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 베이컨, 쇼스타코비치
어느 날 퇴근길에 잠시 들린 교보문고에서 새로 출간된 인문학 관련 책을 광고하는 이런 문구를 보았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안다고 말하기 어렵다 - 왜냐하면 내가 누구인지 안다고 말하는 순간에도
내가 알지 못하는 내 안의 타자, 내 안의 괴물이 나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작가와 화가 그리고 음악가들의 능력은 바로 이렇게 우리가 정확히 집어내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 각자의 방법으로 자신이 이해하는 바를 좀 더 확실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묘사를 해주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 일반인들이 일반화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 '타자' '내 안의 괴물'이라고 얼버무리고 마는 것에 대해 밀란 쿤데라는 그의 소설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 평범하고 온순한 남자 주인공이 아무 관계나 감정도 없던 여자 주인공을 향해 생겨나는 폭력성을 통해 내 안의 괴물을 좀 더 상세히 묘사해 주고 있으며, 그 글을 쓰고서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우연히 보게 된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에서 자신이 묘사하려고 했던 인간 내면의 모습을 그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많은 미술 평론가들이 말하고 있는 프란시스 베이컨이 아닌 그만의 프란시스 베이컨을 찾아낸 것이죠. 화가도 밀란 쿤데라에게, 자신의 작품에 대한 비평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해석이라는 전문을 보냈다고 합니다.
밀란 쿤데라가 우리가 모르는 우리 내면의 폭력적 본능을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에서 찾아낸 것이라면, 전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에서 외로움과 지독한 고독이 느껴집니다.
이런 모습을 느꼈다고 믿어지는 또 다른 사람으로 영화 에일리언의 감독 리들리 스콧이 있습니다.
에일리언의 이미지는 스위스 아티스트인 H.R.Geiger의 작품에서 나왔다고 하지만, 에일리언의 동작들과 캐릭터의 특성 등은 감독이 부여했다고 생각되는데, 이런 결과에 많은 영향을 미친 작품이 바로 프란시스 베이컨의
1944년 작 'Three Studies for Figures at the Base of a Crucifixion'입니다.
(TATE 미술관 소장)
이 삼단 제단화는 베이컨이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작품입니다.
서양의 양대 사상적 축을 이루는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에 얽힌 기호들이 서로 결합되어 인간 본성에 대한 작가의 이해가 이미지로 표출되기 시작한 최초의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각 그림에 등장하는 형상은 복수의 여신인 에우메니데스의 전설에서 모티브를 가져오게 되며, 이 복수의 여신에 얽힌 전설은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3부작 오레스테이아를 통해 이야기가 전해지는데요, 군대의 귀환을 위해 딸 이피게니아를 희생시키는 아가멤논과 그런 남편의 행동에 분노가 생겨나서 그를 죽인 그의 부인 클라이템네스트라, 그리고 다시 죽임을 당하는 그녀와 그녀를 죽인 오레스테스, 이렇게 복수라는 이름하에 끝나지 않고 순환되는 운명은 그리스적인 사고 하에서 재판을 받는 오레스테스를 그려내며, 법에 의해 악의 순환을 끊는다는 이성과 합리성을 바탕으로 한 헤브라이즘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에 반해 기독교적 사고는 이런 인간의 폭력적이고 모순적인 모습을 원죄로 정의하고 신의 아들이라는 존재를 등장시켜 그가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며 해결된다는 헤브라이즘적 가치를 보여줍니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 보면, 그리스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 복수의 여신들이 십자가형을 통해서 인간의 고통과 슬픔 분노 등을 겪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 그림 모두에서 대상물들은 과장된 입과 귀등을 보여주지만 눈은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이를 통해 처음 베이컨의 그림을 접하면서 들게 되는 그림 속 대상물에 대한 두려움은 점차 대상물들이 느끼는 고통과 분노에 대한 이해로 바뀌어 나가게 되는데요, 공포 영화를 보며, 공포스러운 형상을 하고 있는 주인공들에게 두려움을 느끼다가 그 두려움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은 바로 그 주인공들이 스크린을 정면으로 주시하면서 우리와 눈이 마주치는 그 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뭉크의 절규에서도 우리는 주인공의 소름 끼치는 날카로운 비명을 상상하게 되며, 마침내 그 주인공의 눈을 들여다보게 되면서 주인공이 느끼는 두려움이 완전하게 우리에게 전이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요, 베이컨의 그림에서는 그런 공포스러운 눈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공포를 주는 주체가 아닌 공포를 느끼는 주체로, 대부분 외부의 난폭함에 폭행당한 피해자의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피부가 벗겨지고, 온 몸이 난도질 당한채 빨간 불빛아래 매달려 있는 고기 덩어리는 바로 이런 느낌의 정점에 달한 대상물이 아닐까요?
