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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수의 왕 Apr 25. 2020

영화 <작가 미상>과 2명의 리히터


"삶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용기이야 말로 가장 위대한 예술 창작의 원동력이다"


감독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영화는 자신이 생각하는 예술에 대한 정의를 영화로 표현해낸 작품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삶의 상처가 클수록 더 위대한 예술이 등장한다고 생각한다는 부연설명과 함께 말이죠.


이렇듯 영화 <작가 미상>은 '게르하르트 리히터'라는 위대한 독일의 현존 작가가 겪었던 삶의 다양한 경험 (인간적인 좌절 및 상처)을 바탕으로, 쿠르트라는 가상의 인물이 겪는 인생의 역경과 사랑이 어떻게 위대한 예술로 변모해 가는지를 아주 세밀하게 묘사해내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사생활에 대한 작가의 영화화 허용 인정 여부 등으로 논란이 좀 있어서, 감독은 리히터를 모델로 하기는 했지만 모든 것은 픽션이라고 못 박고 있는 중이죠) 


영화 전개의 큰 줄기는 작가의 어린 시절부터 60년대 초 처음으로 서방 미술계의 인정을 받기까지 과정을

시간의 흐름에 맞춰 일대기처럼 보여주며, 각 시대별 당시 독일 미술계의 주요 요소들을 영화적 상상력을 통해 가상으로 만들어진 에피소드를 통해 삽입시키고 있습니다.


영화를 관통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소재는 2006년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약 390만 불에 낙찰된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작품 <Tante Marianne>와 관련이 있습니다.  리히터 본인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작품 속에 숨겨진 비밀이 전기작가 위르겐 슈라이버에 의해 밝혀진 이후 독일 미술계와 정치계에서는 이 작품의 역사적인 의미를 생각한다면 반드시 구입해서 자국 내에서 기념비적으로 보존돼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그들은 경매에서 낙찰받을 수 있는 규모의 자금 펀딩에 실패하고 작품은 신원을 밝히지 않은 수집가에게 넘겨지고 말게 됩니다. 과연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아무도 몰랐던 이 작품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Tante Marianne>  1965 , Oil on canvas 100 cm x 115 cm


어느 기분 좋은 오후, 귀여운 조카를 무릎 위에 앉히고 미소를 띠고 있는 젊은 소녀의 환한 얼굴 뒤에는 나치가 약 25만 명의 자국민에게 행한 처참한 반인륜적인 범죄 행위가 숨어 있습니다. 


정신 이상이 있는 유전자가 후대로 이어지면 안 된다며, 유사 징후가 있는 25만 명의 독일 여성들을 강제로 불임 시술을 시킨 후 수용소에 가두었다가 이후 전쟁 중에 식량공급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들 대부분이 굶주림 등으로 죽임을 당한 것이죠.


사진 속 아기가 게르하르트 리히터 본인이고, 아이를 안고 있는 소녀가 리히터의 이모인 마리안입니다.  마리안은 정신질환자로 나치에게 끌려가 나치의 폭력적 우생학 정책으로 인해 불임 시술을 받고, 수용소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게 되는데 여기까지는 리히터 본인도 알고 있던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리히터도 인지하지 못한 부조리한 비극이 또 한 번 개입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불임시술을 했던 장본인이 작가 리히터의 실제 장인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전기작가에 의해 밝혀진  것이죠. 


영화보다 더 극적인 비극적 실화가 리히터를 중심으로 커다란 원을 그리며 독일을, 독일 국민들을 그리고 리히터 자신을 비극의 소용돌이로 몰고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영화는 이런 소용돌이를 리히터의 초기 작품이 보여주는 화풍과 잘 버무려 마치 리히터의 작품 같은 이미지를 제시함으로써 영화적으로 교묘하게 해결책을 찾고 있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인 쿠르트와 그의 이모 엘리가 찍었던 사진을 바탕으로 한 회화작품을 한편에, 그리고 엘리같이 신경증이 있는 독일 여성들에게 강제 불임수술을 시행하게 한 나치의 책임자가 체포된 후 신문에 게재된 사진을 바탕으로 만든 회화가 맞은편에 걸려 있는 쿠르트의 작업실을 영화는 조명이 만들어 내는 투영과 겹침 그리고 왜곡을 통해 스크린 위에서 마치 두 작품이 한 작품처럼 겹쳐 보이는 효과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감독은 이런 방식으로 <Tante Marianne>에 숨겨져 있던 역사적 진실을 드러내 보여주며, 만약 게르하르트 리히터가 이 비극적인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이런 그림을 만들지 않았을까 라는 의문을 관객들에게 던지며 동의를 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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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제목이 독특한데, 원제는 <Werk ohne autor >로 국내 개봉에는 이 독일어 원제를 번역해서 <작가 미상>이라고 붙이고 있으며, 미국 개봉 시 영어 제목은 <Never look away>로 바뀌고 있습니다. 독일 태생이지만 뉴욕에서 성장한, 그래서 영어와 독일어가 모두 능통한 감독이 각각 붙인 제목이라, 서로 다른 제목을 사용한 분명한 이유가 있을 텐데요. 


