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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수의 왕 Mar 05. 2020

감정을 담아낸 순간과 공간

쟈코모 푸치니, 에드워드 호퍼

푸치니는 미술계의 "데이비드 호크니"와 상당히 흡사한 포지션을 음악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작곡가인 것 같습니다. 호크니처럼 생전에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데 (거기다가 엄청난 부도 일구어 냅니다), 그런 인기에도 불구하고 음악사에서 그의 위치는 확실치 않습니다.  



그가 주로 활동한 시기를 살펴보면(라보엠이 초연된 해를 중심으로), 프랑스에서는 드뷔시가 <목신의 오후 전주곡> <펠리아스와 멜리장드>등을 발표하고 있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살로메><엘렉트라>등을 펴내고, 그리고 말러는 <교향곡 2번 부활> 등을 중심으로 많은 위대한 곡들을 작곡하고 있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lLoXvamfZw

드뷔시 <목신의 오후 전주곡>


https://www.youtube.com/watch?v=1I-QLaJV4jk

말러 <교향곡 2번 4,5악장>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말러는 바그너와 쇤베르크를 연결하는 중간지점에서 독일 후기 낭만주의 음악의 관현악 작법을 그 끝점까지 끌어올린 거장들이며, 드뷔시는 이런 독일 음악의 융단 폭격에 단신으로 맞서서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해낸 프랑스 음악계의 거장입니다.


그렇다면 푸치니는 과연??


음악사적으로 상당히 중요하며 관현악 기법적으로도 기념비적인 작품들이 발표되는 이런 시기에 그는 우리가 사랑하는 <라보엠>을 작곡하고 있었던 것이죠.


과연 푸치니는 지난 세월의 음악을 가지고 대중의 보편적 감성에 호소해서 단순히 인기만 얻고 있던 구닥다리 작곡가였을까요?  그에게는 시대를 앞서는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는 것일까요?


여기에 대한 설명에 앞서, 우리는 과연 푸치니를 왜, 그리고 그의 음악에 들어 있는 어떤 모습을 사랑하고 있는 것일지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인터넷에서 푸치니를 Labeling 하고 있는 표현들을 찾아보면,

"유려하고 애절한 선율 ~~" - 두산백과사전

"특유의 감성과 서정그러면서도 시종일관 강렬한 분위기" - 우리말샘(동아일보)

등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을 찾을 수 있는데, 결국 우리에게 푸치니의 음악은 "감성, 서정 그리고 선율"로 요약되는 것 같습니다.


과연 그렇다면 푸치니와 비슷한 이태리 오페라의 거장들인 벨리니, 도니제티, 베르디의 음악에는 이 "감성, 서정 그리고 선율"이 부족한 것일까요? 분명히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푸치니의 음악에서 특별히 더 "감성과 서정 그리고 선율"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아마도 많은 분들은 "음악을 들어보면 아주 감성적이니까, 그의 음악이 가지고 있는 선율의 아름다움을 몰라서 묻는 건가?" 하고 반문을 하실 수도 있는데, 이렇듯 그의 음악이 그와 비슷한 선율의 퀄리티를 가지고 있는

다른 이태리 오페라 작곡가에 비해 훨씬 더 "선율이 아름답다"라고 느껴지는 이유에 푸치니의 특별함이 있습니다.


그의 음악은 오페라가 담고 있는 내러티브를 극적인 구조에 따라  훨씬 더 감성적으로 접근하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Aria 를 중심으로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까요?


1. "E lucevan le stelle" - <Tosca>


https://www.youtube.com/watch?v=w_DrKcffJDE

 

토스카의 3막에 나오는 유명한 테너 아리아죠. "E lucevan le stelle-별은 빛나건만"입니다.