제가 느끼는 이런 감정은 베이컨을 좋아했던 감독 리들리 스캇이 연출한 에일리언에서도 느낄 수 있었는데요, 가장 공포스러운 대상인 에일리언은 결국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을 창조한 창조자에 의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하고 흉포한 종족으로 탄생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런 그들 역시 스스로의 생존이 무척이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으며, 자신들이 만나게 되는 모든 다른 종족들은 이 에일리언을 적으로, 또는 무기로 사용하기 위해 이들을 공격하고 격리하고 감시해 왔습니다.
영화 에일리언 커버넌트의 스틸컷입니다.
에일리언 커버넌트에서는 그 모든 것의 출발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제작된 영화인데요,
사실 영화에서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이 보이는 위의 스틸컷 장면은 안 나오는 것으로 기억합니다.
작지만 자세히 보시면 좌측편 벽에 베이컨의 바로 그 3부작이 걸려있는걸 볼 수 있습니다.
위의 세팅은 영화의 첫 장면의 배경이며, 이 장면에서 주인공들은 '창조'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실제 영화에서 보여지는 모습은 다음 장면뿐입니다.
인조인간을 향해 내가 너의 창조자라고 말하는 대사에서 시작해서 생명의 창조, 예술 작품의 창조 등에 대한
짤막한 하지만 많은 상징이 내포되어 있는 대사들을 이야기하며, 관객들에게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와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를 보여주고 들려주고 있습니다.
신이 창조한 가장 위대한 창작물인 인간이 신의 또 다른 위대함을 보여주는 거대한 자연 앞에서 자신이 만들어낸 피조물에게 인간의 오만함과 허영을 보여주는 장면에 숨겨져 있었던 베이컨의 3부작을 통해 감독이 이해하고 있는 베이컨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위대함이라고 스스로 일컷고 있는 오만함과 허영. 그리고 이런 것들에 가려져서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인간 삶의 본질 그것은 바로 생존을 위해 인간이 겪어야 하는 수많은 삶의 고통이었습니다.
이렇게 베이컨의 작품에 대한 해석을 보여주는 글과 영화를 떠올리다 보니, 베이컨이 파고들었던 인간이 겪는 다양한 고뇌에 대한 감정들의 스펙트럼은 음악이란 형식을 통해 잘 묘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이런 생각을 실제 작품으로 시도한 음악가가 있었습니다.
네덜란드 식민지 자바에서 태어난 네덜란드계 영국인인 Gerard Schurmann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mLu24N8CL4&list=RDImLu24N8CL4&start_radio=1&t=5
(작곡자 자신이 직접 지휘를 한 Chandos음반사에서 발매된 음반의 일부입니다)
음악의 스타일은 영화음악 작곡을 많이 해온 작곡자의 경력 때문인지, 다양한 분위기를 묘사하는데 능하다는 느낌이 많이 들고, 관현악 작법등을 통해 느껴지는 작곡 스타일은 쇼스타코비치를 연상케 합니다.
특히 타악기가 사용되는 부분에서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들에 사용된 다양한 타악기의 리듬과 소리들이 떠오릅니다.
이런 타악기 소리들이 만들어 내는 효과는 상당히 독특하며, 곡을 해석하는 방법에 따라 그 영향이 상당히 극적으로 변모합니다.
그 좋은 예로, 과거에는 쇼스타코비치는 소비에트 정부에 협조적이며, 그래서 그가 그려내는 음악들은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과업의 성공적인 쟁취에 관한 것이라고 많이들 해석해 왔습니다.
