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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수의 왕 Jan 12. 2019

타임머신을 타고 찾아간 인스타그램

런던 국립초상화박물관, 헨델

 인스타그램, 핀터레스트, 페이스북, 트위터, 스냅챗.....

 

 고독은 현대인을 정의하는 몇 가지 특징 중 하나입니다.  이에 대한 반동인지, 이제는 거꾸로 관계의 홍수 속에 갇혀 있는 기분입니다. 모두들 휴대폰을 들고 내가 모르는 누군가와도 쉽게 친구를 맺고 있습니다. 


이렇게 불특정 다수와 플랫폼을 통해 맺은 관계 속에서도 스스로를 돋보이게 만들고자 노력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일까요?  


 몇 해전 런던 여행 때 느꼈던 재미있는 경험에 얽힌 미술과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테이트 모던과 테이트 갤러리는 아트 여행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들러야 할 성지 같은 장소입니다. 

하지만 'National Portrait Gallery 국립 초상화 박물관'은 어떤가요?


학생 시절에 별 감흥없이 스치고 지나갔던 국립 초상화 박물관이었기에 큰 기대 없이 다시 찾게 되었는데,

박물관에 첫발을 디딘 순간 '띵'하고  문자 그대로 머리에 망치를 맞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런 게 초상화였구나라는 생각과 왜 여태껏 이걸 모르고 있었을까 하는 아쉬움은 금세 사라지고 저는 새로 발견한 신비의 세계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단순히 역사에 대한 지식이 이전보다 늘어서 더 관심이 생기고, 또는 복식에 대한 지식이 늘어서 재미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초상화 박물관에서 새로이 발견한 사실은 바로 '인간 본질'에 관한 문제들 이었습니다.


 연못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반해 결국 연못에 빠져 죽는 나르키소스 잘 아시죠? 바로 나르시시즘의 어원이 되는 그리스 신화인데요, 아마도 많은 분들이 저와 가티 최근 sns의 열풍 안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나르시시즘이 어느 정도 작용을 하고 있다고 보고 계실겁니다. 병적인 수준은 당연히 아니겠지만, 우리 모두는 적당한 정도의 자기 잘난 맛으로 살고 있는 걸 테니까요? 


 그런데 이 나르시시즘의 심리학적 원인이,  '자기애'가 아닌 '자기혐오'라는 사실도 혹시 알고 계셨나요? 그러니까, 우리는 나의 장점을 사랑해서 자기애에 빠지는 것이 아니고, 자기혐오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원하는 모습의 '페르소나'를 만들어 내고, 그것에 집착하는 것이 바로 나르시시즘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제가 왜 sns의 근저에 나르시시즘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지 이해가 되실 겁니다. 


 진정한 '참나'를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고, 내가 원하는 나의 이상적인 '페르소나'를 보여 주고 싶었던 심리, 이런 것들이 sns의 열풍 밑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방문했던 초상화 박물관에서 제가 찾은 것은 바로 '거울'이었습니다. 우리의 환상과 허영을 비쳐주는  상상의 거울, 그러니까  연못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사랑한 나르키소스의 후예들인 우리들의 머릿속에 존재하고 있던 '연못'의 실체였던 거죠. 



  과거에 자신의 초상화를 또는 자신의 가족들 초상화를 그릴 수 있었던 위치의 사람들은 많은 부를 가진 귀족이나 성공한 상인들이었을 것입니다. 누구보다 자기애가 강했을 거라 생각되는 이 사람들이 당시 최고의 화가들을 고용해서 그린 그림은 바로 자신들이 사랑하는 '자신의 페르소나'이지 결코 자신이 보이는 모습 그대로를 그린 즉 진실된 외양은 아니었을 겁니다.



 '초상화 박물관'의 모든 작품들은 그 날 그 순간의 저에게는, 얼짱 각도로 찍어서 골라 모은 예쁜 사진들,  멋진 공간에서 만들어 내는 인생 샷, 이런 것들이 가득 차 있는 sns와 완전히 싱크로율 100% 였습니다.


 얼마 전 읽은 그리스 시인의 글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그 오래된 거울은 자랑스럽게 스스로를 맞아들였다. 

            잠시 동안 완전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누구인지 미처 기록해 놓지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중요한 건 저는 이 시인의 글에서 나르시시즘의 원형을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나의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거울을 바라봅니다. 그런 우리의 노력에 거울은 나의 진정한 모습이 아닌, 내가 원하는 모습인 나의 '페르소나'를 비춰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백설공주에 나오는 마술 거울은 대단한 풍자인 것 같습니다. 거울이 말을 했을까요?  아니면 자기보다 예뻐 보이는 백설공주를 없애고 싶은 왕비의 귀에만 들리는 환청이었을까요? 거울 앞에선 당신에게는 이런 환청이 들린 적은 없으셨나요? 



 이렇게 초상화에 대한 생각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마음속을 파고드는 궁금함이 있었습니다.


 음악에는 초상화 같은 것이 없었을까?


 머리에 처음으로 떠오르는 건 바로 '헨델'이었습니다. 마침 런던에 있었던 탓인지, 영국 왕실 음악가로 자리를 옮기며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헨델은 제목부터 초상화적인 연관성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왕궁의 불꽃놀이' '수상음악(왕국이란 단어가 빠져 있지만 제임스 1세의 테임즈강 유희를 위해 작곡된) 들은 헨델을 고용한 제임스 1세의 성공 이미지를 시각이 아닌 청각으로 표현한 일종의 초상화가 아니었을까요?


https://youtu.be/fNqJ8mED1VE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작곡가가 위대한 위인의 음악적 초상화를 만들고자 했던 노력들도 있었죠.

베토벤의 3번 교향곡은 나폴레옹에게 헌정하려고 했던 유명한 일화가 남겨져 있습니다.  고전주의 음악의 한계에 도전해서 새로운 지평을 열고자 했던 3번 교향곡은 당시까지 교향곡을 작곡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음악적 형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시작한 그래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브리지 역할을 했던 작품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교향곡은 구체제를 뒤엎고 새로운 사회로의 문을 열고자 했던 나폴레옹의 음악적 초상화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끝내 스스로 황제가 되고만 인간의 모습에 실망한 작곡자는 나폴레옹이 이 3번 교향곡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결국 교향곡은 "Eroica 영웅"이라는 부제를 갖게 됩니다. 


https://youtu.be/N8jP3o22HGw


 


 이렇게 보면 현대 우리들이 빠져들고 있는 sns의 본질에는 인류의  역사 속에 등장하는 위대한 창작물들로부터 발견할 수 있는 인간의 근원적인 자기애와 자기혐오라는  문화의 원형(原型)이 녹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이런 발견은 데이비드 호크니를 다시 보는데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날 이후 호크니의 캘리포니아 시리즈들은 '위대한 개츠비'를 꿈꿔왔던 내 안에 존재하는 허영과 물욕의 '페르소나'를 보여주는 커다란 연못 같은 수영장(거울)으로 해석되기 시작했고,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또 다른 거울들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새로운 거울 찾기 여정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되어주었습니다.

Portrait Of An Artist (Pool With Two Figures), 1972.
위대한 개츠비 영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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