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를 처음 쏘아 올린 이후 시작된 <우주시대>는 미국과 소련 사이의 이념 경쟁과 맞물려 양 강대국이 자신들의 체제 우위를 보여주기 위해 벌였던 거대한 경연장이었습니다.
그리고 1961년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존 F 케네디는 이 경쟁에서 확실한 승기를 잡기 위해 60년대 말까지 달 표면에 사람을 착륙시키고, 다시 무사히 지구로 귀환시키는 프로젝트를 국가의 최우선 과제 중 하나로 삼겠다는 중대 발표를 합니다.
2차 대전과 연이어 벌어지는 한국전과 베트남전은 미국의 경제발전에 큰 원동력이 되었으며, 이런 경제력을 통해 전 세계 최강국으로 등장한 미국은 이 어마어마한 규모의 프로젝트가 성공하였음을 1969년 7월 인류 최초로 암스트롱 선장의 발이 달 표면에 닿는 장면을 전 세계에 송출함으로써 증명했습니다.
현대 물리학과 공업 기술의 발달에 바탕을 두고 시작된 우주시대는 그때까지 인류가 발을 딛고 있었던 지구에 집중되었던 우리의 시선이 하늘 높은 곳을 지향하게 함으로써, 인간이 가진 무한한 호기심을 자극해 정치 경제 문화 예술 등 사회 전반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렇게 우주시대가 가장 치열한 경쟁을 향해 치닫고 있던 60년대 말, 그 경쟁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인 미국 뉴욕에, "물상을 정확히 볼 줄 아는 눈을 가졌다"라고 스스로를 표현하고 있던 한국의 한 예술가가 자리를 잡기 시작합니다.
바로 지난 2019년 11월 홍콩 크리스티에서 한국 작가 최초로 100억 원이 넘는 작품 가치를 인정받은 김환기 선생입니다.
<우주-Universe 5-IV-71 #200>
<우주>라는 제목이 붙은 이번 작품은 유일하게 두폭화 이며 선생의 작품 중 가장 크다고 합니다. 위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주로 세로로 전시되었지만, 소용돌이 부분이 서로 맞닿은 형태로 가로로 전시되어도 된다고 합니다.
작품의 소장자는 집 거실에 사진에서 보이는 것 같이 가로형태로 설치하고 있었습니다.
[사진 출처 환기재단·환기미술관]
과연 우주란 무엇일까요? 또는 작가에게는 그것이 무슨 의미였을까요?
그는 "미술에 노래가 담겨야 한다" 고 했으며, 또 "본질에 다가갈수록 깊고 넓게 보인다"고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미술은 철학도 미학도 아니다. 하늘, 바다, 산, 바위처럼 있는 것이다. 꽃의 개념이 생기기 전, 꽃 이란 이름이 있기 전을 생각해 본다. 막연한 추상일 뿐이다"“내가 그리는 선, 하늘 끝에 더 갔을까. 내가 그리는 점,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 눈을 감으면 환히 보이는 무지개보다 더 환해지는 우리 강산”이라는 말들을 남겼는데, 그가 남긴 말과 그가 남긴 그림을 통해 과연 김환기의 '우주'가 무엇인지 느껴 보려고 합니다.
1. 끝과 시작을 통한 관계의 형성
이 그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두 개의 소용돌이였습니다.
서로 쌍을 이루어, 태극의 음과 양처럼, 또는 한 그림(한 공간)에서 그 너머 그림(다른 공간)으로 건너가는 통로인 것처럼 그렇게 그림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소용돌이는 유체(고체가 아닌 상태, 액체 기체 플라스마 등)에 있어서, 어떠한 요인으로 인해 한 지점의 압력이 급격히 떨어지면 그곳을 향해 밀려 들어오는 힘이 유체의 흐름을 원형으로 만들어 나가는 현상입니다. 이런 소용돌이가 우리에게 연상시키는 이미지는 현상이 가지고 있는물리적인 특징 그대로, 마치 어디론가 빠져들어가는 느낌을 강하게 줍니다. 요즘 유행하는 무선 청소기들이 바로 이 원리를 이용해 먼지를 흡입하기도 하죠.
