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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수의 왕 Apr 22. 2020

카프카의 <변신> by 로열 발레


전 세계적으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실행되면서 유럽에서도 예술 공연들의 취소가 잇따르고 있는데요,

이미 디지털 콘서트홀이라는 좋은 플랫폼을 갖추고 있던 베를린 필이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좋은 아이디어로 자신들의 콘텐츠를 한 달간 무료로 사용하게 하기 시작하면서 많은 단체들이 여기에 동참해 자신들의 과거 공연 영상들 일부를 무료로 올려주는 서비스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런던의 로열 오페라하우스 역시 과거의 공연 중 한편씩을 골라 매주 금요일 유튜브에 업로드해주고 있는데,

지난주 금요일에 새로 올라온 공연은 놀랍게도 카프카의 <변신>을 가지고 만든 현대 발레 공연입니다.


https://youtu.be/6H6KzBu4K68


2011년 Arthur Pita의 안무로 처음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공연되기 시작했다고 하며, 초연 이후 많은 반향을 불러와 뉴욕 공연까지 성공적으로 이어졌다고 하는데,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는 이 발레극은 이제는 로열 오페라 하우스를 대표하는 공연으로 자리매김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주인공 '잠자'역은 로열 발레의 수석 무용수인 Edward Watson이 맡아서, 그야말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독특한 동작들로 이루어진 장면을 표현해 내고 있는데요


National Portrait Gallery


Edward Watson in Alexei Ratmansky’s 24 Preludes.


카프카라는 이름이 어쩔 수 없이 보고 있는 우리 관객들의 눈에 커다란 선글라스를 씌우고 있을 테지만, 최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공연 자체에 몰두하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인체가 만들어 내고 있는 경이로운 몸동작들이 시선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굳이 곤충의 동작을 흉내 내고 있다고 애써 해석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온몸에 있는 모든 근육을 하나하나 움직여 가며, 눈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박스 속에 갇혀 있는 듯한 아주 제한적인 움직임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이 기괴하고 절망적인 움직임은  어쩌면 곤충의 동작을 보여주려 한 것이 아닐 수도 있을 테니까요


상상할 수 있는 인간의 모든 움직임을 구현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신체를 가지고 있는 Edward Watson이 이 발레를 통해 보여주는 모습은, 마치 그 탁월한 신체가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것 같은, 그렇기에 자신의 몸이 왜 자신에게 부여된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 암담하고 참울한 느낌을 전달해 줍니다.


밝은 빛 아래에서 굳어있는 잠자 와 유연하던 여동생의 몸동작이 불이 꺼지고 나면서 잠자는 점차 일어나서 인간으로의 동작을 보여주지만, 오히려 굳어진 동작으로 바뀌어 가는 여동생,

점점 인간처럼 되어 가는 어둠 속 잠자에게 달라붙어 동작을 제한하기 시작하는 검은 몸의 정체모를 형체들.


전체적인 플롯의 구성은 소설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지만, 발레를 통해  안무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극의 내러티브는, 두 개로 분할된 공간과 각 공간에 부여되는 빛과 어둠이라는 조명 효과를 이용해 무대를  4가지 경우로 구분해서 각 무대 상황에 놓인 주인공들의 대조되는 몸동작을 통해,  특수한 상황에 처하게 된 인간의 비극적인 모습에 대한 사회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인식과 시선에 대한 은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극적인 효과를 높이고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가정부의 청소 바구니에서 시작된 검은색 오일이 충격으로 쓰러지는 엄마와 자신의 현재 상황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는 잠자의 외부적 변화의 기호로 쓰이고 있으며, 오일을 이용해 미끄러운 바닥을 만들어 냄으로서 견고하게 고정되지 못하고 계속 slip을 일으키는 내적 자아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시각화시켜주는 부분들도, 백색 무대와 조명을 통한 명암 효과와 어우러지며 그로테스크한 음악과의 일체감을 높여주고 있네요.




사실 사르트르나 까뮈 같은 전설들이 카프카에 대해서 '실존주의'란 이름을 붙여버렸다는 불필요한 정보를 카프카의 소설 내용보다 먼저 알아버린 많은 우리들에게는 카프카의 소설은 아주 어렵고 난해한 작품이라는 암호 코드가 부여된 소설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얄팍한 지식이 없는 순진무구한 모습으로 되돌아가서 스스로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면,

매일 동일한 일상이 반복되는 삶을 살고 있는 많은 우리들은 한 번쯤은 열이 난다는 핑계로 또는 몸살이 나서 몸이 안 좋다는 핑계 등으로 오늘 하루를 건너뛰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일어나고 싶은 비뚤어진 욕구가 만약에 내가 의도하지 않았던 이런 이상하고 기괴한 결과로 발현되고 있다면, 그것을 알아챈 그 순간 우리의 느낌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만약 여러분의 친구가 또는 회사 동료가 어느 날 점심을 먹으러 나가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상상해 보죠.

A: 야, 오늘 아침에 일어났는데 몸이 영 뻗뻗하고 이상한 게 꼭 거북이가 된 느낌이었어!

B : 그러냐? 난 요즘 새로 먹는 비타민이 괜찮은지, 오늘 아침에 몸이 뱀처럼 아주 유연하게 잘 구부러지던데, ㅎㅎ

C ; 근데, 그런 느낌이 아니라 진짜로 눈을 떴는데 거북이가 된 거면 어떻게 될까?

A : 그러게, 내가 거북이가 돼버려도, 은행에서 마이너스 대출 갚으라고 쫓아다닐까?