도입부에 클라리넷의 솔로가 주요 멜로디를 끌고 나오며, vocal이 "E lucevan le stelle"를 부르는데,

마치 클라리넷의 연주에 보컬이 베이스 반주를 넣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계속해서 클라리넷이 현의 도움을 통해 멜로디를 발전시켜 나가면, 보컬은 계속해서 베이스 반주같은 두 번째 소절 "Ed olezzava la terra"를 부릅니다. 이런 부분은 Aria라기보다는 훨씬 더 레치타티보 중심의 Arioso와 같은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렇게 6번째 소절인 "mi cadea fra le braccia"까지 클라리넷의 애잔한 솔로가 주가 되고 보컬은 계속해서 레치타티보를 부르는 것처럼 극의 언어적 내러티브를 표현하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O! dolci baci, o languide carezze, "부터 피아니시모로 보컬과 오케스트라가 harmonized 되기 시작합니다. 즉 같은 선율에서 점차 보컬이 전면으로 나오고 오케스트라가 동일한 선율을 반주하는 일반적인 아리아로 바뀌는 것이죠.


점차 감정이 고조되며 가장 하이라이트인 "E muoio disperato! E non ho amato mai tanto la vita"를 

고음으로 처리하는 동안 오케스트라는 같은 멜로디를 동행해 나가는 아주 충실한 반주자의 역할을 하다가,

마무리 부분인 "tanto la vita!"에서 처음 시작과 반대가 되는, 다시 말해 격정적인 감정을 외치고 있는

보컬이 위로 올라가고 오케스트라가 베이스로 내려오는 느낌으로 끝을 내고 있습니다.


극의 진행을 위해 스토리를 이야기해야 하는 부분에서 일반적인 아리와와 달리 성악가는 스토리텔링에 집중하고 멜로디는 관현악이 잠시 맡고 있다가, 이윽고 스토리와 멜로디가 하나가 되어 청중의 감정을 울려야 하는 부분에서는 테너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이용해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있습니다.




또 다른 아리아 하나를 더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2. "Signore, ascolta!" "Non piangere Liu" "Ah! Per l'ultimo volta!" ( Turandot 1막 마지막 부분)

2번째 예는  <투란도트> 1막 마지막 부분입니다. 제가 투란도트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인데요


https://www.youtube.com/watch?v=_EykQKHKP-M

 <투란도트>라는 오페라가 가지고 있는 내러티브의 당위성을 음악적으로 증명하는 부분인데요, 이 부분이 없다면 2막에서 수수께끼에서 이기고도 굳이 내 이름을 알아내면 공주 당신이 이긴 거라는 엉뚱한 제안을 하는 스토리가 나올 수 있는 근거가 사라지는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 유명한 "Nessun Dorma"가 존재하게 되는 이유가 제시되는 부분인것이죠


왕자를 흠모하고 있었던 시녀 "류"가  부르는 "Signore, ascolta"는 왕자에게 바치는 노래인데,  2막부터 등장하는 드라마틱 소프라노가 부르는 투란도트와 대비시키기 위해 서정적인 목소리를 가진 소프라노가 맡게 됩니다.  칼라프가 벌이려 하는 사랑의 모험을 중지시키고 싶어 하는 1막의 내러티브가 만들어 내는 전반적인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류뿐만 아니라 모든 북경의 사람들이 다 왕자를 만류하려는 시도가 음악적으로 차분하게 진행 됩니다.


하지만 이 노래가 끝나면, 이런 분위기를 넘어서기 위해  칼라프 왕자가 바로 이 아름답고 영웅적인 테너 아리아 "울지 마라 류"를 부르며, 자신을 설득하려는 류와 북경 사람들 그리고 객석에서 궁금증에 사로잡혀 있는 관객들을 설득하기 시작하는데 (내가 왜 투란도트의 수수께끼를 풀어야만 하는지)  이런 과정이 음악적으로 점차 긴장과 흥분이 교차되는 감정의 상승을 유도합니다. 이렇게 고조되는 감정은 중단없이 1막의 마지막 피날레의 관현악과 합창단 그리고 가수들의 총주를 향해 이어집니다.


여기서도 아리아의 주요 주제(멜로디)는 오페라 전체를 이끌고 가는 음악적 주제인데, 특정 부분의 극적 진행에서 감정이 고조되어야 하는 정확한 장면에 언어와 음악이 교차하며 감정을 고조시키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스토리와 음악이 함께 어우리지는 감정의 공명을 경험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쯤에서 좀더 이해를 돕기 위해 방향을 바꿔 영화 속에 사용되는 배경 음악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 볼까 합니다.

.

