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편에 걸쳐 지휘자들이 뽑은 스스로에게 영감을 주는 지휘자들 1위에서 3위까지 순위에 오른 지휘자들이 누구인지 알아보았는데, 이제 리스트의 나머지 순위를 차지한 16명의 지휘자들을 몇 편에 나눠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4. Herbert von Karajan
4번째 자리에는 Karajan이 올랐습니다. 클래식 음악팬 사이에서 호불호가 아주 심한 지휘자 중에 한 명이라고 생각되는데요, 어쨌거나 그가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에 기여한 공로는 영원히 기록될 것입니다.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의 변화 과정에서 클래식 음악계를 대표하며 그 시작점을 열었고, 많은 유명 오케스트라들이 자신의 본거지를 떠나서 전 세계 각지로 활발한 투어를 다니게 되고, 또한 많은 녹음을 남기기 시작한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 시대를 연 선구자이자 개척자가 아닐까 싶은데요, 오스트리아 출신이면서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를 오랜 기간 지내며 독일 음악계를 지배해온 독재자적 행태가 그에 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
워낙 많은 음반을 남기고 있기에 몇 편의 명반을 꼽기가 쉽지 않은 탓에 제 주관적인 기준으로 추천을 해드리면
1) R.Strauss <Four Last Songs>
1974년 소프라노 군둘라 야노비츠와 함께 녹음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네 개의 마지막 노래>는 최전성기를 지나는 야노비츠의 맑게 빛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명연주입니다. 풍부하고 세련된 음악적 흐름을 만들어 내는 것은 카라얀의 가장 주특기인데, 이 곡에서 그의 장점과 야노비츠의 목소리가 아주 잘 어울리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NdPoigJ_qw
2) Tchaikovsky <Piano Concerto No.1>
https://www.youtube.com/watch?v=xLaGhz4g2Mo
1962년에 녹음된 이 피아노 협주곡은 지난 세기의 대가들이 가진 장점을 발견할 수 있는 명반인데요, 약간은 거칠고 격정적인 스타일의 S.Richter와 화려한 음색과 세련된 연주가 특징인 카라얀이 어떻게 화합을 이루어 나가고 있는가를 확인하며 들어보시면 흥미진진하리라 생각됩니다. 독주자가 리더십을 가지고 나가는 아바도 아르헤리치 조합과 비교해서 들어보시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3) Puccini <Turandot>
https://www.youtube.com/watch?v=3t1UhhfuXnY
사실 호평보다는 혹평이 훨씬 많았던 녹음인 것 같은데, 1986년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방한했던 영국의 로열 오페라 하우스 내한 공연 프로그램이 <투란도트>였던지라 당시 DG의 한국 총판(?) 격이었던 성음사에서 부랴부랴 LP로 발매했던 음반으로 기억합니다.
혹평이 많았던 주된 이유로는 투란도트에 캐스팅된 카티아 리차렐리 때문일 텐데요, 이 음반 녹음 전에 이미 서정적인 <투란도트>를 선보이고 싶다며 리차렐리와 카레라스를 매칭 시켜 빈국립오페라 공연을 강행했던 사례도 있지만 리코딩을 위해서는 칼라프 역에 도밍고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물론 전통적인 관점으로 보면 투란도트를 부르기에 카티아 리차렐리는 성량이나 목소리의 성격이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오케스트라를 중심으로 오페라의 서사를 촘촘히 완성시켜나가는 카라얀의 솜씨는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1막의 "Non Piangere, Liu"부터 1막의 막이 내리는 순간까지 도밍고가 보여주는 영웅적인 중고음 프레이즈들의 처리와 긴장감 넘치는 카라얀의 지휘는 어느 <투란도트> 레코딩보다도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5. Nikolaus Harnoncourt
바로크 스페셜리스트로 지휘 커리어를 만들어 온 오스트리아 출신의 아르농쿠르는 이제는 더 이상 특정 장르의 전문가로 분류되지는 않는 모습입니다. 물론 음반사에 가장 큰 공헌을 남기고 있는 작품은 구스타프 레온하르트와 함께 완성한 바흐 칸타타 전곡 녹음이지만 최근에는 브람스 브르크너 등에도 좋은 평을 받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템포에 불만이 있는 편이다 보니, 그의 연주에 유연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런 그의 개성을 투명하다고 해석하는 비평가들도 많이 볼 수 있는데 아르농쿠르 지휘의 베를린 필이 연주하는 브람스 <교향곡 4번 1악장>과 카를로스 클라이버 지휘의 바이에른 국립오케스트라 연주를 한번 비교해서 들어 보시죠.