이런 이유로 인해 주위 공간의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고 알려진 블랙홀을 이미지화할 때 소용돌이의 개념을 사용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 물리학에서 이 블랙홀이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도 하지만 그 반대로 내부에 있는 것을 밖으로 분출하기도 한다고 하는데요, 웜홀이라고 불리는 물리학적 개념은 바로 빨아들이는 블랙홀과 분출하는 화이트홀 (처음에는 블랙홀로 같이 불렸으나 쌍둥이 같이 동일한 것 같지만 현상적으로 정반대의 위치에 있는 이 블랙홀을 이후에 화이트홀이라고 부르며 이 두 소용돌이 사이에 시공간의 관문 같은 현상이 벌어진다고 하며 시간 여행 같은 아이디어가 탄생하기도 합니다)의 대칭적인 연결을 통해 발생합니다.
선생의 이단화에서 두 개의 소용돌이는 마치 블랙홀과 화이트홀처럼 한 우주 (한 캔버스의 그림)에 존재하는 수많은 별(점)들을 다른 우주(다른 캔버스의 그림)에 존재하는 또 다른 수많은 별(점)들과 연결시켜주는 관계의 고리처럼 느껴집니다.
이러한 관계의 고리는 이 세상(한국 또는 현존하는 세상)에서 맺은 인연들이 만들어 내는 이야기들과 저 세상(미국 또는 우리의 과거와 미래에 존재 또는 존재할 세상) 속의 새로운 이야기들과 어울려 우리가 가시(可視)할 수 있는 경계의 너머에 상상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고있습니다.
그렇게 하나의 이야기 끝이 관계를 통해 다시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마치 하루의 해가 지면 그날의 이야기는 모두 끝이 나지만 내일의 또 다른 해가 떠오르며 어제의 이야기에 새로운 생명이 부여되는 것 처럼 말입니다.
김환기 선생의 우주에서 시작된 상상력은, 우리의 시선을, 이렇듯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 해가 뜨고 지는 것으로 이미지화되고 있는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일출 장면으로 연결시켜 줍니다. 선생이 만들어낸 그 관계의 관문을 통해서 말입니다.
1968년 개봉된 이 영화는 우주시대를 살고 있는 당시의 세계인들에게 우주에 대한 상상을 아주 현실적인 이미지로 보여 준 작품입니다.
영화는 블랙홀을 통해 시공간 여행을 하며 (영화에서는 Warp) 인간의 역사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변해가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이 시공간을 여행하는 장면은 최근에 나온 영화 <인터스텔라>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인터스텔라에서는 다른 시간대와 다른 공간대에 존재하던 이야기가 (아버지와 딸이라는 관계의 연결, 그리고 서로 다른 시간대에 존재하는 딸의 방이란 공간의 설정 속에서) 블랙홀을 통해 연결되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다시 <우주>로 돌아가 보면 소용돌이가 의미하는 시작과 끝이 작품에서 처럼 맞닿아 있는 것은 동양적인 영원 재귀 사상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는 많은 우연을 바탕으로 새로운 이야기들이 씌어지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연이 아닌 필연 즉,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일은, 또는 해야만 하는 일은 그 하나하나가 이야기가 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 필연성들이 연결돼 관계를 맺어 나가며, 기나긴 연속성을 갖기 시작하면 그건 그때서야 대서사로 완성이 되며, 그런 것들을 우리는 역사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반대로 우연은 그 하나하나가 이야기를 완성시킵니다. 반드시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는 것은 아니겠죠.
슬픈 이야기, 무서운 이야기, 즐거운 이야기, 기쁜 이야기, 아름다운 이야기 이렇게 우리에게 쌓여 나가는 이야기는 비록 그 하나하나의 우연들(이야기들) 자체는 공기보다도 더 가벼운 존재일지 몰라도, 우리 몸에 한 겹 한 겹 무게를 더하게 되고, 그 무게들은 나 혼자만의 무게가 아니라 그 우연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맺어준 다양한 관계 속에 쌓인 무게가 됩니다. 그렇게 더해져 버린 무게들이 중력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우리를 더욱더 땅으로 잡아당긴다면 우리는 더 이상 땅 위에 두발로 서있을 수 없게 되어 버리겠죠.