 영화에 사용되는 음악들은 영화의 내러티브의 진행에 따라 관객들에게 이입시켜햐 하는 감정을 더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바로 그 감정이 실현되는 정확한 순간에 삽입됩니다.


주인공들이 많은 고비를 넘기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에서는 아주 안도감을 주고 달콤한 느낌의 음악이 흘러 나올테고, 아무도 모르는 어두컴컴한 집의 문을 삐익하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들어가는 장면이라면 불협화음의 날카로운 현의 소리들이 쏟아져 나오겠죠.


장면들을 통해 스토리가 이어지며 머리가 영화의 서사 구조를 이해하기 시작하는 시점에, 각 장면의 스토리 라인을 강조하기 위해서 음악이 흘러나오며 우리의 귀를 지나 우리 내부의 감정을 움직여 영화에 대한 논리적인 이해와 감성적인 동감이라는 공명을 이끌어 내게 되는 것인데요, 이런 기술들을 대략 100여년의 영화 역사를 통해 점차 발전되어 현재에 이르게 되습니다.

그런데 푸치니가 만들어 낸 음악적 구조를 이런 관점에서 다시 들여다 보면, 위에서 제가 설명드린 아리아들이 다 마치 영화속 배경 음악이 가지고 있는 용도와 효용에 대한 전형을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다시 말해, 푸치니는 현대 영화에 사용되는 음악이 가져온 효과를 영화업계에서 해답을 찾은 것보다 거의 100년 가까이 앞서서 발견해 낸 진정한 "모더니스트" 였던 것입니다.


2번째 예로 보여 드렸던 투란도트 1막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류가 부르는 "Signore, ascolta"는 차분하게 왕자를 향한 그녀의 (관객의 의지가 투영되기 시작하는) 감정을 스토리로 풀어서 표현하기 시작하며, 그에 대답하는 왕자의 아리아는 류에게 그리고 왕자에 반대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는 오페라를 관람하는 청중에게 향하며 모두의 감정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미처 우리가, 우리의 감정이 어떤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우리를 클라이맥스로 끌고 들어가, 관현악 총주와 합창이 울려 퍼지며,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확 끌고 들어가 버리는 것이죠.


이렇게 오페라의 내러티브를, 다시 말해 이야기의 기승전결을, 각각의 세부를 묘사하는 음악들 하나하나가

단절되지 않고 유기적인 연결을 통해 마치 교향곡 같이 총체적인 하나의 완전한 음악으로 완성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방법을 통해 우리는 머리로는 스토리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가슴으로는 그 스토리가 만들어 내는 감정의 순간들을 푸치니가 만들어낸 선율을 통해 흡입하면서 선율이 만들어 내는 감정적 효과에 더 깊이 빠져들게 되고, 그런 after effect로 인해 푸치니는 선율이다  라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점은 마치 잘 만들어진 현대의 영화나 연극을 관람하는 이 시대의 관객들이 극 속에 이입되는 과정에서 느끼는감정이나 감상 스타일과 동일하다고 생각되며, 이런 요소들 때문에 푸치니는 19세기에서 20세기를 넘어오는 음악의 역사속에  "Modernist" 로 위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푸치니의 <라보엠>을 살펴 보겠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푸치니의 특징을 가장 확실하게 찾을 수 있는 부분은 3막입니다.


물론 1막의 "Che gelida Manina"(그대의 찬 손)에서 ""mi chiamano Mimi"(내 이름은 미미예요)를 지나

1막의 마지막인 로돌포와 미미의 2 중창  "O soave Fanciulla" (아름다운 아가씨)가 진행되는 부분도 이런 푸치니의 면모를 잘 드러내고 있지만, 워낙 아리아가 가지고 있는 파워가 세서, 청중들의 이성은 마비되고, 푸치니의 감성과 선율에 감정적으로 빨려 들어가다 보니, 그 부분이 가지고 있는 오페라의 서사 구조가 묻히는 수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 <라보엠>을 연출하는 많은 연출가들도 1막은 내러티브를 표현하기 위한 장면 설정보다는 이 아리아들이 잘 들릴 수 있는 가수들의 위치 선정에 더 신경을 

쓰게 됩니다.


<라보엠> 3막은 보통은 오페라팬의 관심에서 약간 벗어나 있습니다.

