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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수의 왕 May 05. 2020

Royal Opera가 만들고자 했던 완전체 예술

오페라가 지금보다 훨씬 영향력이 컸던 20세기 초, 영국의 로열 오페라는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과 함께 음악과 미술이 합쳐진 역사적인 순간들을 만들어 내고 있었습니다. 당시 미술가들은 사실 로열 오페라뿐 아니라 파리의 발레 뤼스 등의 무대디자인에도 참여하고 있었고, 물론 이런 전통들은 현재에도 일부 이어져, 호크니나 여러 유명 작가들은 다양한 오페라 작품의 무대 작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번 편에서는 이런 로열 오페라 하우스의 역사 속에 존재하는 역사적 협업의 순간 중에 가장 주목할 만한 프로덕션인 살바도르 달리가 무대 디자인과 의상을 담당했던 피터 브룩 연출의 1949년 <살로메>를 중심으로 R.Strauss의 오페라와 살바도르 달리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피터 브룩은 젊은 시절 저에게는 전설 속의 연출가였습니다. 몇 가지 공연 이미지 외에는 그가 쓴 <빈 공간>이란 책이 얻을 수 있는 모든 자료였음에도 무엇에 홀린 듯 그의 이름을 읊조렸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당시 그의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 중에 한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많은 지적인 관객들은 마음속에서 우리의 일상을 벗어난 좀 더 고상한 연극을 진지하게 원하지만 지적인 만

족과 자신이 진실로 갈망하는 참된 경험과를 혼동하곤 한다"


젊은 시절 많은 연극 공연과 음악 연주회를 쫓아다녔음에도 뭔가 계속 갈망하게 된 이유가 지적인 만족이 충족되지 못한탓인지, 아니면 참된 경험의 부족인지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던 당시 제가 처한 상황을 정확하게 꼬집어 내고 있었기 때문일까요?


피터 브룩은 그의 책을 통해 자본주의가 점령하기 시작한 서방의 연극뿐 아니라 오페라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칼을 들이대고 그 폐부를 헤집고 있는데, 당시 공연평을 통해서 추측하는 이 <살로메> 연출 속에도, 그가 생각하고 있던 당시 오페라계에 대한 비판적 사고가 그대로 접목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연출가 자신은 "살바도르 달리가 유일하게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성도착적인' 에로티시즘과 오스카 와일드의 상상력을  이미지로 구현해 낼 수 있었다"라고 밝히고 있는데, 하지만 당시 이 오페라 공연과 관련된 평은 달리가 만들어 낸 우스꽝스러운 의상과 분장으로 인해 가수들의 노래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는 혹평이 다수였던 것 같습니다. 피터가 비판하고 있던 오페라계의 기성세대들에게는 그의 새로운 시도가 그리 달갑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달리는 그의 회화 작품에도 성을 주제로 한 것들이 있는데요, 가장 유명한 것은 

<The Great Masturbator>입니다.


1929, Oil on Canvas   110 cm × 150 cm 


화면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이미지의 프로파일은 그의 유명한 작품인 <The Persistence of Memory>

의 중앙 하단에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달리의 설명에 의하면 그의 고향에서 가까운 바닷가의 암벽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자연의 모습에서 성에 관한 그림의 소재를 찾고 있는 이 초현실주의 화가의 자유로운 상상력이 제 이해의 범주를 벗어나고 있다는 느낌이 드네요.


성을 육체적인 관점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닌,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정서적 요소들, 즉 행복감 만족감 이런 감정들을 투영시키기 위해 자신이 좋아하는 고향의 모습을 그림의 요소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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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살로메>에 관해서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잘 알려진 세례 요한과 관련된 일부 에피소드를 오스카 와일드가 <살로메>란 제목으로 희곡을 완성해 내었고, 이에 바탕을 두고 탄생하게 된 오페라입니다.