https://www.youtube.com/watch?v=G3esEj72CU0
https://www.youtube.com/watch?v=t_L8BajLmtE
전체적인 곡 진행에 있어 클라이버가 훨씬 유연하고 합리적인 흐름을 보여주는 것에 반해 아르농쿠르는 오케스트라의 연주상 세부적인 다이내믹을 조였다 풀었다 하는 디테일에 좀 더 신경을 쓰는 것으로 저에게는 보입니다.
6. Simon Rattle
많은 분들에게는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로 기억될 지휘자이지만 사이먼 래틀의 업적을 꼽으라고 하면 저는 음악계의 변방에 위치했던 젊은 시티 오브 버밍엄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10여 년에 걸쳐 전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이 가장 크지 않나 싶습니다.
젊은 지휘자와 젊은 오케스트라가 만들어 내는 최고의 말러 사운드로 당시 음악계를 놀라게 했던 wonder boy에서 이제는 세계 최고의 거장으로 성장한 사이먼 래틀은 동일한 방식으로 지휘자들이 재투표를 실시한다면 아마도 빅 3안에 포함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말러를 통해 음악계에 충격을 불어넣었지만 제 기준으로 사이먼 래틀의 가장 장기는 드뷔시와 스트라빈스키 등 20세기 초반의 새로운 음악들 아닐까 싶습니다. 심지어 바그너마저도 완전한 해체와 재구성을 통해 전통과 다른 그 만의 음악으로 재 창조해내곤 하는데, 베토벤 바그너 브르크너 등의 음악에서는 그의 개성이 음악과 겉돌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드뷔시에서는 정말 완벽하다는 생각입니다.
음악에 깊숙하게 감정이입이 되게 만든다든지 또는 어떤 선동적인 흐름으로 끌고 나가는 스타일에는 적합하지 않고 다양한 소리와 악기들이 복잡한 리듬 속에서 교차하는 과정을 가장 명확하게 구분하고 그것이 지닌 음악성을 적절하게 전달하는 능력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가 지휘한 LSO의 <봄의 제전>을 통해서 한번 느껴 보시죠.
https://www.youtube.com/watch?v=EkwqPJZe8ms
드뷔시의 <펠리아스와 멜리장드>는 중성적인 멜리장드를 중심으로 드뷔시 음악의 유연한 흐름을 부각하는 아바도의 해석과는 달리 캐릭터별 음악의 대비가 훨씬 또렷하게 드러나는 명연주입니다. 베를린 필의 디지털 콘서트홀이나 IDAGIO에서 전곡을 들어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Y9vA_oz_ak
7. Wilhelm Furtwängler
이제는 전설로만 남은 20세기의 위대한 지휘자 푸르트벵글러가 7위에 꼽혔습니다. 음반 평론가나 음악 애호가들이 아닌 현역 지휘자의 선택에서도 7위에 올랐다는 점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현역 음악가라면 그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지휘자를 뽑기가 더 쉬울 것 같은데 말이죠.
스튜디오에서 제대로 이루어진 녹음을 통한 음반들보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감행한 연주들을 실황 녹음이라는 타이틀 아래 음반으로 발매하는 일이 많다 보니 음질로 인해 막상 들어보면 이건 뭐지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51년 바이로이트 실황인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이나 52년 런던 Abbey Road에서 녹음된 EMI 판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들어보시면 왜 그가 전설이 되었는지 이해하는데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HDXdbSWu0E
4악장에서 보여주는 푸르트벵글러의 지휘는 니체가 의미하는 음악에 있어서 디오니소스적인 핵심이 무엇인가를 느끼게 해주고 있습니다.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 들지 않으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gGAKgoclJ6A
베토벤 교향곡을 좋아하시는 팬이시라면 푸르트벵글러와 베를린 필이 남기고 있는 다양한 베토벤 실황 연주 음반들을 비교하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조악한 음질을 참아낼 수 있다면 말이죠)
순위표를 보다 보니 참 대단한 지휘자들이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7명을 살펴보았는데 도대체 그 많은 뛰어난 지휘자 중에 20명을 추려낸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이 7명 뒤로는 어떤 지휘자들이 있을지 다음 편에서 확인해 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