1막은 위에서 소개한 대로 유명한 아리아 2곡과 2 중창이 등장하고,

2막은 <뮤제타의 왈츠>와 왁자지껄한 카페의 분위기에 다양한 볼거리와 음악적 요소들(어린이 합창까지)이

등장하며 음악적으로 연극적으로 다양함을 선사합니다.

거기에 4막은 주인공이 죽음을 눈 앞에 둔 채 그들의 사랑을 확인하는 결말의 순간 아니겠습니까?


https://www.youtube.com/watch?v=6YhAqo5aT3A


그런데 3막은 잔잔한 가운데, 4명의 남녀가 각각 쌍을 이루어서 스토리 라인을 이어가는 모습으로만 생각되기 십상이죠.


3막의 막이 오르면, 시외에서 파리로 지나가는 문 옆으로 행인들이 지나가는 모습들이 등장합니다.

잠시 후 미미가 등장해서 마르첼로를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미와 마르첼로는 서로가 가지고 있는 사랑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는데요,

여기서 극의 결말을 향한 "위기"의 순간이 도래합니다.

           


"로돌포가 질투에 사로잡혀서 나를 의심해요 이렇게 야단인데 어떡하면 좋을까요?"

"그러면 같이 살 수 있겠어요? 헤어져야지. 근데 나는 뮤제타와 정말 행복해요"

"그렇지요, 헤어져야 하겠지요? 그러면 우리를 좀 도와주세요. 헤어지게"


그리고 로돌포가 등장합니다. 마르첼로는 미미에게 돌아가라고 하지만,

미미는 숨어서 로돌포와 마르첼로의 대화를 엿듣기 시작하는데

로돌포는 마르첼로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미미와 헤어져야 할 것 같아, 아무 남자나 보면 유혹하려고 하는 바람둥이인 것 같다고"

마르첼로는 이미 미미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으니 재차 확인합니다.

"그게 정말이야, 그러면 정말로 헤어질 거야"



현대의 관객들이 바라보는 기준으로는 크게 문제가 될 게 없습니다.

사랑은 Mystery 아니겠습니까?

사랑을 이야기하는 순간, 우리 모두는 암호 발명가가 되어 버립니다.

나의 고통을 나의 순수함을 나의 진실함을 어떻게든 빙빙 돌려 베베 꼬아서

말을 늘어놓으며, 듣는 사람들이 나의 속마음을 알아채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푸치니의 시대를 살던 사람들에게는 외부적인 위기들이 닥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해결방안들이 제시되며, 그 위기를 극복하고 절정에 도달하는 단순한 스토리들이 더 익숙했을 것입니다.


<라보엠>의 주인공들이 3막에서 주고받는 이야기들은 훨씬 현대적인 사랑싸움의 기술에 속하는 것이죠.

진정한 내 속마음을 숨긴 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나의 본심을 기만하고, 그 사람을 위해 거짓을 말해야 하는

바로 그런 순간들이 3막의 앞부분이라면, 3막의 뒷부분은 이렇게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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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헤어질 거냐는 마르첼로의 물음에 로돌포는 이렇게 입을 열기 시작합니다.

"난 미미를 사랑해, 하지만 두려워. 그녀는 죽어가고 있어, 나의 가난은

그녀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 게 없어."



암호 해독기가 작동을 하고 나니, 우리는 주인공들의 진심을 알게 되고, 그렇게 현실이 그들을 갈라놓으려

하는 위기를 통해, 로돌포와 미미의 진정한 사랑을 느끼게 되죠. 

 그렇지만 그들은 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처음 찾아온 미미에게 나의 사랑은 문제없다던 마르첼로 역시 뮤제타를 의심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점차 드러내며 (처음 미미가 노래하던 질투와 의심의 주인공이 그 이야기를 들어주던 마르첼로였다는 아이러니) 뮤제타와 논쟁을 벌이고, 마찬가지로 헤어지게 됩니다.


뭔가 익숙한 이야기라고요?

그렇습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이제 익숙해질 데로 익숙해진 플롯이지만 19세기에도 그랬을까요? 더군다나 이런 모던한 느낌을 지닌 사랑을 음악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과연!


