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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수의 왕 Apr 18. 2019

고양이 그 우아함에 관하여

영화 고양이 여행 리포트

 브런치 무비 패스로 '고양이 여행 리포트'를 보고 왔습니다.



 우선 전체적인 영화에 대한 느낌은 실망감이 컸습니다.

 일본 영화라면 기대하는, 세밀한 묘사와 그를 통해 문제의 핵심에 접근해 나가는 방법과 달리 순간순간 감정이입이 과도한 편이라, 전체적인 균형감과 리듬감이 떨어져 보였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은 경우라면 영화가 재미있을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고 영화 자체만으로는 고양이를 아주 좋아하는 분이 아니라면 추천하고 싶지 않은 영화였습니다.


 그래서 영화 자체에 대한 깊숙한 이야기보다는 영화를 보며 떠오르는 고양이에 관한 단상들을 통해 영화를 둘러보고자 합니다.


 우선 고양이를 보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우아함입니다. 고양이만큼이나 우아함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는 여성이 있습니다. (참고로 저는 남성입니다. 오해가 없으시길!)

 고양이와 여성이 우아함을 연상시키는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에 하나로 리듬이 있습니다.

몸과 감정을 움직이는 방법이 무척이나 리드미컬 하고, 이런 리듬을 통해 형성되는 이미지가 우아함으로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고양이의 동작에 대한 리듬을 잘 보여주는 예로 T.S 엘리엇의 '프루프록의 연가' 15~22행이 있습니다.



The yellow fog that rubs its back upon the window-panes,
The yellow smoke that rubs its muzzle on the window-panes
Licked its tongue into the corners of the evening,
Lingered upon the pools that stand in drains,
Let fall upon its back the soot that falls from chimneys,
Slipped by the terrace, made a sudden leap,
And seeing that it was a soft October night,
Curled once about the house, and fell asleep.

 

 여기서는 시에 대한 해석을 하려는 건 아니고 단지 이 위대한 시인이 시에 리듬을 더하기 위해 묘사하는 방법이, 안개의 이미지에 리듬감 있는 고양이의 행동을 병치시키는 것을 통해 고양이의 행동 패턴에서 보이는 리듬이 우아한 시의 리듬으로 바뀌어 있는 것을 보여드리고자 함입니다.


 등을 창에 비비고, 구석구석을 핥고, 껑충 뛰고, 빙빙 돌고 있는 고양이가 떠오르면, 안개에 관한 시어를 읽고 있는 우리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우아한 리듬감이 생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엇은 유명한 뮤지컬 캣츠의 대본에 해당하는 Old Possum's Book of Practical Cats이라는 고양이가 주인공인 모음 시도 쓰고 있습니다. 

 이 뮤지컬을 보신 분이라면 고양이의 동작에 대한 시와 음악적 표현, 즉 리듬에 대해 좀 더 이해가 되시리라 생각됩니다.


 리듬감이 나타내는 여성의 매력에 대한 재미있는 예는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에 나오는 만투아 공작의 아리아 'La Donna e mobile'입니다. 우리말로는 여자의 마음은 이라고 하지만 직역을 하면 여자는 가볍고 잘 움직인다입니다. 물론 노래를 부르는 남자는 여자의 변덕을 비유해서 부르고 있지만 바로 이런 리드믹컬 한 점이 바로 남자를 끌어당기는 매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볍고 경쾌한 리듬의 테너 아리아인 이 곡은 우리에게는 '하이마트로 가요'라는 광고음악으로 더 친숙한데요, 남자를 끌었다가 놓았다가 하는 여성의 우아하고 리드믹컬 한 동작을 연상케 하는 재미있는 아리아입니다.


 다시 영화로 돌아오면 이런 고양이의 동작에서 느낄 수 있는 음악적인 아름다움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유채꽃이 만발한 들판에서 고양이는 잠시 주인의 눈에서 벗어났다가 되돌아오는데요, 그 들판에서 고양이의 리듬을 빼앗을 수 있는 많은 소재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고양이와 주인은 그저 서사적으로 너무도 아름답다는 말만 되풀이해내고 있습니다.


 플로베르가 마담 보바르의 목덜미를 따라 춤추고 있는 햇살을 묘사하고, 그 햇살이 이어져서 목재 식탁의 끝을 날카롭게 찌르고 있던 장면을 생각해 보면, 유채꽃을 밝게 비추던 햇살이 꽃의 움직임에 따라, 깃털만큼 가벼운 하지만 아주 우아한 궁금함으로 고양이의 시선을 잡아끌고 이 호기심 많은 동물이 'La donna' 만큼이나 Mobile 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런 가볍고 변덕스러운 하지만 그래서 더욱 그 리듬이 우아하게 느껴지는 이 동물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에게 돌아와서 함께 바라보는 유채꽃의 아름다움을 (왜냐하면 그와 함께 보고 있으니까요) 이야기한다면, 바로 제가 기대했던 일본식 영화였을 껏 같다는 아쉬움과 함께요.


 이렇게 보니, 아쉬움만 있었나 싶은데, 아주 마음에 드는 부분도 한 군데 있었습니다.

칸트와 하이데거라는 거인들 덕분에 우리는 감정은 선험적이라고 무턱대고 말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지적하는 감정은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희로애락의 차원은 아닙니다. 


즉, 희로애락이라는 감정은 제 생각은 어느 정도는 선험적이지 않다는 것이고, 그런 부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주인공이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장례식장에 순진한(무지한) 표정으로 묵묵히 제단을 보고 있는 장면에서 친구는 주인공에게, 주인공이 엄마를 위한 여행 선물로 찾고 있었던 기름종이를 건네줍니다. 이게 아마도 아빠가 엄마에게 선물하라고 얘기해 준 바로 그것일 거라며.  


 그 순간까지 슬픔을 느끼지 못하던 주인공은 (여기서 슬픔이란 김춘수의 꽃에서 처럼 우리가 그 이름을 불러서 존재에 의미가 생기는 관점에서 슬픔입니다) 드디어 북받쳐 오는 슬픔에 울음을 터뜨리게 됩니다. 당연히 무언가 불편함이 있고, 허전함이 있었지만 그것이 슬픔이었고, 그래서 드디어 내가 느끼는 알지 못하는 감정을 이해하고 이제는 울어도 되는 순간이 오는 그런 슬픔에서의, 슬픔이란 단어는 선험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영화의 그 부분에서 그런 의미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주 오래된 박철수 감독의 '학생부군신위'라는 영화에서는 이것과 아주 반대되는 모습을 그린 장면들이 있는데요, 부친의 상을 치르면서, 슬픔에 가득 찬 표정으로 절규하던 자식들이 돌아서서 보여주는 모습들에서 풍자되고 있는 슬픔이라고 표현되는 모습들은 사회적 관습과 학습을 통해 만들어지는 기호임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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