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황당한 세르반테스 읽기
요즘, 넷플릭스 보는 재미에 푹 빠져 있습니다.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보고 있는데, '얼터드 카본'을 이제 막 끝내서, 뭔가 재미있는 게 없을까 찾다가, '반지의 제왕'이 눈에 띄었습니다.
오랜만에 한번 볼까 하고 고민을 하던 차에, 묘한 생각이 떠 올랐습니다. 이 기나긴 대서사 판타지의 시작이 두 남자의 집 떠나는 얘기였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프로도'와 '샘'이 길 떠나는 얘기이죠. 현실성이 좀 떨어지고, 그렇게 똑똑해 보이지도 않는 마스터와 따라나서는 이유에 대한 논리성이 좀 떨어져 보이는 이 듀엣을 보고 있노라니, 뭔가가 연상되기 시작합니다. 돈키호테와 산초 커플이 프로도 샘 커플과 너무나도 비슷하지 않나요?
길을 떠나는 두 사내, 두 명의 시종은 어찌나 먹는 것에 집착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또 주인공들의 임무는 얼마나 황당하던지.
사실 길을 떠나는 것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냥 여행을 떠나는 게 아니라, 뭔가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것은 더욱이나 쉬운 선택이 아닙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프로도와 돈키호테에게는 공통된 배경이 있습니다. 두 명에게 있어 세상의 중심이 되는 무언가가 바뀌는 상황이 온 겁니다. 프로도에게는 반지를 없애지 않으면 세상이 악의 소굴로 들어가 내가 사는 고향이 사라진다는 두려움이 있고, 돈키호테에게는 기사도가 중심이었던, 자기가 아름답다고 믿었던 '이상'이 중세의 종말과 함께 새로운 사상으로 대체되기 시작한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돈키호테에게는 이 중세의 종말이야 말로 자신이 믿었던 세상의 종말이라고 생각되었고, 이것을 바로 잡고자 하는 의지가 그를 길로 내몰아 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기가 믿어 왔던 진실과 새롭게 다가오는 진실이 어긋나고 있을 때 이들은 결국 집을 나서게 되는 겁니다.
Just the two of us,
we can make it if we try
글의 제목과 같은 제목 노래의 가사가 정확하게 이 상황을 설명해 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나서서 우리의 손으로 세상을 바로 잡아야 하는 것.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책에서 읽었던 내용이 떠오릅니다. 밀란 쿤데라는 그의 책 '소설의 기술'에서 세르반테스의 절하된 유산이라는 첫 번째 장을 통해 제가 위해서 얘기한 세르반테스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가 표현한 바를 그대로 적어보면 '신이 우주와 그 가치의 질서를 관장하고 선과 악을 가르고 모든 사물에 뜻을 부여했던 곳을 서서히 떠나 버릴 때, 돈키호테는 집을 나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작가답게 제가 주절주절 하는 말을 간단하게 하고 있네요. 밀란 쿤데라의 표현을 돈키호테의 상황에 맞게 풀어 본다면, 돈키호테에게 본인이 속한 세계가 엄청나게 모호해지고, 절대적 진리인 하늘의 진리(중세의 종교적 진리)가 인간이 나누어 갖는 상대적인 진실 ( 경험을 통해 얻게 되는 새로운 정보와 자본의 편향성은 이미 중세의 십자군 원정을 통해 서서히 자리잡기 시작하는데요) 들로 흩어져 버렸다고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후에 밀란 쿤데라는 데카르트와 헤겔을 인용해 좀 더 철학적인 분석을 내놓고 있는데, 그 높이는 제가 감당이 되는 경지가 아니라서, 저는 제가 늘 바라보는 동시대의 다양한 경제, 문화, 정치, 역사 등의 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이런 돈키호테의 배경을 놓고 본다면, 벌판의 '풍차'에게 결투를 벌이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소설적 환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톨킨이 