푸치니는 라보엠 3막에서 극의 서사 부분에서는 가장 중요하지만 음악적으로는 가장 지루해질 수 있는 이런 스토리 라인을 음악적으로 잘 감싸고 있습니다.

도입부에서 마르첼로(바리톤)를 중심으로 미미(소프라노)와 바리톤이 어우러지다가, 로돌포가 등장하면서

테너와 바리톤이 음악을 이어가고, 이윽고 또 다른 느낌의 소프라노 (뮤제타)가 등장하며, 

테너와 소프라노 그리고 바리톤과 소프라노 이렇게 두 쌍이 각기 대칭을 이루며 스토리와 음악이 합쳐져 

진행됩니다.


첫 미미의 등장 부분에 2막에서 뮤제타가 부르던 "뮤제타의 왈츠" 주제를 이용해, 2막의 흥겹고 활기찬 분위기와 3막 이후에 진행될 분위기의 대조를 통해 음악적으로 교묘하게 주인공 사이의 불안한 심리 갈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내 이름은 미미"에 등장하는 주제를 이용해 마르첼로와 미미 사이의 대화가 시작됩니다. 

바그너의 라이트 모티브에서 영향을 받은 탓일까요? 하지만 바그너처럼 음악에 확실한 모티브를 담고 있다기보다는, 음악에 감정이 담겨 있다는 느낌이며, 그 감정이 주인공들의 대사와 맞춰 스토리의 상황이 바뀌면 거기에 맞춰 교묘한 음악적 변주를 통해 각 순간의 스토리라인을 따라 변하고 있는 감정선의 미묘한 변화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1막과 2막에 등장했던 다양한 음악적 주제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사라지면서, 오페라가 진행되는 스토리와 감정이 섞이는 아주 모던한 음악적 진행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라보엠>의 3막에서 각 주인공들의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극중의 감정들이 서로간에 숨겼다가, 

은근히 드러내지고, 그러다가 조금씩 비틀어지는 부분들이 교차하는 각 장면이 만들어 내는 공간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극을 따라가던 시선이 잠시 멈추며 머리 속으로 Edward Hopper가 만들어 낸 

이미지들이 떠오릅니다.


그의 작품 중 특히  <Dawn in Pensilvania>를 떠오르게 하는데요, 


Dawn in Pennsylvania, 1942 Oil on canvas, 61.9 x 112.4 cm


도대체 왜 필자에게 라보엠의 3막이 이 Hopper의 작품을 떠오르게 하는 것일까요?


이 <펜실베니아의 새벽>은 기차역의 플랫폼 위로 보이는 공장지대의 풍경에 서서히 새벽이 오는 장면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림을 보지 않고 누군가 우리에게 "기차역"과 "새벽"이라는 단어를 이야기한다면, 대부분 우리에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아마도, 조용필의 <여행을 떠나요> 같은 아주 힘차고 리드미컬한 느낌일 것입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와 흥분이 밀려오는 그런 느낌 말이죠.

그런데 이 그림은 그와는 아주 반대의 이미지입니다. 플랫폼에는 아무도 없고, 녹슨 철로 위에 절대 움직일 것 같지 않은 모습의 기차 뒤꽁무니가 보입니다. 짐을 운반해야 할 손수레 역시 쓸모없이 버려진 것 같은 느낌입니다. 


화면 뒤편으로 파랗게 펼쳐진 하늘의 절반 이상은 검은 구름이 덮고 있고, 좌측으로 해가 떠오르는지 파란색이 조금씩 옅여 지게 표현되고 있는데, 플랫폼을 비추는 조명은 아직 새벽의 느낌이 들지 않는 기차역의 전등으로부터 생기는 느낌을 확실히 하기 위해 동트는 방향과 반대에 광원이 위치한 것으로 그림자가 생성되고 있습니다.


불이 꺼진 공장들, 사실 1942년이라면 2차 대전이 한창일 무렵이니, 전쟁 물자들을 생산하기 위해 공장들이 밤낮으로 열심히 가동을 하고 있어야 맞을 텐데, 호퍼의 그림에 있는 공장들은 새벽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불빛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라보엠> 3막의 주인공들은 자신들의 가슴속에 타오르는 사랑을 숨기며, 이루어질 수 없는 현실에서 상대를 배려해야 하는 슬픔과 좌절감 속에 빠져 있습니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커다란 장벽을 느끼고 있는 것이죠.

