 중 몇 가지만 추려서 비교해 드리고 거기에 제 개인적인 편향(?)이 들어간 추가 추천도 해볼까 하는데요, 오늘은 그중에서 가장 먼저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음악사적으로 워낙 중요한 곡이면서 음악적인 완성도 또한 상당히 높아서 바흐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누구든지 내 맘 속에 명 음반 하나씩은 자리 잡고 있을 그런 곡인데요, 그럼 각 잡지사의 음반 비평가들은 어떤 선택을 하고 있을까요?
그라모폰에서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의 꼽은 음반은 캐나다 출신의 피아니스트 Angela Hewitt입니다. 영국의 신생 음반사인 하이페리언에서 녹음되었는데요, 기고가는 캐나다는 영연방이며 거기에 영국 레이블인 하이페리언이니 꼽은 것 아닌가라며 좀 심한 비난을 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 개인적으로 이 여성 피아니스트의 평균율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탓에 급하게 애플 뮤직에서 검색을 했는 데, 전곡 음반은 찾을 수 없고 컴필레이션 음반 <The Bach playlist> 속에 1~3번까지의 프렐류드와 푸가만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전반적인 스타일은 감정적으로 차분하고, 리듬이 균형 잡혀 있으며, 디테일에 신경을 많이 쓰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듣다 보니 아마도 그렇다면 크게 개성적이거나 독창적인 해석이지는 않겠구나 라고 생각하실 텐데 그렇게 생각하셔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궁금해서 다른 잡지들에 실린 이 피아니스트에 관한 이야기를 읽다 보니, BBC Music에서는 템포에 루바토(낭만주의 피아노 연주 등에서 자주 보게 되는 템포를 연주자 재량에 따라 악보와 다르게 연주하는 법)를 많이 사용한다는 등의 설명이 있었는데, 6곡 만을 들은 제 느낌은 하프시코드를 사용하는 연주처럼 현대적인 피아노를 사용하는데도 템포가 빠르다는 정도이지 템포에 변화를 많이 준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전체적으로 무리 없이 부드럽게 그리고 딱딱한 터치감이 거의 없는, 글렌 굴드가 연주한 평균율을 듣다 보면 가끔 거칠게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와 비교하면 아주 물 흐르는 듯한 피아노 소리를 들려줍니다. (그런데 쓰다 보니 물 흐르는 듯한 피아노 연주는 왠지 모차르트 소나타에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네요)
https://www.youtube.com/watch?v=o7NF6r4ywKE
이 피아니스트는 2008년 녹음에서 연주하는 악기를 슈타인웨이에서 파지올리로 변경했다고 하는데 동영상에서도 파지올리의 로고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네요, 조금 더 가볍고 얇은 소리를 들려준다고 합니다.
포브스지에서는 중국계 프랑스 피아니스트인 주 샤오메이를 선택했습니다. 역시 제가 잘 몰랐던 피아니스트인데 피아노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꽤나 공력이 높으신 분인 듯싶습니다.
평균율을 연주하는 많은 연주가들은 보편적으로 균형 잡힌 해석이라는 이름 아래 좀 경직된 소리를 들려주는 경우가 많은데, 이 주 샤오메이의 해석은 피아노와 하프시코드의 연주법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연주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프렐류드들을 연주할 때는 미묘하고 균형 잡힌 소리를 통해 시적인 감성을 들려주는데,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푸가들은 좀 더 다이내믹의 대비를 드러내고 프렐류드 연주에 비해 템포를 엄격하게 유지하고 있습니다.
4번째 C sharp 단조 프렐류드에서는 왠지 낭만주의 시대의 녹턴 같은 분위기까지 느껴지는 정도로 기존에 익숙하던 연주 스타일과는 결이 많이 달라 보입니다. 재즈 피아니스트인 키스 자렛의 연주와 비교해 보니 키스 자렛이 오히려 훨씬 규범적인 소리를 들려주는 것 같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QHL0gq0Mxw
(유튜브에서는 1번부터 4번까지 각각 올려놓은 동영상을 찾으실 수 있습니다)
포브스 덕분에 색다른 바흐 연주를 즐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평균율을 정말 사랑하는 마니아라면 에드윈 피셔, 글렌 굴드 그리고 프리드리히 굴다 같은 많이 독창적인 연주나 레온하르트나 트레버 피노크 같은 하프시코드 연주 등 개성 넘치는 음반들 중에 하나를 고르실 것 같은데, 저에게 이 곡은 무엇인가 집중이 필요한 때 저를 한 없이 차분하고 경건하게 만들어 주는 음악인 것 같습니다. 그런 관점으로는 가장 중성적이고 모나지 않은 소리를 들려주는 안드라스 쉬프의 연주가 언제나 저에겐 가장 반가운 친구(말이 없어도 서로가 이해되는)가 되어주는 듯 여겨집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gc5FZsycAw
런던에서 열리는 여름 음악제 Prom의 실황 연주인데, 스튜디오 리코딩과 거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정돈된 연주를 하는 모습이 경이롭습니다.
국내에서 예전에 인기가 높았던 리히터의 연주는 녹음 수준이나 연주 스타일이 현재 기준으로는 약간 시대에 뒤쳐진다는 생각입니다. 안 그래도 부드럽고 느린 연주인데 녹음까지도 요즘처럼 명확한 소리를 잡는 방식이 아니라, 부드럽게 잔향이 퍼지는 것을 허용하는 느낌이라 전체적으로 곡의 의도가 뭉개져 버리는 악수를 두고 있는 느낌입니다.
다양하고 개성적인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의 연주들을 처음으로 또는 다시 한번 들어보면서 무엇인가를 직접 경험하기 전에 선입견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좋지 않은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