의도했든 아니든, 밀란 쿤데라의 지적에 의하면 유럽 최고의 발명품 '소설'을 최초로 만든 세르반테스이다 보니, 반지의 제왕에서 돈키호테의 모습이 보이는 건 그리 어색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보니, 돈키호테는 많은 로드무비들의 사상적 원형이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렇게 두 명의 남자들이 길 나서는 (새로운 개척을 하는 또는 경험을 하는) 이야기는 너무나 많은 곳에서 사용되는 주요 구성인데요, 제가 좋아하는 한국의 '라디오스타'도 나를 둘러싼 세상이 변해가는 속에서 나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하는 그런 이야기로 읽힐 수도 있지 않을까요? 또 유사한 구성으로 만들어진 작품 중에 제가 좋아하는 영화로 'The man who would be king 왕이 되려던 사나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숀 코너리와 마이클 케인이 주연을 한 인도를 배경으로 한 두 영국 군인의 황당한 무용담을 그린 영화입니다. 사고뭉치 영국 군인 숀 코너리와 마이클 케인이 인도의 이상한 부족 마을에 도착하게 되는데, 숀 코너리의 가슴에 있는 문신이 그 부족에게 전해오는 전설 속에 이미지와 유사한 바람에 부족의 왕이 되었다가, 점차 이상함을 느낀 부족민에 의해 결국 죽음을 당하는 (영화는 마이클 케인이 홀로 살아남아서 어느 언론인에게 이야기를 해주는 방식으로 전개가 됩니다) 스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화와 전설 그리고 종교와 세속의 관계를 원시적인 인도 부족과 현대적인 영국 병사들을 등장시켜 풀어내고 있습니다. 이상을 꿈꾸던 숀 코너리는 결국 자신을 절대 선 (부족의 이상)으로 생각하던 집단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고, 현실을 꿈꾸던 마이클 케인은 자신이 준비해둔 현실을 통해 살아남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고 있노라니, '악마의 시'도 떠오릅니다. 작가 살만 루시디가 이란의 호메이니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는 바람에 작품 자체보다 오히려 종교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이슈로 유명해진 작품인데요, '마술적 사실주의'란 방법으로 쓰인 이 소설의 첫 부분에도 비행기에서 추락하고 있는 두 명의 남자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두 주인공이 추락하는 비행기에서 하는 행동과 주변에 대한 묘사는 마치 코미디 영화에 출연한 두 주인공이 어떤 유명한 비행기 영화 추락 장면을 패러디하기 위해, 스튜디오에서 연기하고 있는 것을 슬로우 모션으로 보여주는 것과 같은 상황으로 그려집니다. 이렇듯 처음부터 자신의 소설은 상상력에 기반으로 한 유머 코드 가득한 작품임을 밝히고 있는 작가의 의도가 현실에서는 본인에게 실제로 내려지는 사형선고를 통해 블랙코미디로 바뀌어 버리는 거대한 아이러니가 돼 버렸습니다. ( 살만 루시디는 영국 정부에서 제공하는 안가에서 은둔생활을 해오고 있으며, 이 작품을 번역한 각국의 번역자들 역시 테러의 대상으로 많은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이란 정부는 사형선고에 걸려 있던 현상금을 취소하겠다는 공식 발표를 했지만, 이슬람 율법에 따라 선고를 내린 사람만이 선고를 취소할 수 있기에, 호메이니가 죽은 현재 사형선고는 계속 유효한 상태입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얘기가 옆으로 새고 있는데, 왕이 되려던 사나이는 영화 음악을 담당했던, 모리스 자르의 영화들을 묶어서 이야기하는 게 재미있을 것 같고, '악마의 시'도 마르께스의 작품들과 연관 지어서 얘기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여튼 이번 편에서는 돈키호테로 돌아가 거기에서 제가 보고 있는 '풍자'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돈키호테는 1605년에 1부가 출간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시기의 유럽 역사를 바탕으로 돈키호테를 읽어 보았습니다. 과연 무엇이 돈키호테에게 세상이 바뀐다고 생각이 들게 했을까요?