이 작품은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중에 초기 작품에 속합니다. 바그너가 만들어낸 '악극-Music drama'라는 방식에서 많은 영향을 받고 있으며, 바그너가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낭만적 사랑의 에로틱한 면모를 젊은 혈기 때문인지  그로테스크하고 이국적인 음악적 어법을 통해 훨씬 더 자극적으로 몰고 가고 있습니다.


물론 오스카 와일드의 원작이 불러온 영향도 크게 작용하고 있었겠지만, 세례 요한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어린 '살로메'가 보여주는, 최초에는 스스로가 갈구하는 대상과 그 목적이 무엇인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중에 자신의 본능에 사로잡히며 어느 순간 갑자기 원숙한 느낌의 관능적 이미지를 발산해 가는 과정, 그리고 의붓딸을 아주 끈적한 눈길로 쳐다보는 헤로데스 왕의 노욕에 가득한 추잡한 욕정,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비뚤어진 명분을 지키려고 하는 왕비 헤로디아스의 한과 노여움, 이런 면모들이 한데 어우러지며, 묘한 음악적 앙상블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살로메를 보고 사랑을 느끼는 근위대장 나라보트의 연약하게 사랑을 갈구하는 목소리가 가벼운 테너 음성으로 표현되고,  다양한 감정의 변화를 그리고 미숙한 어린 소녀에서 점차 원숙한 느낌으로 변해가는 캐릭터를 표현해내야 하는 살로메는 드라마틱한 소프라노가 요구됩니다.  그리고 주위의 모든 상황과 상관없이 스토리상으로 그리고 음악적으로 꾸준히 중심을 잡아 주고 있는 세례 요한은 바리톤인데 특히 우물 밑에서 울려 올라오는 거대한 성량을 가지고 있는 바리톤이 맡아야 합니다. 노욕의 상징인  늙은 왕은 나라보토와 유사한 느낌의 테너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여왕으로서 그리고 한 여인의 한과 노여움을 드러내야 하는 헤로디아스는 어두운 목소리의 메조소프라노가 보통 맡고 있습니다.


주인공 살로메를 불러야 하는 드라마틱 소프라노는 슈트라우스 특유의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소리 위로 자신의 소리를 울려야 하는 보컬적인 어려움 외에도, 가장 유명한 부분인 <일곱 베일의 춤>에서는 관능적인 춤까지 선보여야 연기적인 어려움에도 직면하게 되는데, 아이러니한 사실은 대부분의 드라마틱 소프라노들은 평균적으로 그녀들의 몸집 역시 상당히 드라마틱하다 보니, 관능적인 춤이 아니라 파워풀한 국민체조로 추락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이런 부분들이 오페라 연출가들에게는 아주 풀기 힘든 숙제 중의 하나 일 것입니다.


제가 보았던 실황 하나에서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 살로메의 자아와 춤을 추는 자아를 분리해서 독특하게 연출하기도 했었는데 이런 경우는 조명을 어둡게 하고, 춤을 추는 무용수가 마치 진짜로 일곱 베일의 옷을 다 벗어던지는 느낌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쾰른 슈타츠 오퍼였는데, 오케스트라 피트에 앉아 있던 단원중에 이 부분에서 자신의 파트  연주가 없는 한 사람이 일어나 무대 위의 야한 광경을 구경하는 이상한(?)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구애를 거절한 세례 요한을 죽여서라도 소유하고 싶은 살로메는 아직 완전히 성숙하지 못한 그래서 순간순간의 감정에 상당히 휘둘리는 여성성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극단적이고 자신의 성적 매력을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는 그리고 이런 것을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끝내 얻어 내고야 마는 팜므파탈의 모습도 갖춰야 하겠죠.