한국 개봉 시 제목이 되고 있는 <Werk ohne autor>가 나온 배경을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영화 창작에 단초가 되었던 작품인 <Tante Marianne>을 포함해, 60년대 초중반 리히터는 신문이나 잡지 등에 실린 사진들 또는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가족사진 등을 회화로 옮기는 작업을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Faltbarer Trockner (Folding Dryer), 1962  Oil on Canvas 99.3x78.6 cm


위에 보이는 <Faltbarer Trockner>는 리히터의 가장 초기 작품입니다. 그의 작품을 관리하는 공식 홈페이지의 카탈로그를 살펴보면, 1962년에 작업한 작품부터 게재가 시작되고 있으니, 뒤셀도르프 아트 아카데미 시절의 작업부터 자신의 작품으로 등재하고 있습니다.


사진 속 여성의 왼쪽 부분이 스푸마토 기법으로 인해 뭉개져 보입니다. 원래 스푸마토 기법이 윤곽 부분을 흐리게 만들어, 그림 속 대상의 인물 표현을 자연스럽게 하려는 것과 달리, 리히터는 의도적으로 그림을 뭉개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모델의 얼굴 부분은 훨씬 더 윤곽을 알아보기 힘들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리히터의 초기 작품에서 보이는 경향 중 일부들은 이후 추상화 작업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리히터는 눈에 보이는 현실을 그대로 옮기고 있는 카메라이더라도, 대상물이 찍힌 순간과 그것이 이미지로 저장되는 순간 사이에 미세한 간극이 존재하며, 그러한 차이는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 그 사진을 보는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대상물에서는 더욱더 커진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동일한 대상물이 내포하는 의미가 보는 관점 및 시간에 따라 다르게 인식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리히터의 작품을 보고 있는 각 관찰자마다, 리히터가 만들어낸 이미지인 일종의 가상 무대를 통해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개별적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서로 다른 기억들이 소환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마들렌과 홍차를 통해 마르셀 푸르스트의 소설 속 주인공에게 소환되는 기억들과 그 책을 읽는 나에게 소환되는 추억은 분명히 다를 것이며, 리히터의 작품을 보는 우리들은 리히터가 그 작업을 하는 동안 그에게 부여되는 의미와 완전히 다른 의미들이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죠.


이렇듯, 리히터는 작품은 스스로 발전하며, 자신은 미술이 스스로 표현하도록 내버려 둔다라는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리히터의 의도를 다른 관점에서 한번 생각해 본다면,  

낸 골딘이라는 미국의 사진작가는 사진에 관해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한 바 있는데요, 

" A lot of people seem to think that art or photography is about the way things look, or the surface of things. That's not what it's about for me. It's really about relationships and feelings"