이 호퍼의 작품에서도, 드러내어져 보이는 당시의 사회 모습과 상반된 그 안에 살고 있는 각 구성원의 내면에 가라앉아 있는 개인으로서의 감정적 상실감이 느껴집니다. 

동시대 미국 사회가 만들어 내고 있는, 모든 것을 성취할 것만 같은 집단적 도취 속에서 작가의 개인적인 감정은 어딘가 벽에 부딪히고 있는 고립감과 절망감을 감지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말이죠.


그래서 제목은 "Dawn"이지만, 왠지 "Sunset"이 느껴지는 우수와 고독감이 그림 속에 묻어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부분이 푸치니가 그려내는 3막의 감정들과 아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호퍼는 이 작품을 그리기 위해 다양한 연구를 하고 있고, 이를 스케치로 남기고 있습니다.

 

Dawn in Pensilvania Study 2




study 1


완성된 작품과 2개의 스케치를 비교해 보면, 호퍼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는데요,

study 1 에서는 새벽의 동이 트는 느낌 없이 기차역에 설치된 광원으로부터 플랫폼이 비춰지는 모습입니다.

뒤편의 하늘이 전체적으로 어둡습니다. 역 뒤편의 공장들도 보면 우측 건물이 아치형 창이고 좌측은 직사각형 창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study 2로 가면 기차역의 광원이 하나가 아니라 2개인 것처럼 벽에 그림자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새벽 느낌이 좀 더 더해지고 있습니다. 건물에 그려진 창의 개수가 약간 달라지고 있지만 창의 구조는 동일합니다.


그리고 완성작을 보면, study 2보다 훨씬 더 강한 광원을 등장시키고, 건물의 창 모양도 바뀌어져 있습니다.


이런 설명을 드린 이유는 대부분 호퍼의 그림을 realism 계열이라고 생각을 하다 보니, 그의 그림 속에는

Reality가 들어가 있다는 오해가 많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현실적인 그림이 되려면 있는 풍경 그대로를 묘사해야 할 텐데, study에서 보인 모습과 완성된 작품의 외형상의 차이는 호퍼는 있는 풍경을 그대로 그리는 작가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림 전체의 구도는 그의 그림에 자주 드러나는 수평적 분할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의 수평적 분할은 또한 호퍼의 그림이 연극 무대 위의 세트 같은 느낌을 갖게 합니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빛의 효과도 대부분 무대 위를 비추는 조명 장치로부터 생겨나는 명암을 표현한다는 느낌을 많이 갖게 하죠.


그의 작품과 reality에 대한 제 생각을 뒤받침 할 수 있는 좋은 예는 그의 대표작 <NightHawks>입니다.



처음 이 그림을 보면 아마도 맨해튼의 어느 뒷골목에 위치한 Bar나 Cafe를 모델로 그렸거니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그림 역시 그림에 표현된 빛을 보면 상당히 이상하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Bar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거리를 환하게 비출 만큼 어두운 시간인데, 뒤편의 건물에 비치는 빛을 보면 아주 높은 곳에 위치한 램프에서 강한 빛이 나오는 것처럼 그림자가 묘사되고 있습니다.

뒤편 유리창에 그림자를 보면 그림의 왼쪽 상단에서부터 그림자 라인이 오른쪽 아래 방향을 향해 나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건물의 2층 높이보다 더 높은 곳에 가로등이 있기는 힘들뿐더러, 있더라도 점광원 (가로등은 보통 백열전구 같은 형태입니다)에서 마치 현대의 할로겐 하이라이트 같은 모양의 그림자를 만들어 내기는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보면, 처음에 보았던 <Dawn in Pensilvania>와 유사한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두 작품뿐 아니라 대부분의 Hopper의 작품에서  마치 연극 무대의 한 장면이 그려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연극의 특징 중 하나는 영화와 달리 무대 연출이 그렇게 디테일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의 세트 위에 다양한 장면들이 연기되어지게 되는데, 그렇다 보니 각 장면에 정확하게 어울리는 디테일한 무대를 만들기 어렵게 되며, 다시 말하면 동일한 공간 안에 다양한 서사와 감정들이 스며들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느끼는 또 다른 호퍼 작품의 특징은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과연 동일한 시간대에 존재하는가, 또는 동일한 사건에 참여하고 있는가입니다.


