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인가? 진보인가?
나이가 들면서 점점 감상적이 되는지, 넷플릭스에서 '러브 액츄얼리'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크리스마스도 지난 마당인데 오랜만에 보고 있노라니, 처음에는 몰랐던 부분도 눈에 들어오고, 새로운 편집판인지 제 기억으론 처음 보았을 때는 없었던 장면이었는데, 호빗의 주인공 '마틴 프리먼'과 개빈앤스테이시의 '조안나 페이지'가 나오는 낯 뜨거운 장면도 새로 들어가 있더군요. 처음에 그 장면을 보았더라면, 마틴 프리먼과 조안나 페이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별 감정 없이 보았을 텐데, 지금 보게 되니 나름의 스타들이 저런 장면에 카메오로 출연한 건가 하는 생각이 잠깐 듭니다.
(개빈앤스테이시는 한국에서는 낯선 드라마이지만 영국에서는 꽤 인기가 있었던 작품인데요, 각본을 쓰고, 조연으로도 출연했던 제임스 코든이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한 배경이기도 합니다. 제임스 코든의 택시 가라오케를 좋아하셨다면 이 토니상 개막 공연도 꼭 보시길 권해드려요. https://youtu.be/psFLbMpKh7M
그의 외모를 통해 생기는 일반적인 선입견을 고려하면 코든의 성공은 오로지 그가 가진 재능이라고 밖에 설명되지 않는데, 이 짧지만 재치 넘치는 공연은 그것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쓰고 연기하고 춤추고 노래하는, 이렇게 적고 보니 제임스 코든은 뭐든지 다 잘하는 거였나요 )
러브액츄얼리의 다양한 주인공들 중에 처음 저를 사로잡았던 배우는 빌 나이 였습니다. 2000년대 초반인 영화의 개봉 당시에는 인터넷을 뒤져봐도 이 배우의 정보를 찾기가 쉽지 않았고, 정말 한 시대를 풍미한 록 가수 마냥, 락 비트를 정확하게 노래에 띄어 표현하던 음악성에서 혹시 진짜 가수였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후 본격적인 할리우드 진출을 통해 점점 더 빌 나이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이제 그의 연기는 많은 후배들에게 모범적인 연기의 전형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많은 영화에서 후배들이 빌 나이의 연기 스타일을 따라 하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요. 어쨌건 빌 나이가 말론 브란도나 로버트 드니로는 아니니까요. (트립투 이태리에 나왔던, 스티브 쿠건이 팔로미나의 기적에서 보여주는 연기는 단순 오마주를 넘어서서 완전히 빌 나이를 빙의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
위의 극 중 장면이 생각나세요? 저 극 중 배경에 나오는 백코러스와 댄서들의 이미지는 영국 코미디 업계의 대부 베니 힐 쇼에서 나오던 전형적인 이미지 세팅입니다. 얘기하기 민망한 카메라 앵글 등도 베니 힐이 아주 선호했던 그 장면 그대로이고요.
그걸 보면 위에서 말씀드린 마틴 프리먼이 등장하는 이상한 성인용 장면이 이해가 가긴 합니다.
"얘들은 가라"라고 외치던 우리네 약장수 멘트를 기억하신다면, 감독의 의도가 들어 오실텐데요.
'훈훈한 이야기이지만 그래도 이 영화는 성인용입니다'를 계속 보여주고 있었던 거지요.