이런 다양하고 복잡한 성격을 지닌 이 오페라는 더군다나 단막이라, 무대의 구성에도 많은 제약이 있으며, 음악적으로 상당히 뛰어난 오페라이다 보니, 오페라 시장에서 연출보다는 지휘와 가수들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하지만 <살로메>는 드라마틱한 스토리에 비해, 여러 장면들이 교차되며 복합적인 서사 진행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한 공간을 통해 다양한 캐릭터의 차이와 이해관계의 대립을 보여 주어야 하기 때문에 연극 무대를 주로 만든 피터 브룩 같은 연출가에게 아주 적합한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빈 공간>에서 연출가가 스스로 밝히고 있는 오페라에 대한 그의 이해는 좀 독특합니다. 

그는 가수들의 노래나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큰 변화가 개입되기 어렵다고 보고 있는 편입니다. 연극 무대 위에서 배우들의 대사 표현과 비교해서 말입니다.


그렇다 보니, 가수들에게 좀 더 노래에 집중할 수 있는 여유를 부여하는 대신, 달리가 제안한 독특한 의상을 가수들에게 입히고, 각 역이 가지고 있는 캐릭터 자체를 부각하기 위해 이미지를 사용하는 방법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이런 방법이 당시 (사실은 현재에도 대부분인) 오페라계의 생각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당시의 이 오페라에 대한 평가는 가수들이 노래를 부르는데 상당히 제한을 주는 의상 때문에 특히 머리에 쓰고 있는 왕관 같은 장신구들이 발성이나 호흡 등에 지장을 주고 있어 음악적 몰입감이 떨어진다는 평이 지배적이 었다고 하네요.


과연 노래가 먼저일까요 아니면 극이 먼저일까요? 일반적인 오페라라면 저도 노래(음악)가 더 중요하다고 보는 편인데(오페라 팬 중에서는 상당히 연출에 많은 무게를 얻는 편인데도 불구하고) 이 오페라는 작곡자가 바그너의 영향으로 Music Drama라고 이름 붙이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피터 브룩처럼 새로운 극의 방향을 제시하는 연출가도 분명히 필요한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설사 최초에는 실패에 가까운 결과가 나오더라도 관객들은 그동안 보아왔던 <살로메>와 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이런 시도를 통해 극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피터의 설명에 의하면 우리가 공연 예술분야에서 익숙한 공연 형태를 더 선호하는 이유는 그가 언급했던 "지적인 만족"  이 주요 원인이라고 하는데, 이 "지적인 만족"이란, 우리가 알고 있는 특정 공연을 감상하면서 그동안 알고 있던 내용(공연의 콘텐츠 자체 및 그것이 공연되는 방법)에 대한 재확인을 통해, 내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주변의 사람들에게 공유할 수 있다는 다시 말해 내가 지적이라는 사실을 자랑할 수 있다는 지적 허영심의 발로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공연 예술계에서는 그가 '죽은 공연'이라고 부르는 형태의 공연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게 된다는 것이죠. 


한동안 광풍처럼 몰아쳤던 한국의 뮤지컬들이 그 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품질향상을 이루어 내지 못하는 모습을 생각하면 그가 부르는 '죽은 공연'이라는 것이 좀 더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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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의 무대를 살펴보면, 마치 암벽과도 같은 비현실적인 성곽의 한가운데에 공작새의 화려한 꼬리가 할짝 펼쳐진 듯한 이미지는 세 명의 남성 캐릭터 (근위대장, 헤로데스 왕, 예언자 세례 요한)가 가지고 있는 차별화된 성적 요소들을 보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명의 남자 가수들의 목소리가 가지고 있는 캐릭터의 성격에서, 근육질의 남성성은  성적인 유혹에 전혀 무관심한 세례 요한에게 부여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어둡고 무거운 그리고 상당한 볼륨을 지닌) 살로메를 유혹하려는 남성들은 그 반대로 육체적인 남성성이 부족한 아주 말랑말랑한 목소리질을 가진 테너들이 부르고 있는 음악적 대비가 이 공작새의 꼬리를 통해 시각적으로 확인되는 무대입니다.


