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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수의 왕 May 31. 2020

현재와 과거가 함께하는 찰나의 순간,

Peter Liversidge, Jeff Wall, Haydn 

"현재"라는 것을 정확하게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요?


바로 이순간이 현재일까요? 우리가 이 말을 하는 동안, 또는 이 생각을 하는 동안 '이 순간'은 흘러간 과거가 되며, 매 순간 우리의 미래가 바로 현재가 되고 있습니다.


<BEFORE/AFTER> by PETER LIVERSIDGE


Peter Liversidge의 이 '발칙'(??)한 작품이 '현재'가 가지고 있는 시간에 대한 컨셉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위에 보이는 설치물은 무작위적으로 Before 또는 After에 불이 들어오게 합니다. 그 주기나 또는 불이 켜지는 시간은 전혀 예측 불가능입니다. 하지만 절대 동시에 불이 들어 올수는 없습니다. 


물리적 시간에 있어서 Now란 것은 실체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일테니까요. Now를 인지하는 바로 그 순간 Now는 이미 과거(Before) 과 되어 버리고 말것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시간을 바라본다면, 시간의 정체는 상당히 불분명하고, 연기처럼 사라지는 여린 존재이며, 불확실성을 가지고 있는,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그렇기에 개념속에만 존재하는 명제가 되어 버립니다.


이 작품은 또한 현재라는 개념이 Before의 다음에 와야하는 것인지, 또는 After의 전에 와야하는지 같은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누가 물어봤어? 누가 알고 싶데?" 라고 무시할 수도 있었을텐데, 한번 눈에 들어오고 난 다음에는(이성적으로 인지가 된 후에는) 너무 늦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 작품이 던져주는 잔상들은 쉽게 무시할수 없습니다.



he Destroyed Room (1978), Transparency in lightbox 159 x 234 cm


Search of Premises, 2009. Lightjet print, 192.3 x 263 cm


위의 두 작품은 Jeff Wall이라는 캐나다 출신의 사진작가이자 미술평론가의 작품입니다.

그는 "A picture is something that makes invisibe its before and after." 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남긴 이 작품들은 순수한 Now를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요?



 


위의 이미지는 영국의 터너상 수상 아티스트이자 영화감독인 Steve Mcqueen의 작품입니다.


이상하게도 색이 바랜듯, 해상도가 떨어지는 느낌인데 왜 일까요?

이 사진 작품은 애초에 사진으로 찍은 것이 아닙니다. 스티브 맥퀸 감독이 작업한 일련의 다큐멘터리 동영상에서 추출된 이미지 입니다.


그렇다면 그야말로 순간을 포착한 것이라고 할수 있을텐데, 만약 진정한 순간을 포착한 것이라면, 과연 우리는 이 순간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이 동영상의 주인공들이 동영상 속에서 어떤 스토리들을 갖게 되는지 전체 영상에서 이 장면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이런 것들을 진정한 순간에서 알아 낼 수 있는 것일지? 그렇지 못하다면 왜 순간이 중요한 것인지.


오랜 시간동안 이 찰나의 재현은 미술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진기가 등장한 이후 많은 이들은 이 혁신적인 기술이 이런 찰나의 재현을 완벽하게 이루어 낼 것이라고 믿었었고요.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사진기의 등장은 사실 찰나의 완벽한 재현이 아니라 동일한 이미지의 무한한 재생에 있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이 찰나의 재현은 사진기가 아니라 회화가 완성해 내고 있지요.


폴 세잔은 회화는 그림을 그리는 동안 이미 지나가버린,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순간을 잡는 것이라고 믿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데이비드 호크니와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기존에 찎은 사진을 바탕으로 회화 작업을 한 유명한 작가들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그들의 작업에 바탕이 되는 사진의 출처에 대해 분명한 인지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그 위대한 작업들을 이루어 냅니다.


호크니와 리히터는 서로 다른 언어로 유사한 개념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데, 그들의 주장은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진이 찍힌 순간과 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작가가 포착하는 장면 사이에는 미세한 간극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간극에 대한 보이지 않는 순간들을 그들의 위대한 회화에서 재현해 내고 있습니다.



호크니의 유명한 <큰 풍덩> 입니다. 수영장에 풍덩하는 물이 튀는 장면을 만든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호크니는 "나도 잘 모른다. 그냥 사진을 보고 그렸을 뿐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하는데, 하지만 이 물이 튀는 장면에 그는 몇 주의 시간을 들여 세부를 묘사하는데 열중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왜일까요?