하지만 이 이야기들은 항상 소멸하고 (기억에서 사라지고) 그러다가 다시 관계가 연결되면 또다시 살아나고 그러면서 우리에게 삶을 부여하고 그렇게 우리와 함께 존재해 나가고 있는 것일 테고, 그렇다면 그 이야기들에 (삶의 우연이라는) 연결되는 또는 부여된 '시간과 공간'들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고 서로의 대칭을 찾고 있는 것일까 하는 물음에 대한 질문이 김환기의 <우주>에 표현되어 있다고 느껴집니다.
끝에 다가가면 모든 이야기들이 소멸되고, 우리들의 이야기가 하나하나 담겨있는 하늘의 별들도 그렇게 사라지게 되지만 결국 마지막을 내리고 나야 모든 것이 다시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죠.
해가 서산에 지고 밤이 찾아와야 새로운 아침을 맞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주>에서 연상되는 이러한 생각들을 좀 더 현실적인 모습을 부여해서 시청각적으로 표현한 장면이 바로 위에서 이미지를 보여드린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인데요, 이 새로이 떠오르는 일출의 장면에 사용된 음악도 아주 재미있습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의 첫 번째 곡 "일출"입니다.
혼돈 (Chaos)에서 질서(Cosmos)로 변하며 세상이 만들어졌다는 많은 서양의 천지창조 전설에서 어둠을 가르고 구분 없이 뭉쳐있던 모든 것에 구분을 해주는 주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빛"이며 이 빛은 우리 지구인에게는 바로 태양이 보내주는 주요한 선물입니다.
다시 말해 매일 뜨는 태양은 우리에게 매일 혼돈으로 가라앉은 세상이 다시 태어나는 세상의 첫 발걸음 같은 것일 겁니다.
그래서 슈트라우스는 이 멋진 팡파르 장면을 재미있게도 24개의 서양음악 조성 가운데 제일 첫 시작인 C장조로 작곡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으뜸음인 C와 G를 사용해 세상의 시작을 알리는 축포를 터뜨리는 거죠.
음악의 시작은 우리 귀로 듣기 힘든 아주 저음을 오르간으로 연주를 하며 혼돈(Caos)이 등장하나 곧 금관의 멋진 울림이 위의 악보에 C, G, C로 보여드린 부분을 연주하며 질서를 부여하고 곧 총주로 바뀌며 환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학교종이 땡땡땡' 같은 동요를 작곡할 때 쓰이는 줄만 알았던 C장조로 세상의 시작을 알린다는 "슈트라우스"의 천재성이 아주 놀랍습니다.
영화와 음악에 등장하는 이런 여러 요소들을 가지고 우주라는 개념을 이해하려다 보면, 이렇듯 김환기 선생의 <우주>에서 보이는 두 개의 소용돌이가 그가 이 작품의 제목을 <우주>라고 자신 있게 붙일 수 있었던 그의 혜안과 안목의 증거임이 확실해집니다.
2. 회전이 만들어 내는 리듬감
11월을 마감하고 12월로 접어드는 계절의 변화는 날씨만큼이나 식어가는 우리 몸에게 따뜻한 근원 (엄마의 뱃속 같은)을 찾게 하고 이럴 때는 뜨거운 물에 Bath Salt를 한 움큼 집어넣고 온몸을 담그고 있는 것 만큼 좋은 것을 찾기 힘듭니다. 그렇게 몸을 데우고 나서 담긴 물을 흘려보내기 위해 막고 있던 마개를 열면 욕조에 가득 차 있던 물이 작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아래로 내려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 소용돌이가 없다면 전혀 느낄 수 없는 속도감과 리듬감이 소용돌이를 통해 전달되고 있습니다.
소용돌이는 한가운데의 속도가 외부보다 훨씬 빠르게 느껴지는 즉 하나의 움직임이지만 다양한 속도를 가지고 있는 현상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우리 인류는 소용돌이를 보며 이러한 현상을 느껴왔을 것이고 이런 감각은 진화를 통해 그리고 실제적인 경험을 통해 하나의 기호로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우주>의 점들은 중심점을 축으로 거대한 소용돌이를 이루어 나가고 있으며 이런 패턴들은 자연스럽게 이미지를 통해 소리와 리듬감이 전달되는 효과를 주고 있습니다.