비난의 주요 대상이 된 머리에 쓰는 왕관 역시, 스스로가 가진 역할의 무게에 눌려 버리는 왕과 왕비의 극적 상황을 더 돋보이게 해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와서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했을 때, 통치자로서 왕이 가지는 무게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 그들의 요구를 거부하나, 자신의 욕정과 노욕에 사로잡혀서는 어린 의붓딸이 나신으로 춤추고 있는 모습에서는 굴복하고 있는 헤로데스 왕. 


그리고 의붓딸을 욕망의 눈으로 바라보는 자신의 남편을 향해, 딸을 지켜야 하는 엄마로서의 입장보다는, 자신의 불륜을 위해 남편을 살해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왕비의 존재감을 지키기 위해 오히려 딸과 함께 세례 요한의 처벌을 요구하고 있는 헤로디아스 왕비


이 두 캐릭터의 특징은 본질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외형이 주변에 의해 어떻게 인식될까를 신경 쓰는 전형적인 허영이 가득 찬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들의 머리 위에 높게 씌워진 왕관은 그런 극 중 캐릭터의 성격을 부각하는 중요한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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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로메>는 대중적인 인기도 꽤 높은 편이라 많은 공연이 이루어지고 있는 편인데, Luc Bondy가 연출했던 1992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프로덕션은 당시 지휘를 맡았던 도흐나니와 함께 런던의 코벤트가든 로열 오페라와 시카고 리릭 오페라 등에서도 공연이 열렸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시카고 공연을 직접 본 경험이 있는데, 당시 음악적으로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Bryn Terfel이  맡은 세례 요한 역할은 현재까지도 최고의 연주로 꼽히고 있으며,  Luc Bondy의 연출은 훨씬 음악적 요소에 집중할 수 있게 간결한 무대와 의상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InyoCPyFb0



다음은 방송용으로 제작된 동영상 버전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J1kHi1HjQE


위의 영상은 독일 오페라 작품들 연출로 유명한 Götz Friedrich의 프로덕션입니다.

연주는 칼 뵘 지휘의 빈필이 맡고 있으니 어디 한 군데 흠집 잡을 만한 곳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당시로는 상당히 음악적으로나 연출적인 완성도가 높다는 평가를 받았던 작품입니다.

현재 기준으로도 스트라타스의 차별적인 살로메는 압도적이라기보다는 세밀한 묘사가 뛰어난 아주 훌륭한 해석으로 여겨지는데, 단 연출은 무대용으로 제작된 것이 아닌 것을 감안하더라도 너무 복잡하고 부수적인 부분에서 화려함이 강조되어서 극에 대한 집중도를 떨어뜨리고 있는데 물론 이 영상을 처음 보았던 90년대 초반에는 감히 그런 생각조차 하기가 힘들었지만 확실히 연출은 시간의 무게를 느끼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이 외에도 음반으로 추천할 만한 연주는 세릴 스튜더와 브라이언 테어펠이 주연을 맡고 주세페 시노폴리가 지휘한 DG의 음반이 있습니다. 



영상에서 보시는 말피타노와 스트라타스는 목소리뿐 아니라, 연기도 돋보이는데, 최근에 해외 뉴스에서는 바그너 소프라노로 유명한 Deborah Voigt에 관한 평가도 상당히 좋은 편인데,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전형적인 바그너 가수였던 그녀의 이전 모습은 상당히 우람한 편이었는데, 2000년대 후반 시카고 리릭 오페라에 살로메로 등장하면서 이전과 비교해서 엄청나게 슬림(?)해진 외모로 변신을 했다고 하는데,

보통은 목소리에 손상이 갈 수 있다는 우려로 체중 조절에 부정적인 경우도 많지만, Voigt는 다행히 그런 문제 없이 변신에 성공해서 무대 위에서 살로메로서 이질감 없는 연기를 보여주며 인기가 급상승했다고 하네요.


오페라 관객들 역시 점점 더 극적인 요소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에 예전처럼 목소리만으로 오페라 무대에서 성공을 거두는 일은 점점 사라지고 있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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