15세기 후반에서 17세기 또는 거의 18세기 중반까지의 유럽은 '대항해 시대'였습니다. (게임 제목이 아닙니다). 이전에 다른 글에서 움베르토 에코의 '전날의 섬'과 연결해서 이 시기를 경도(위도와 경도의)를 찾던 시기라고도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요, 유럽 각국이 경쟁적으로 세계를 돌아다니며 항로를 개척하고 탐험과 무역을 하던 시기입니다.
그 출발점은 당연히 경제적인 이유입니다. 미지의 세계에서 들여오는 황금과 갖은 진귀한 상품들은 중세를 벗어나기 시작할 무렵, 기존의 정치 시스템이 무너지고 새로운 정치 시스템을 도입해야 할 필요를 절실히 느끼고 있던 유럽 왕가들에게 있어 필요한 '자본'의 중요한 공급처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대항해의 시대의 시작을 알린 이가 포르투갈의 왕자 '엔히크'였고, 그 유명한 콜럼버스도 스페인 왕실의 후원으로 항해를 시작했던 것이죠.
중세의 봉건주의 하에서 생각해 보면, 새로운 계급의 탄생은 전쟁터에 참가해서 공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사들에게 그들이 전쟁을 통해 빼앗아 온 땅과 전리품의 일부에 대한 권리를 부여하고, 나머지는 가지고 가서 시스템을 유지하는 원천으로 사용했던 중세의 왕들에게 십자군 전쟁의 실패는 사회 시스템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는 대 사건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를 대신할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했고, 유럽의 왕실은 십자군에 내 보내는 대신 새로운 대륙을 탐험해서 전리품을 가져오게 하기 시작하는 것이었죠.
그렇게 시작된 이 '대항해 시대'는 중세의 십자군 원정에 이은, 또 다른 탐험 열풍을 불러오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미지의 세계를 지도도 없이 '신의 가호' 하나 만으로 떠나고 있는 초기 항해가 들은, 성공해서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지만, 많은 이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게 죽어갔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는(신세력) 새로운 기회의 창출이 누군가에게는(구세력) 내 세계의 종말을 의미하게 되는 겁니다.
또, 이렇게 무모한 모험을 떠나는 탐험가들의 모습 자체에서, 저는 세르반테스가 창조해 낸 주인공 돈키호테의 모습이 보이기도 합니다. 비록 그 외모는 뱃사람의 모습이 아닌 유행이 지난 중세 기사의 모습이라 많이 다르긴 하지만요.
중세의 기사는 현대의 벤처 창업가와 비슷한 부분이 있습니다. 펀딩을 받아서 장비를 마련하고, 전쟁에 참가해서 큰 공을 세우면 땅을 하사 받아 부와 명예를 만들 수 있는 중세의 시스템도 한 번쯤 들여다 볼만 할 것 같습니다
미지의 세계에 존재하고 있을, 미처 알지도 못하는 끝도 없는 많은 장애물에 뛰어드는 역사적 변혁 속에서, 세르반테스의 머릿속에는, 인간의 비이성적인 무모함, 하지만 그를 통해 세상을 바꾸려는 개척 정신 이런 다양한 것을 떠올리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위대한 세르반테스는 이러한 다양한 배경을 풍자를 통해 보여줌으로써, (다시 한번 밀란 쿤데라의 말을 빌어) 지난 4세기 동안 유럽의 가장 중요한 발명 중 하나인 '유머'를 세상에 선보이게 됩니다.
몰락한 구세력으로 외양을 꾸민, 하지만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있는 주인공을 통해, 시대가 변화하는 과정에서의 세대 간 이념의 차이와, 인간의 무모함을('도전'이라는 멋진 말로 주로 불리는) 통해서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고 있는 세르반테스.
그가 인류를 위해 만들어 낸 두명의 친구들이 Just the two of us를 부르며, 세상을 향해 똥침을 날리는 모습이 머리 속에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