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훈수의 왕 Jun 01. 2020

렌즈 너머로 바라 본 다양한 초상

애니 리버비츠, 메리 엘런 마크, 벤자민 맥마흔, 지오르다노


수많은 스타들을 자신의 렌즈속에 담아낸 이 사진작가는 다음과 같은 말로 스스로가 생각하는 초상화 작업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When I say I want to photograph someone, what it really means is that I'd like to know them. Anyone I know I photograph.”


바로 미국의 유명한 여류 사진작가 애니 리버비츠 입니다.


존 레논이 암살되기 직전 마지막으로 남긴 사진 역시 그녀의 작품이었죠.



그녀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각각의 사진들이 담고 있는 특유의 다양한 색감에 마음이 녹아드는 느낌입니다.

위의 5점을 보면 사진이 가지고 있는 색의 주조가 전부 다른데, 그 느낌은 주인공들의 개성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믿어집니다.


애니 레이보비츠와 비슷한 시기 미국에 또 다른 여성 사진작가가 있습니다. 애니 레이보비츠처럼 초상화 작업을 주로 했던 작가인데, 그 결이 완전 반대입니다.


애니 레이보비츠가 주류의 흐름에 속해있는 셀럽들을 주로 촬영했다면, 메리 엘런 마크는 주류에서 벗어난 인물들을 주로 렌즈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 작가는 이런 말을 남기고 있는데요,

“In a portrait, you always leave part of yourself behind." 


<해리 포터>에 등장하는 '볼드모트'가 영원한 삶을 위해 자신의 영혼을 조각내 여기 저기 숨겨두었다는 스토리가 갑자기 떠오릅니다. 


메리 엘런 마크가 자신의 영생을 위해 자신의 일부를 사진에 남기는 것은 아닐텐데, 과연 그녀의 어떤 감정들이 또는 어떤 생각들이 그녀의 작품에 남겨지고 있는 것일까요?





<Ways of Seeing>을 쓴 존 버거는 자신의 글 중에서 어떤 사진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사진작가와 모델과의 관계에 있어서 신뢰가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한적이 있습니다.


애니 리버비츠의 사진에 등장하는 셀럽들은 허상속에 둘어쌓여진 자신들의 꺼풀을 벗겨내고 좀더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습을 진정으로 이해시키는 것이 무척 중요할테고,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의 본 모습을 이해하고 싶었던 애니 리버비츠는 이들에게 가장 적합한 사진작가였을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세상의 누구도 나의 사진을 보고 싶어하지 않을텐데 라는 생각을 갖고 있을 법한 이 비주류인 거리의 존재들은 누군가가 자신에게 렌즈를 들이데는 것에 무척 방어적 이리라는 상상을 하는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닌데요, 오히려 이들에게 렌즈를 들이데며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많은 신뢰를 얻어야만 가능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이 미치고 나니, 메리 앨런 마크가 이 사진들에 남긴 모습은 다름아닌 그녀가 자신의 대상들로부터 획득한 인간적인 신뢰가 아닐까 싶습니다.


누군가를 찍는 다는 행위에 이처럼 다양한 생각들이 묶여 있다는 사실이 참 신기할 따름입니다.






요즘 현 세대는 점차 누군가를 찍는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찍는 일에 훨씬 더 익숙해져 있는 것 같은데요,

이런 새로운 세상의 흐름에 맞춰 스타들의 셀피 작품집이 나왔습니다.


영국의 사진작가 Benjamin McMahon의 <Not myself> 라는 사진집은 스타들이 거울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직접 카메라로 담은 일종의 셀피(셀카) 모음입니다.


물론 자신의 셀피를 찍은 스타들과 맥마흔이 어떤 장소에서 어떻게 찍을 것인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논의를 하고, 다양한 시도를 통해서 얻은 결과물이라고 합니다. 스타들이 들고 찍은 카메라는 아이폰의 카메라처럼 그저 들고 찍으면 되는 사진기가 아니라, 맥마흔의 수동 라이카 카메라이기에  그들은 사전에 완벽하게 세팅을 준비하고 마치 영화나 연극 속에서 연기를 하듯 완벽하게 짜여진 각본대로 사진 촬영에 임해야 했다고 하는데요






이렇게 자신의 셀피를 찍고 있는 스스로에게 "나는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했을때 과연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Portrait를 얼마나 자신있게 찍을 수 있을까요?


 



이 사진들을 보고 있노라니 또다시 꼬리에 꼬리를 물고 호기심이 생겨납니다. 음악에는 이런 Portrait같은 작품이 있을까 하는 의문인데요, 생각보다 쉽게 떠오르지 않네요.


일감으로 떠오르는 작품은 Giordano의 오페라 <Andrea Chenier> 가 있는데요,   프랑스 혁명시기에 실제로 존재했던 시인 'Andre Chenier'를 주인공으로 해서 만들어진 오페라 입니다. 

전체 오페라가 상연되는 것은 그리 흔치 않고, 유명한 테너 아리아들이 독주회 등에서 자주 불리고 있습니다.


유명한 Three Tenor Concert에서도 Jose Carreras가 자신의 특기중에 하나인

 "Un dì all'azzurro spazio" (언젠가 푸른 하늘 아래에서)를 부르고 있습니다.


오페라 1막에서 시인 세니에는 사랑에 대한 시를 읇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사랑의 노래를 시작하다가 가난한 사람들도 모두 평등하게 살게 되는 그날이 오리라는 내용의 아리아를 부르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yBw9kMR7bc



또 다른 유명한 아리아는 4막에 처형되기 전 주인공 세니에가 마지막으로 쓴 시를 비창한 감정으로 노래 부르는 곡입니다.


"Come un bel di di maggio" (5월의 아름다운 날처럼)

https://www.youtube.com/watch?v=Q1GRHSTjSYk



유시 비올링은 왠지 모르게 호세 카레라스를 떠오르게 합니다.

두 테너의 목소리가 애수가 젖어있다는 공통점 때문일까요?



무소르그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 나 <호반시치나>등과 같은 작품도 있지만 누군가의 초상을 그린다는 느낌 보다는 역사나 전설을 살려내는 느낌이라 좀 결이 다른 듯 하네요.


미술과 음악은 어떤 경우에는 많은 것을 공유하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이렇듯 현실에 관여하게 되는 특정 문제에 관해서는 서로 완전히 다른 방향을 선택하는 것 같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현재와 과거가 함께하는 찰나의 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