B : 야, 은행이 거북이를 보고 마이너스 대출을 갚으라고 전화하면 거북이가 '네 갚을게요' 해도 그냥 끔뻑끔뻑 소리밖에 안 나올 텐데 황당하겠다 ㅋㅋㅋㅋ


이렇게 밝은 대낮의 농담으로 바꿔 버리면, 카프카의 소설 속 상황이 아주 황당한 개그의 소재가 되고 있지는 않은가요?


어찌 보면, 카프카의 이야기들은 이렇듯 우리가 삶 속에서 맞닥뜨리는 황당한, 그래서 이해가 쉽지 않은 상황에 대한 작가의 블랙 유머는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상황은 또 어떤가요?


어느 날 친구의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장례식장에 모인 동창들은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A : 이런 연세가 어떻게 되셨는데 벌써 돌아가셨데?

B : 야, 치매로 오래 병상에 계시다가 돌아가셨어. 호상이야 호상!


아, 단언코 위의 상황에 대한 도덕적 비난이나 이런 것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위와 같은 상황이 된다면 유사한 또는 동일한 언급을 하고 있을 테니까요. (물론 항상 예외는 있겠죠 - 그리고 위의 상황을 상상해 보면 까뮈의 <이방인> 속 주인공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와 같은 상황에서 내가 영안실에 누워 있는 바로 그 주인공이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런 상황의 주인공이라면, 그런데 하필 여러분의 영혼은 그 상갓집에 모인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들을 수 있다면 여러분의 머릿속으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거기에 더해서, 우리의 영혼이 미처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못하고 있다면, 그래서 뭔가 잠에서 깨어나서 다시 저들 사이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변신>은 어떤 면에서 저에게 위와 같은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입니다.




밀란 쿤데라가 카프카의 <성>에 대해서 독특하고 재미있는 해석을 보여주고 있는 구절이 있는데요,

그의 에세이집인 <커튼>의 6부인 '찢어진 커튼' 편에 '성과 마을의 침범당한 세계'와 '관료화된 세상의 실존적 의미'에서 입니다.


그는 막스 베버와 아달베르트 슈티프터에서 관료주의란 개념을 끌어내면서, 이를 카프카의 <성>과 연결시킵니다.


"그런데 슈티프터의 독자인 카프카가 평화로운 마을과 성의 세계에 사무실과 관리들의 군대와 서류 사태를 침입시킨다. 잔인하게도 그는 관료화의 전적인 승리라는 정반대의 의미를 성과 마을에 부여함으로써 반 관료적 목가의 신성한 상징을 침범한다" (성과 마을의 침범당한 세계)


"관리들과의 헛된 만남 몇 번과 긴 기다림. 몸 대 몸의 싸움은 없다. 보험, 사회 보장, 상업 조합, 법원, 국세청, 경찰, 도청, 시청, 우리의 적에게는 몸이 없다. 우리는 사무실에서, 대기실에서, 자료실에서 수많은 시간을 보내며 싸우는 것이다. 이 싸움의 끝에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무엇인가? 승리? 가끔은 그렇다. 그런데 승리란 무엇인가? 막스 브로트에 따르면 카프카는 <성>의 마지막을 이렇게 그렸다고 한다. 그 모든 소동 후에 K는 지쳐서 죽는다. 임종의 침상에 누워 있을 때 - 비록 마을의 시민권은 없지만, 몇몇 세부 사항을 존중해 거기서 살고 일하는 것은 허락한다는 결정이 성에서 내려온다- " (관료화된 세상의 실존적 의미)


위에서 보이는 밀란 쿤데라의 해석은 다음의 재미있는 코미디 영화를 통해  좀 더 명확하게 이해되고 있습니다.


영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보면 다음과 같은 장면이 있죠.


대통령을 납치한 죄목으로 감옥에 갇힌 채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트릴리언, 사랑하는 트릴리언을 죽음으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주인공 아서 덴트는 대통령  자포드와 함께 트릴리언을 석방하라는 대통령의 명령 서류를 작성하고 있는 중입니다.  바로 납치되었다는 대통령과 함께 말이죠.


늘어서 있는 긴 줄을 보며, 줄을 서는 건 자신이 있다는 영국인다운 대답을 했던 주인공은 하지만,  오랜 기다림 끝에 접수창구에 서류를 제출했을 때 돌아오는 "음, 이건 다른 색 서류에 작성해야 돼요"라는 대답에 폭발하고 마는데요, 이 장면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은 바로 밀란 쿤데라의 지적대로, '관료화의 전적인 승리'가 가져온 우리의 삶이 가지고 있는 비이성적 모순에 기인합니다.


즉 우리의 적이 가지고 있는 가장 훌륭한 무기는 시간입니다. 우리에게는 유한한 하지만 관료체계에게는 무한히 부여된. 그래서 그들은 아서 덴트 일행을 잡기 위해 우주선으로 쫓아가고자 하는 그 긴박한 순간에도 시계를 보며 "오, 이런 점심시간이군"이라는 멋진 대사를 날릴 수도 있는 것이죠.




위대한 사상가들이 이야기하는 '실존주의'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꼽은 실존주의적인 소설들 <지하로부터의 수기 - 도스토예프스키> 나  <변신 - 카프카> 등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폭소가 터지는 지점이 생긴다는 점에서 저에게 '실존주의'는 삶의 현실적인 모습이 지니고 있는   'Absurd'한 우리들의 비밀이 아닌가 싶습니다.

( 제가 좋아하는 코미디 그룹 Monty Phyton은 그들이 만들어 내는 웃음의 근원으로 Absurdity를 자주 꼽습니다)


밀란 쿤데라의 해석을 읽다 보면 일상의 늪에 빠진 제 자신이 발견되기도 하고요.


어쨌건 이런 다양한 생각이 나올 수 있게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카프카는 위대한 작가임에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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