작가의 작품 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에서는 점들이 직선의 모양을 갖추고 켜켜이 쌓여 있는 모습입니다. 이 작품에서 이야기들은 리듬을 가지고 운문이 되어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많은 필연들이 오랜 시간 동안 쌓아 올린 대서사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보입니다.
그래서 저의 다른 글에서 "근원에 대한 대서사"라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요, 그에 반해 이<우주>는 '기원'에 대한 신비감과 '조화와 질서'가 가져다주는 아름다움을 시적 이미지와 음악적 리듬감으로 표현하고 있는 "위대한 가곡"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면으로 생각해 보면 멋진 팡파르를 작곡했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또 다른 명곡 "네 개의 마지막 노래"라는 소프라노를 위한 관현악 반주가 붙은 가곡이 떠 오릅니다.
1곡 ‘봄’, 2곡 ‘9월’, 3곡 ‘잠들 무렵’은 헤르만 헤세의 시에 곡을 붙였고, 4곡 ‘저녁노을’은 아이헨도르프의 시에 곡을 붙여 완성한 이 곡은 <우주>가 작가의 일생을 통해 쌓아 온 내공이 표현된 말년의 완성도 높은 대작인 것처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말년 대작입니다.
위에서는 떠오르는 태양을 들어 보셨으니 이번에는 마지막 곡인 'Im Abendrot - sunset'을 한번 감상해 보시죠.
연작 가곡의 마지막 곡인 이 'Im Abendrot'는 실제 작곡 순서는 4곡중에 가장 빠른데, 작곡가 사후 런던에서 행해진 초연에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이 곡을 가장 나중에 배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초연 이후에 발간된 악보에서도 4번째 곡으로 가장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죠.
큰 스케일의 현위로 혼이 등장하며 후기낭만파 특유의 감성이 들어난 시작부분이 점차 목가적이며 우아한 노래로 발전해 나가고 있는, 그렇게 현의 유려한 흐름에 다양한 관 악기들이 번갈아 가며 호응을 하며 전개되는 작곡가가 가장 말년에 완성한 명작입니다. <엘렉트라><살로메> 등의 강력한 사운드를 들려주는 관현악이 뛰어난 오페라도 유명하지만 <장미의 기사><낙소스섬의 아리아드네>처럼 실내악적인 선율미가 강한 오페라에도 장점이 있었던 작곡가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곡의 첫 부분 (소프라노의 노래가 시작되기 전까지의) 관현악 연주가 영화 "Trip to Italy"에 사용되고 있는데, capri 섬의 주위를 요트를 타고 항해하는 장면에서 바다와 하늘 그리고 요트위의 주인공들이 음악가 아주 잘 어우러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아름다운 가곡과 달리 소용돌이에서 느껴지는 리듬감을 현실적으로 느낄 수 있는 아주 재미있는 예도 하나 보여드리면, 회전운동을 통해 느껴지는 속도와 가운데로 갈수록 점점 빨라지는 가속도 등은 우주시대(1960년대)의 또 다른 특징이었던 형형 색색의 사이키델릭 요소와 합쳐져 우리가 흔히 사이키 조명이라고 부르는 클럽이나 흥겨운 무대의 조명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단순한 음악적 리듬감뿐만 아니라 우리를 무아지경으로 몰입하게 하는 색다른 관문(?) 역할도 훌륭하게 해내고 있지 않나요?
한국이 낳은 위대한 작가 김환기 선생의 <우주>를 중심으로 저에게 떠오르는 여러 가지 시청각 이미지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세상의 기본 이치인 태어나고 자라서 다시 죽고, 그리고 그 죽음이 새로운 삶을 만들어 내는 우주의 이야기를 보여준 그의 물상을 꿰뚫어 보는 안목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되며,
그의 그림을 통해 살아 있는 우리들의 인생이란 술잔을 바라보며, 가득 차 있던 술잔들이 삶에서 만들어진 상실들로 비워져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비워진 잔들은 다시 삶이 만들어 내는 우연이라는 이야기들로 인생의 빈 잔들이 채워져 나갈 것이란 삶의 원리를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술 한잔에 이야기 한 모금 이렇게 서로를 위로하고 함께 기뻐해 주던 삶은 바로 우리의 핏속에 흐르고 있는데요, 경주의 포석정이 떠오르는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