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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수의 왕 Jan 11. 2019

베토벤도 협찬을?

베토벤, 피아노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예술가를 생각하면, 신 같은 절대적 존재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 편에는 기존의 경계를 넘는 새로운 창조를 해 내는 예술의 사례에 대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 사회가 만들어 내는 사회적 체제와 통념으로 인한 선입견 때문에 예술 또는 예술가에 대한 이해가 경계의 안쪽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열심히 전시회와 갤러리들을 들락거리다 보니, 여러 젊은 작가(미술작품을 하는)들을 만날 기회가 많이 생겼습니다. 


 그 이전에 아트페어에서 주로 만나서 인사를 했던 것 같이, 서로 약간은 무안한 상태로 '아, 네 작품이 좋군요.'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작업실이라도 한 번....' 뭐 이런 류의 전혀 교감을 나눌 수 없는 대화를 나눌 기회가 아닌, 


 "형, 한잔 더 받으세요" 

 "야, 넌 그림 그리는 놈 맞아? 뭐 이리 말술이야"와 같은 진솔한 상황에서 말이죠.


 이렇게 옷을 다 벗고 만난 작가들은 제가 생각했던 것 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본인의 창작에 대한 고민은 당연하겠지만, 저희들과 똑같은 인간으로서, 먹고사는 고민, 자식 고민, 부부 사이에 대한 고민 등등. 한 작가는 자기 그림 하나 집에다 걸러 달라며 강매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야, 형 돈 없어" 

 "제가 원하는 건 제 작품이 좀 더 많은 곳에 걸려서, 많은 사람들이 그걸 보고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이런 거예요, 돈이 안되시면 10년 할부로 하셔도 되고요, 하다 하다 안되면 다시 환불하셔도 돼요" 

근데 이 작가의 말을 듣고 보니, 갑자기 인간적으로 뭔가가 확 와 닿는 느낌이었습니다.


 도대체 예술가들은 언제부터 우리에게 거대한 산이나 신과 같은 존재가 돼버린 걸까요? 


 산업혁명 이전 시기 까지는,  예술가가 예술을 통해 삶을 유지할 방법은 왕이나 귀족의 밑에서 봉사를 하고, 그에 대한 적절한 보수 (어디까지나 주는 측에서 측정한)를 받는 방법뿐이었을 겁니다.  위대한 미술 작품 대부분이 성당이나 궁전의 벽에 그린 벽화 거나 또는 그곳에 놓인 조각들인 것과, 위대한 음악가 대부분이 궁전 악단 또는 교회 소속이었던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부르주아라는 신흥 부유층이 생겨납니다. 대량 생산을 통해 새로운 산업을 만들어 내며 공업이 발달하고, 이를 통해 등장한 시장은 더 많은 상품을 필요로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장에 필요한 신기한 상품을 생산이 아닌 신대륙과의 무역 (수탈이란 표현이 더 적합할지도 모르지만)을 통해서 공급하는 상업도 발달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런 새로운 산업을 통해 어마어마한 부를 축척한 신흥 세력들 조차도 아직은 귀족과의 간극이 존재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교양'에 대한 교육이었습니다. 많은 부르주아 집안들은 귀족과의 동등한 인격을 인정받기 위해 여태껏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예술과 문화에 대한 지식이 필수적인 것이라고 인지하기 시작했고, 자식들에 대한 음악 미술 시장에 투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 시대의 유일한 고객이었던 귀족과의 계약은 이미 계급의 차이로 인해 불합리할 수밖에 없었던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악기를 배우는 인구가 늘어나고, 이 들의 연습을 위해 필요한 악보 시장이 새로 생겨납니다. 인쇄기술은 이런 새로운 수요에 맞춰 나날이 발전을 해 나가고, 출판사들은 작곡가들에게 새로운 시장에 맞는 음악 작품을 요구합니다. 


 19세기 현대적인 피아노의 등장은 이런 불붙는 시장에 기름을 쏟아붓게 되는 전기가 됩니다. 도날드 서순의 유럽 문화사를 보면 이 당시 부르주와들은 자신들의 부에 걸맞은 예술적 소양을 자랑하기 위해서, 새로 등장한 이 악기를 집집마다 사서, 거실에 장식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런 시점을 전후해서, 피아노 소나타와 바이올린 소나타 등 1인 또는 2인이 연주할 수 있는 형태의 작품이 급격히 늘어나며, 현악 4중주 작품이 줄어듭니다. 현악 4중주는 귀족에게 고용되었던 전문 음악가가 귀족이 주관하는 파티에서 연주를 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었겠죠.


 새로운 시장 체제에서 작곡을 통해 다수의 구매자와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겨나기 시작한 겁니다. 이 당시 피아노 시장의 절대 강자는 저희가 알고 있는 슈타인웨인가 아닙니다. 슈타인웨이는 19세기 중반 독일계 미국 이민자인 슈타인웨이가 만든 후발주자에 불과하지만, 미국이라는 거대시장을 등에 엎고 오늘날의 브랜드가 되었던 겁니다. 


 그럼 최초의 시장에서 피아노 업계의 1등은 누구였을까요? 흥미롭게도 영국의 John Broadwood입니다. 18세기 초반에 설립된 이 회사는 현대식 피아노가 등장한 초기 시장에 절대 강자였습니다.


 여기에 재미있는 스토리가 남아 있습니다. 이 회사가 그 당시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피아노 시장에서 경쟁자를 따돌리게 된 이유에는 악기 자체의 우수성도 있지만, 현대 마케팅에서 사용되는 셀럽 마케팅의 성공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과연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걸쳐 유럽 음악 시장에 지대한 영향을 키친, 그래서 모든 피아노 회사가 본인들의 최신 제품을 그토록 사용해 주었으면 했던 이 유명 셀럽이 누구였을까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음악의 신으로 추앙하고 있는 바로 베토벤이었습니다. 베토벤은 이렇게 받은 피아노로 제일 먼저 <피아노 소나타 29번 -함머클라이비어>를 작곡해 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wZsDzGY1XA


 당시 피아노를 배우는 모든 학생 (최고의 부유층)은 당시 최고의 작곡가인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를 배우는 게 유행이었고, 이 학생들에게 작곡을 한 베토벤이 직접 사용하는 피아노란 것처럼 흥미를 당길 수 있는 마케팅은 없었을 겁니다. 현대적인 매스 마케팅이 불가능했던 시절, 셀럽을 이용한 타깃 마케팅 전략,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듯 시장에 있어서 수요자와 공급자의 관계가 점점 변해 가면서 (아, 그렇다고 이 당시 예술가들이 요즘 셀럽들처럼 많은 돈을 벌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돈은 대부분 악보를 만든 출판사가 가져갔겠지요. 지배세력이 귀족에서 돈 많은 출판사로 바뀐 것뿐이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시장을 지배하는 지배세력 입장에서 예술의 핵심인 작품 자체가 아닌, 예술가의 우상화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런 이유뿐 아닌,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작용해 왔을 테지만, 결국 경제의 문제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믿고 있는 예술이 우리의 곁에서 저 위의 발할라 성으로 들어가 버린 것 같은 생각에 많이 씁쓸해집니다. 결국은 망해버리고 마는 발할라의 신들처럼 예술도 그렇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함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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