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리움 미술관 전시를 통해 아주 친근해진 아니쉬 카푸어는 몇 년 전 '벤타 블랙'이라는 완전한 검은색 물감의 독점 사용권을 놓고 미술계에 재미있는 이슈를 만들어 냈습니다. 특정한 색을 한 예술가가 독점하는데 반대하는 한 미술가는 벤타 블랙에 버금가는 블랙을 만들었다며 kickstart를 통해 펀딩을 이어 가고 있는데요, 사실 지난번 블루 편에서 이브 클랭의 블루를 언급했었는데, 특정 색에 애정이 있는 작가가 새로운 색을 만들어 내고 자신만이 독점권을 가진 다는 것이 단순한 애호가인 저의 입장에서는 그리 나쁘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신만의 시각이나 고민 없이 유명한 작가가 사용하는 것을 따라 쓰려고 하는 미술계의 일부 모습이 더 문제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고, 아니쉬 카푸어에 반대한다며 끊임없이 그의 이름을 사용해 노이즈를 펼치는 모습도 좀 안타깝기도 하고요.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어디서 저런 상상력이 나올까입니다.
마치 외계에서 나타난 정체불명의 물체 같은 형태와 재질, 그리고 거대한 크기. 특히나 그의 공공 조각 작품들은 작품이 놓여야 하는 공간과의 조화나 균형을 고려한 느낌이 전혀 없고, 그 거대한 면적을 캔버스 삼아 아주 독특한 초현실적인 이미지를 펼쳐놓았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데요, 작품을 직접 보신 분들은 다 느끼셨겠지만, 그의 작품은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죠. 작품에 점차 다가갈 때마다 작품이 우리의 시선을 왜곡하고 비틀어버리는 느낌에서 완전히 압도당하게 되는데,
그렇지만 이상하게 우리가 바라보는 시선의 높이나 거리가 아닌 아주 원거리 또는 높은 위치에서 전체를 잡아낸 사진들을 통해서 보게 되는 이미지들은 그런 개인적인 시각과 반대로 이상하리만치 그의 작품을 담고 있는 공공 공간과 그의 설치물이 하나가 되어 있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위의 이미지 역시 그런 느낌을 강하게 주고 있죠.
시카고에서 있는 Bean이라고 불리는 그의 설치작품 <Cloud Gate>는 시간대에 따라 시카고의 다양한 모습을 담아내고 있었는데,
작가는 약 10년의 시간이 흐른 시점에서 작품 위에 그의 블랙을 다시 입히고 있습니다.
사진으로 보이는 이미지는 마치 사진에서 그 부분을 찢어 낸 것 같은 느낌 아닌가요?
작가 스스로 밝히고 있는 이야기는 "최초에는 놀이와 표면의 모양(곡면)이 만들어 내는 이미지의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이 만들어내는 '공(空)'을 통해 혼란에 빠져 스스로를 잃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기 성찰의 공간이 될 것이다"인데, 안타깝게도(작가가 느끼기에는 아마도) 자기 성찰보다는 자기-사진 (셀피)의 공간이 되고 있습니다.
폴란드 여류 작가인 막달라나 아브카노비츠 입니다. 섬유 아티스트인 그녀는 2차원적이던 섬유라는 소재를 3차원적인 조각의 형태로 확장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철제 골격 위에 다양한 실을 아무런 도구 없이 오로지 자신의 손을 이용해 작품을 완성해 나간다고 합니다.
그녀의 말을 빌자면 "나의 손을 통해서 나의 에너지가 전달된다"하며, 그런 과정에서 개념이 형상으로 바뀌어 나가며, 뭔가 무의식적인 생각들이 드러나게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Abakan Red>의 표면은 마치 거친 동물 가죽처럼 보이며, 전체 형상 역시 무언가 현실에는 없지만 상상 속의 동물을 연상케 합니다. 이런 연상들은 그래서 섬유라는 2차원적인 것에서 형태를 갖춘 3차원적인 조각으로 바뀌는 과정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Abakan이라는 것은 작가가 그녀의 성(Family Name)에서 딴 이름으로 작가의 상상 속 생명체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새롭게 업그레이드돼서 나타난 현대적 '프랑켄슈타인'의 형상화 같다는 느낌도 드네요.
신개념주의는 80년대 이후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 많이 등장하는 사조로서, 모더니즘의 형식 안에 특정 메시지를 담은 개념적 내용을 포함시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정치 시스템이나 정치적 개념이 점차 중요해지는 현재에 이르러, 전통적인 아트가 가지고 있는 기능 보다, 공공적 디스플레이 기능이 강조되는 이런 형식들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위에서 보여드린 4 작품이 잡지에서 선정한 것인데, 저에게 떠오르는 또 다른 Red를 대표하는 작품은 바로 박서보 선생의 작품입니다.
선생의 작품이 꼭 레드인 것은 아니지만 저에게는 레드 작품들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작가 자신은 "그림은 치유의 도구여야 한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비워낸 골들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입체적 색상이 신비한 느낌을 주며, 묘하게 가벼워짐을 느끼게 합니다.
똑같이 자신의 그림이 치유의 도구로 사용되었으면 했던 마크 로스코의 그림에서 만나게 되는 레드에서는 한 없이 내부로 침잠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지만 박서보 선생의 레드에서는 오히려 공기처럼 가벼워져 날아오를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되는데, 이는 아마도 무수히 많은 색들이 합쳐져 최종적인 색을 만들어 낸 로스코와 색이 가득한 곳에서 그 색들을 지속적으로 비워나가는 박서보 선생의 작업 방식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