다시 폴 세잔으로 잠깐 돌아가 보면, “미술은 개인적인 통각이며, 자신이 이해한 것을 그림에 구성하여 그려 넣을 수 있어야 한다.” 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다시 말해 사진에서 보여지는 순간이 가지고 있는 시각적 의미는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바에 의하면 사진기로는 그 진정한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세잔의 주장처럼 그것에 관한 작가의 이해, 즉 어떤 특정 시점 또는 사건을 중심으로 Before와 After에 대한 작가의 이해가 드러나는 것이 바로 회화일 것입니다.  


호크니의 작품을 예로 생각해 본다면, 결론적으로 물보라를 만드는 시간 선상 위에 그 물보라를 만드는 사람의 순간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점 사이에 발생하는 미세한 시간 차이동안 그들 각자의 머릿속으로 흘러간 생각들은 과연 그 시간점을 둘러싼 그들의 관계속에 공유가 가능한 감정이나 이미지였을까요 아니면 각자만의 순간이었을까요. 


호크니가 자신의 그림에서 드러내려고 한 것은, 그래서 그토록 정성을 쏟았던 바로 그 지점은 바로 이렇게 그 순간을 둘러싼 다양한 관계에 대한 작가의 해석의 시작이 되는 순간이기 때문일것 입니다.

현실에서는 절대 존재할 수 없는, 우리가 찾으려고 하는 순간, Before 혹은 After가 되어버리고 마는 시간의 특성이 작가의 손을 통해 작품으로 완성이 되면서 우리는 그 아날로그적인 생각의 연속을 읽어 낼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진과 회화의 큰 차이가 아닐까요?


그렇기에 사진이 순간을 포착하는 예술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큰 허상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진의 본질은 시간적인 개념이 아니라, 공간적인 개념일 수도 있습니다. 빛의 다양한 특징을 바로 그 빛이 존재하는 특정한 공간속에서 어떤 형태로 드러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사진이 아닐까요?


 


유명한 배병우 작가의 소나무 시리즈 중 하나 입니다.


이 사진에서 과연 사진을 찍은 그 순간이 중요할까요?

아니면 작가가 하염없이 기다렸던 어느 순간을 만들어 내는 빛과 그 빛을 담고 있는 바로 그 공간이 더 중요한 것일까요?


미술에 있어서 시간들 즉 현재의 순간과 그 전후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는데, 그렇다면 음악에 나타난 시간들은 어떤것들이 있을까요?


음악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선율에 시간의 느낌이나 개념을 도입한 작품들이 있고,

시간을 등장시킨 가사를 이용한 성악곡들이 있는데요, 


먼저 16세기 영국의 르네상스 작곡가인 John Dowland의 <Time stands still> 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rVKg2csHSc 



Time stands still with gazing on her face,

stand still and gaze for minutes, houres and yeares, to her give place:

All other things shall change, but shee remaines the same,

till heavens changed have their course & time hath lost his name.

Cupid doth hover up and downe blinded with her faire eyes,

and fortune captive at her feete contem’d and conquerd lies.



When fortune, love, and time attend on

Her with my fortunes, love, and time, I honour will alone,

If bloudlesse envie say, dutie hath no desert.

Dutie replies that envie knowes her selfe his faithfull heart,

My setled vowes and spotlesse faith no fortune can remove,

Courage shall shew my inward faith, and faith shall trie my love.


아주 달달한 노래인데, 우리가 기대했던 시간의 개념과는 달리 또다른 일상의 시간들이 의미하는 바를 보여주는 독특한 르네상스 Lute song 입니다.


음악은 미술과는 달리 시간과 아주 직접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시간을 기본으로 한 박자와 템포가 바로 그것인데요


베토벤의 <교향곡 8번> 2악장의 도입부를 들어보시죠.


https://www.youtube.com/watch?v=dRA1aQTHRYw


뭔가 시계의 추가 틱톡거리는 느낌이 들지 않으세요?

베토벤은 당시 새로 등장한 메트로놈이란 박자를 맞춰주는 기계에 대한 재미있는 풍자를 그의 교향곡에 집어 넣었습니다. 이 2악장의 도입부의 틱톡거리는 움직임은 메트로놈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하네요.

(아마도 다음 작품에서 힌트를 얻었으리라 추측되는데요)


그렇죠, 물론 "시계"라고 불리는 하이든의 <교향곡 101번>을 빼놓을수는 없겠네요.

이 교향곡의 2악장에 나오는 클래식한 벽시계의 움직임을 한번 들어보시죠.


https://www.youtube.com/watch?v=wQekgDQqSsM


  

이렇듯 동일한 시간이란 개념에 대해서도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는 의견이 많이 달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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