그렇다 보니 1990년대 이전까지 이루어진 대부분의 연주와 녹음에서는 타악기들이 상당히 강하고 리드미컬하며 그래서 강력한 동기를 부여받은 성공을 향한 행진이라는 느낌이 강했던 반면, 그의 아들이 쓴 글을 통해 실제 쇼스타코비치가 가졌던 고민에 대한 비밀이 밝혀진 이후부터는, 많은 지휘자들은 그의 교향곡에 등장하는 타악기들을 본성을 잃어버리고 체제에 굴복당한 기계적인 그래서 깊은 슬픔이 내재되어 있는 인간성에 대한 표현이라고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대비되는 느낌을 느껴보고 싶으시다면 므라빈스키 지휘로 레닌그라드 필이 연주한 쇼스타코비치와
하이팅크가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와 연주한 쇼스타코비치를 비교해서 들어보시기를 추천해 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9fCmbe55Ykc
교향곡 5번 므라빈스키 지휘
https://www.youtube.com/watch?v=YS4dcZ90fN0&t=2624s
교향곡 5번 하이팅크 지휘
결국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에서도 프란시스 베이컨이 평생에 걸쳐 고민해온 인간의 본질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을 살펴보실 수 있습니다.
인간 프란시스 베이컨은 동성애자로서 동성애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던 시절, 그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서부터 인간 감정의 모순된 부분과 그것을 통해 소외받는 고독을 체험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 일화에 따르면 그의 부친은 그가 동성애자임을 극도로 싫어했고, 채찍질 같은 체벌을 내리곤 했다는데, 그것을 통해 베이컨은 오히려 그의 내부에 성도착적인 본능이 생기고 있음을 느꼈다고 합니다. 이런 일련의 경험들이 그가 인간 본성에 본질 중 하나로 폭력성 등을 표현하고 있는 주된 이유가 된 것이 아닐까 라는 분석들도 많이 있습니다.
위에서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대상의 입이 강조되었다는 이야기를 해드렸었는데요,
그의 많은 작품에서 우리는 과장되게 표현되고 있는 입을 볼 수 있습니다.
입은 소리를 내고 말을 하는 기관입니다. 보고 듣는 것은 주체와 대상 간에 관계에 있어서 주체가 능동적으로 행동하게 되는 행위이지만 말을 하는 것은 대상의 능동적인 참여가 결여된다면 의미 없는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는 '나는 공포보다는 외침을 그리고 싶었다'라고 얘기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 진정한 공포는 나의 외침을 아무도 듣지 않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화가가 그리고 있는 이미지에서 나오는 소리를 대상이자 관찰자인 우리가 귀를 기울여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렇게 소외되고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그의 그림에서 표현되는 것보다 오히려 더 큰 공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니체'의 전기에서 츠바이크는 독일의 역사에서 니체만큼 모든 이에게 철저하게 소외되었던 사람은 없었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 '소외'라는 말처럼 공포스러운 단어가 또 있을까요?
매일의 삶에서 많은 이들은 '인싸'를 외치며 자기 존재의 정체성과 상관없는 많은 행동을 의미 없이 행하고 있으며, 이런 현실들이 동시에 우리들에게 공포스럽게 다가옵니다.
모두가 한 방향을 보며 하나의 사고에 집착하던 전체주의가 몰고 온 전쟁이라는 공포가 바로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모두가 서로서로에게 귀를 닫고, 그러다 보니 모두는 입을 더 크게 벌려 더 큰 소음을 만들어 내고 그러다가 결국 우리는 아무 의미 없는 소리에 혼돈을 거듭하며 우리를 공포로 몰아넣는 힘에 굴복하고 있었음을 많은 역사가 보여주고 있고, 이런 잔인한 시대를 살아야 했던 프란시스 베이컨은 공포라는 존재가 얼마나 다양한 얼굴로 변장할 수 있음을 몸소 실감하고 그것을 이미지로 그려내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라와 민족의 정체성에 문제가 있었던 밀란 쿤데라, 인간성이 무시되고 있는 체제하에서 인간의 감정에 호소를 했어야 했던 쇼스타코비치와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보편타당한 인간이라는 존재가 경험하고 느끼는 공포와 소외감이 분노라는 가면을 통해 보일 수 있음을 또 한번 느끼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