이런 느낌이 가장 강하게 드러나 있는 작품으로는 <Excursion into Philosophy>가 있습니다.


Excursion into Philosophy 1959


침대에는 엉덩이 아래로는 옷을 입지 않은 반라의 여인의 누워 있습니다. 남자는 이미 옷을 다 입은 채 누워 있는 여인의 옆에 책을 펼친 채로 앉아 있습니다.


과연 반라의 누워 있는 여인이 속해있는 그림 속의 서사와 책을 펼쳐 놓고 생각에 잠긴 남자의 서사는 동일한 것일까요? 이 공간에 두 명의 남녀가 그림과 같은 상황으로 같이 있을 수 있을까요?

침대의 크기나 공간이 보여주는 인테리어는 절대 부부의 침실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두 남녀는 어떤 사이일까요?


영화 <여왕 마고>로 유명한 프랑스의 무대 연출가이자 영화감독인 "파트리스 쉐로"의 <Intimacy>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한국에는 <정사>라고 소개가 되었는데요,



이 영화의 남녀 주인공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며, 어느 한쪽에서 경제적인 혜택을 주기 때문에 만나는 관계도 아닙니다.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남녀가 자신을 둘러싼 관계 (가정, 사회)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가지는 정체성에 대한 혼란, 점차 고립되어 가는 공포감 이런 것들로 인해 알 수 없는 이유로 서로가 일주일에 한 번 만나서 정사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 포스터의 남녀 모습이 호퍼의 그림 속 상황과 아주 유사한 것 같습니다.


동일한 시간과 공간 속에 벗은 몸을 마주하고 있지만 호퍼의 그림 속 남녀들과 쉐로의 영화 속 남녀들은 같은 시간과 공간 안에 존재하면서 각자가 서로 다른 서사 속에 포함되어 있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독특한 고립과 단절된 느낌을 통해서 그림을 보는 우리들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스토리를 통해 그림 속 공간이 내포하고 있는 감정들을 발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호퍼는 이렇듯 자신이 대상화하고 있는 배경과 인물들을 아주 독특한 연극적인 세팅을 통해 이미지화 함으로써 다양한 감정을 내포하는 독특한 공간을 창조해 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다양한 드라마를 위해 만들어진 범용적인 야외 세트장 같기도 합니다.

드라마가 촬영되는 동안에는 세트장은 어떤 특정 드라마의 내러티브가 내재되어 있는 공간으로 변신하게 되며,

우리는 그 공간과 그 공간에서 벌어지는 연기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감정을 동일시하고 있지만, 

그 드라마가 끝나고 난 이후에 남겨진 세트장에서 우리는 과연 그 공간 속에 존재했었던 감정이 지속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까요?


시간 속에 존재하는 역사의 공간에는 역사를 관통한 생생한 이야기와 그 이야기를 만들어낸 주인공들의 감정이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비록 그 역사는 이미 오래전 사라진 사실에 관한 이야기 이더라도 말이죠.

하지만 세트장은 그 필요가 사라진 이후에는 정체성을 상실한 무감정의 공간,  오히려 거대한 무의미의 대상물이 되어버리고 말게 됩니다.


호퍼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공간에서 필자가 느끼는 것은 바로 이런 각각의 내러티브 안에 포함된 스토리와 그에 따른 순간적인 감정의 전이들을 절묘하게 포착하는 장소라는 점입니다.


바로 이런 지점에서 푸치니가 만들어 내는 순간적인 감정의 선들과, 호퍼의 공간은 기묘하게 서로 어울리고 있습니다. 


시대를 앞서는 이러한 두 거장의 예술적 창조력은 오히려 현대의 우리에게 너무나 편안하고 익숙하게 다가오는 이유 때문에 시대에 뒤쳐진다는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저는 많은 세월의 간극을 뛰어넘어 지극히 현대적인 관점으로 우리들에게 어필을 하는 이 부분이 정확히 그들이 시대를 뛰어넘는 예술의 창조자였음을 증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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