리히터는 이렇듯 사진 자체가 보여주고 있는 사진 속 대상물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사진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사회적 관계를 바탕으로 그의 그림을 보는 개별 관찰자들 각각이 가지고 있는 경험과 지식 속에 내재되어 있는 숨겨져 있던 인식을 끌어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의 <Tante Marianne>이 갖는 의미는 동일한 역사를 경험한 독일인들에게는 하나의 큰 역사적 상징이 되겠지만, 전혀 다른 경험치를 갖고 있는 누군가에게는 흐려진 등장인물의 얼굴에 내가 알고 있는 내 삶 속의 어떤 특정인의 얼굴 이미지가 병치되어 떠오르며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Faltbarer Trockner>도 유사한데, 리히터 본인에게는 이 작품의 바탕이 되었던 접이식 빨래건조대에 관한 신문광고가 동독을 탈출해서 서독으로 넘어온 본인의 힘든 상황 (빨랫줄을 설치할 공간도 없는 자신의 삶에 대한 비애)을 보여주는 장치가 되었다고 하는데, 많은 미술 평론가들에게는 리히터가 대중적인 광고를 이용해서 당시 미국 및 영국에서 유행했던 Pop art 스타일의 작업을 한 것으로 읽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리히터의 사진을 바탕으로 한 작품들은 그 작품 속 이미지들이 가지고 있는 공간성과 시간성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에, 사진 전체가 보여주는 공간적 그리고 시간적 의미만이 살아 남고, 그 안의 등장인물 또는 특정 사물의 개별성에는 큰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흐릿해진 (초점이 맞지 않는) 사진의 장면들을 통해서, 우리는 사진 속 대상이 가지고 있던 사실성과 상관없이 나에게만 읽히는 개인적인 연상들을 통해 나의 경험 속 사실성들과 마추 지게 되며, 그렇기에 최초의 사진이 지니고 있는 그 특정 사진을 찍은 행위자의 의도는 중요해지지 않습니다. 이점에서 감독은 최초 사진을 찍은 작가는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로 "작가 미상"이라는 표현을 제목으로 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모두는 이모의 무릎 위에 앉아서 사진을 찍었던 조카였을 수도 있고, 또는 리히터처럼 엄청난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었던 주인공일 수도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리히터의 작품은 어떤 의미에서 그의 그림을 보고 있는 관객들에게 스스로의 기억을( 그림 속에 담겨 있는 시간과 공간이 불러일으키는 회상) 소환하게 하는 거울이 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는데, 2014년 발표한 

다음 작품은 이런 그의 회화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확장시키고 있습니다.


Doppelgrau,  2014  200 cm x 400 cm, Lacquer on back of glass


2장의 동일 사이즈 glass의 뒷면에 서로 다른 명암으로 채색을 입힌 작품입니다. 

2장의 동일한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동일한 관객은 거울이 비추는 서로 다른 나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작가미상>에는 또 다른 한 명의 '리히터'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음악을 담당했던 맥스 리히터입니다.


바그너에서 시작되어 쇤베르크를 거쳐 점점 이성과 논리가 지배해 나가던 유럽 음악(독일 음악)의 전통은 현대 음악이라는 그로테스크한 소리들이 만들어 낸 정점을 지나서 이제는 차차 다시 소리가 가지고 있던 본연의 역할인 우리의 감정에 호소하는 방법을 되찾아 나가고 있습니다.


맥스 리히터의 음악 역시 이런 맥락 안에 놓여 있는데, 미니멀리즘 음악을 지나, 감성에 다가가는 방법을 찾고 있는 일련의 현대 작곡자 중 한 명입니다. 


이번 영화에서도 이런 그의 특징이 정확히 드러나고 있는데, 아기 쿠르트를 안고 있는 엘리와 그녀를 비극으로 몰고 간 나치 전범의 이미지가 겹치는 장면에서 만약 그의 음악이 없었더라면, 우리의 이성만으로 그 장면이 가지고 있는 예술적 진실을 이해하기 쉽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리히터는 최근에 그가 2015년 작곡한 <sleep>을 가지고 BBC와 함께 독특한 라이브 공연을 시도해 냅니다.

8시간에 걸친 연주 시간 동안 청중들이 음악을 들으며 실제로 잠에 빠지게 되는데요, 2018년에는 뉴욕에서도 동일한 콘셉트의 라이브 공연을 해낸 적이 있습니다. 


공연 당시 미디어 평을 살펴보면  "음악이 꿈과 같은 상태를 만들어 내고 있다" "마치 수면 위에 물결이 생겨나는 것 같은 느낌이 우리를 평온한 상태로 이끌어 준다"와 같이, 머리로 듣는 음악이 아닌, 몸과 마음으로 듣게 되는, 그렇기에 궁극적으로 무의식 상태에 있는 우리의 감정을 어루만져주는 그런 음악을 만들어 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7W6W-kTZuUc




이렇듯 위대한 2명의 리히터들의 예술적 감수성을 통해 감독은 자신이 생각하는 예술에 관한 정의를

스크린에 드러내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Never look away>입니다.

 

" Everything in true is beauty. Never look away"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절대 눈을 떼지 마라.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신들이 가지고 있던 선입견을 뛰어넘는 진실을 찾게 될 것이고, 이 진실들의 외면이 아름답던 추하던 그 안에 들어 있는 본질이 바로  <미> 그 자체일 것이다"라는 감독의 생각이  바로 <Never look away>란 제목 속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진실을 마주할 충분한 용기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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