빌 나이 이야기가 길어진 건, 우연히 IPTV의 영화 찾기를 하던 중에 영화의 소개 이미지에 빌 나이가 보였다는 이유로 보게 된 영화 이야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영화를 선택하는 이유가, 감독이나 줄거리, 주연배우가 아닌 이렇게 조연으로 출연한 배우 때문이기도 한데, 바로 '런던 프라이드'가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원제목은 'Pride'로 실제 영국에서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소외받던 두 계층인 광부와 동성애자들이 사회의 편견 (사실 서로 간에도 높이 쌓였던 )에 맞서 투쟁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희한한 건 영국 게이식 영어를 잘 연기했던 주인공이 놀랍게도 미국 배우더군요)
영화는 동성애자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한 모임에서 자신들의 소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자신들처럼 핍박받고 사회적인 약자의 위치에 있던 광부들을 후원하자는 아이디어에서 시작합니다. 하지만 막상 후원금을 주겠다고 해도, 각 지역의 광부 노조들은 동성애자의 후원을 받을 수 없다면서 이들의 제안을 거절하는데, 우연히, 연락을 받게 된 광부 노조의 사무실 담당자가 귀가 잘 안 들리는 나이 든 할머니였던 겁니다. 그래서 동성애자 모임의 후원 인지도 모르고 찾아온 노조 대표와 인연이 되어, 광부 노조와 동성애자들이 함께 자신들의 권리 획득을 위해 런던에서 행진을 준비하게 되는데요.
영화에서나 현실에서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색안경을 쓰고 보고 있다고 불평을 하면서도 동시에 나와 다른 사람들을 우리 스스로도 색안경을 쓰고 보고 있는 현대 사회가 가지고 있는 편견과 오해에 대한 현상을 솔직하지만 훈훈한 에피소드를 통해 그려내고 있습니다.
색다르게 보였던 대목 중 하나는 도미닉 웨스트가 연기한 조나단 블레이크였습니다.
실제로 영국에서 AIDS 진단을 두 번째로 받았다는 실존 인물인 조나단 블레이크는 극 중에서 연기자 설정되어 있는데요, 이 정열적인 배우는 보수적인 광산촌의 마을 행사에 가서 무뚝뚝한 광부들에게 정열적인 춤을 가르쳐 줍니다. 촌스러운 시골 사람들이 그를 따라 춤을 추며, 삶의 새로운 면에 눈을 뜨게 되는 장면을 보면서, 그의 나이에 저런 연기를 하는 재능이 뭔가 거리의 댄서 출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이 배우는 사실 그 유명한 '이튼' 스쿨을 나온 영국의 엘리트 집안 출신 배우입니다.
영국 출신 배우들은 이런 부분에서 놀라움을 많이 주고 있습니다. 에디 레드메인, 톰 히들스턴 등이 이튼 출신이고,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해로우 스쿨 출신입니다. 한국에서는 서울대를 나온 연예인들이 약간 특별 대우를 받는 느낌도 없잖아 있지만, 영국에서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007 대니얼 크레이그의 부인인 레이철 와이즈가 캠브리지 출신이라며 일부 네티즌이 영국의 김태희로 부르기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유명한 캠브리지 출신 배우로는 닥터 하우스의 주인공 휴 로리(가끔 미국 사람으로 오해를 받기도 하죠)와 휴 로리와 동창인 엠마 톰슨이 다 캠브리지 출신입니다. 캠브리지 출신은 꽤 많아서, 심지어 영국 수사물에서 범인인 옥스퍼드 출신 여자 연출가가 캠브리지 남성들이 영국 연극계를 쥐락펴락하는 것에 화가 나서 살인을 한다는 설정이 나온 적도 있습니다. 옥스퍼드 출신은 미스터 빈의 주인공 로완 아킨슨이 떠오르네요.
영국에서 대학 준비과정에서 진행되는 연기 수업을 잠깐 청강한 적이 있었는데, 연기(Acting)는 영국 학교 시스템에서 상당히 중요한 과목으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문학과 인문학적인 이해도를 높이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는 과목으로 여기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돌아와, 영국 사회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극도로 보수적인 (아직도 왕정 시스템이 존재하는) 사회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지만, 사실 히피족이 처음 등장한 것도, 동성애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것도 똑같이 영국이니, 세상은 정반합으로 굴러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높은 파도가 있으면, 그 높은 물결을 뛰어넘으려는 서퍼들을 불러 모으게 되는 법이고, 수많은 도전을 통해 성공을 거두는 도전자들에게는 항상 더 큰 파도가 밀려오는 역사의 흐름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