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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수의 왕 Aug 10. 2020

우연히 마주친 사유의 순간

베토벤, 이명호

우리 삶의 많은 우연들이 겹쳐지며 각 개인의 인격과 그들을 둘러싼 관계들이 형성되는 모습을 묘사하는 과정을 발견하는 것은 밀란 쿤데라의 글을 읽다가 만나게 되는 놀라움 중에 하나입니다. 아마도 그의 이런 개인의 삶에 대한 깊은 사유가 그를 철학하는 소설가라고 부르게 되는 이유 중에 하나일 텐데요(본인의 강한 부정에도 불구하고) 밀란 쿤데라의 글은 예술에 대한 이해의 근거들을 발견하게 되는 보물창고이기도 합니다. 


현대 미술과 고전 음악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과 통찰력은 읽을수록 새로움을 발견하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뭔가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는 확신이 있는 방향으로만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의 길을 걷는 경우가 더 많아 보이기도 하죠. 자연과 환경을 지키고 아껴야 우리의 후손들까지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지만, 우리는 그런 이익을 배반하고(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이익) 눈 앞에 있는 사소한 이득에 집착하는 경향이 훨씬 더 크지 않나요? 


핑계가 길어졌는데, 이렇듯 많은 위대한 작가들의 글을 읽는 것이 개인에게 돌아오는 이익(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진정한 그리고 근본적인)이 크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가시간에 불필요한 뉴스나 잡담에 집착을 하게 되는 스스로를 보면 내가 얼마나 나에게 득이 되는 것을 멀리하려는지 깨닫게 됩니다.


하여튼 무더위와 끝없이 내리는 장마 빗속에서 갑자기 생각이 번쩍 들었는지 우연히 책장에서 밀란 쿤데라의  <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옵니다.


오랜만에 나를 이해하는 진정한 벗을 만난 것처럼 그의 글을 읽다 보니 얼굴에 웃음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데 갑자기 어느 한 대목에서 여러 가지 이미지들이 꼬리를 물며 머릿속으로 몰려 들어옵니다.


책의 6부에서 밀란 쿤데라는 그의 어린 시절 그에게 작곡을 가르쳐준 선생님과의 일화를 짤막하게 소개하고 있는데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도 그의 기억에 남아 있다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베토벤에게는 놀라울 만치 약한 이행부들이 많아. 하지만 센 이행부들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약한 이행부들이야. 이는 마치 잔디밭과 같은데, 이 잔디밭이 없으면 우리는 그 위로 솟아나는 아름다운 나무에게서 즐거움을 느낄 수가 없을 거야"


이 이야기를 읽는 순간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명호 작가의 사진들이 떠오릅니다.




오래전 캐논 매거진에서 작가와 인터뷰했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었는데




Q. 첫 번째 시리즈가 <나무 시리즈>였어요. 다양한 피사체가 중 나무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제 프로젝트의 이름이 <사진행위 프로젝트>잖아요.


‘사진’과 ‘행위’가 붙었다는 데에 주목해야 합니다.


즉, 제 행위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기에 피사체의 어떤 코드가 너무 강한 건 적절치 않았죠.


그게 너무 강하면, 정작 제가 하는 행위는 뒤로 물러나고 그 의미만 부각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피사체는 사소하거나 흔히 만날 수 있는 소재가 필요했는데,


딱 어울리는 것이 우리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그 가치를 잊고 사는 '나무'가 떠오르더라고요.




작가의 이야기처럼 의외로 우리는 우리 주변의 많은 사물들에 대해 그것들이 지니고 있는 진정한 가치를 잊고 사는 것들이 많죠. 그런데 그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서 '센 이행부'만이 연속된다면 그 또한 그 가치를 판별하기 힘들게 할 뿐입니다. 


작가는 그렇게 조용히 하나의 천을 나무 뒤에 세우는 행위를 통해 나무가 가지고 있는 가치를 세상에 드러나게 하고 있습니다.


이 사진들은 또 저에게 프루스트의 마들렌처럼 이런 사진들을 기억 속에서 소환시키고 있습니다.


 


이태리의 명품 가구 브랜드 B&B Italia의 가구 광고들인데요, 뒷면에 내려진 배경으로 사용된 막들이 이명호 작가의 사진에서 캔버스 역할을 하는 배경처럼 느껴져서 일까요?


이 명품 브랜드는 이 광고 바로 이전 캠페인에서는 아래와 같은 이미지들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위의 장막 앞에 내세워진 소파들의 이미지와 세팅된 실내에 글래머러스한 모델들과 같이 놓인 소파 사이에서 어떤 차이가 느껴지세요?


밀란 쿤데라의 책에서 언급한 약한 이행부와 센 이행부의 의미 차이가 느껴지지는 않은가요?


아래의 광고 이미지들은 최고의 부와 명예 그리고 이런 것들로부터 자연스럽게 파생되어 나오는 화려함, 높은 권위들이 자연스럽게 연상되고 있습니다. 광고의 배경들도 아주 높은 곳에 위치한 공간임을 암시하고 있고, 그 높은 곳에 올라서고 싶은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센 이행부만 남겨진다면 우리 삶의 진솔한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겠죠.


2007년과 2008년 미국과 유럽을 휩쓸었던 금융위기 전의 세상의 모습은 이렇듯 서로 누가 더 센 이행부들을 보여주는가의 경쟁이었던 것이라면 금융위기가 지나간 후 세상의 사람들이 우연히 마주하게 된 사유들은 이런 꾸며진 환상과 허상들이 아닌, 진정한 나의 가치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우연히 바뀌게 된 세상의 생각에 맞춰 광고가 변하게 된 것이죠.



 우리 스스로가 각자의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우리는 가려진 내면의 진정한 가치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패션이나 가구 역시 마찬가지로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내가 그들의 한 부속이 되어서는 안 될진대, 우리는 우리에 대한 많은 것을 잃고 살아왔던 것은 아닐까요?


밀란 쿤데라가 추천한 베토벤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 <No. 32  op.111>을 들으며 숨겨진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게 해주는 센 이행부들 사이의 약한 이행부가 무엇인지 한번 찾아보시죠.


https://www.youtube.com/watch?v=1ljq4MwzA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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