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스타일을 살려내는 예술
톰 포드가 감독한 <녹터널 애니멀스>에서 예술이 영화의 내러티브를 완성하는데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살펴보았는데요
(지난 편 보기 : https://brunch.co.kr/@milanku205/691
이번 편에서는 드라마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스토리를 스타일리시한 화면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예술을 어떻게 차용하는지의 예를 한번 찾아보려고 합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죠. 라이언 머피가 연출한 <래치드>입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이름을 제목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간호원 래치드는 이미 켄 키시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동명의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 정신병원 관리 책임자로 등장한 적이 있죠. 그녀는 정신병원을 일종의 가상의 전체주의적 사회로 그리고 있는 영화 속에서 독재자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번 드라마는 바로 이 주인공 밀드래드 래치드의 젊은 시절 모습을 그린 일종의 프리퀄 같은 작품입니다.
<글리>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그리고 <더 폴리티션> 같은 인기 드라마와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같은 영화의 연출과 각본 등을 맡았던 라이언 머피는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는 믿고 보는 연출자 겸 제작지인데, 늘 그렇듯 다양한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복잡한 스토리 라인을 매우 빠른 템포와 간결한 구성을 통해 잘 연결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주인공 사라 폴슨을 비롯해 출연진의 연기 역시 나무랄 데 없는 3박자가 딱딱 맞는 드라마입니다.
물론 좀 더 전통적인 스릴러물, 그러니까 서스펜스와 긴장감이 넘치는 심층적인 스토리를 선호하는 팬들에게는 약간은 심심한 스릴러일 수도 있는데, 그 대신 색다른 즐거움을 제공하며 우리의 눈길을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바로 보는 재미입니다.
라이언 머피의 드라마나 영화들은 스토리만큼이나 다양하고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긴 했지만, 그 화면의 구성을 스타일리시 하다거나 또는 아티스틱 적이다 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았는데요, 이번 드라마에서는 작심하고 새로운 트렌드를 선도하고 나섭니다.
화면의 구도와 색상이 최근에 다시 급부상하고 있는 예술사조인 쉬르레알리즘의 영향을 받았음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는 것인데요, 인공지능(AI)과 가상현실(VR)등의 등장으로 지난 몇 년 사이 리얼리티와 버츄얼 사이의 혼돈과 경계가 허물어져 가면서 쉬르레알리즘적인 이미지들이 하나 둘 새롭게 등장하고 있었습니다.
즉 현실인데 리얼리티가 떨어지는 느낌이라던지, 혹은 가상의 세계 같지만 실제로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장면들이라던지 이런 것들이 교차하는 이미지들을 통해 우리의 상상인지 아니면 현실인지에 대한 인식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는 것인데요, 최초의 쉬르레알리즘 선언인 "현실을 보다 높은 예술적 차원에 옮겨놓은 것" 과는 결이 조금 다르지만 훨씬 동시대적인 쉬르레알리즘들이 탄생한 것이죠.
가구 브랜드의 카탈로그에서 발견되는 다음과 같은 이미지들이나
신진 사진작가들의 사진 작품에서 찾게 되는 아래 이미지들의 감성들이
바로 드라마 <래치드>의 화면 구성이나 세트 디자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색다른 디자인 어법들이었습니다.
경사진 단면에 예쁜 정원을 가꾸고 있는 바닷가의 모텔, 과연 이런 곳이 또는 이런 장면이 실재할까요?
바다와 하늘을 가르는 수평선과 모텔의 외부 도색이 묘하게 그라데이션을 이루는 모습
아주 색다른 쇼핑몰의 마네킹들
글래머러스한 호텔 인테리어를 연상시키는 병원의 로비
넓은 공간을 광각으로 잡아서 더 비현실적으로 커 보이는 원장실
화려한 장식이 배제된 채 주인공의 심리 상태를 배경색의 전환만으로 보여주고 있는 장면 등
이번 드라마의 화면 구성들은 이제껏 라이언 머피의 드라마들에서 흔히 발견되지 않는 이미지들이었습니다.
물론 <더 폴리티션>등에서도 일종의 만화 속 장면처럼 약간은 비현실적인 세트를 꾸미는 경향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거기에서 훨씬 더 나아가 예술적인 세련미를 더하고 있습니다.
라이언 머피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 재미있는 장면을 그의 최신 영화인 <더 프롬>에 숨겨 놓고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메릴 스트립이 펴보고 있는 책자가 바로 "쉬르레알리즘"이네요
이런 색다른 느낌을 주기 위해 과거 할리우드의 전성기 시절 화려했던 황금빛 인테리어에서 많은 아이디어를 가져왔다고 하는데, 세트 제작팀이 건축과 인테리어 전문 잡지 AD와의 인터뷰를 통해 밝히고 있는 내용들을 살펴보면 이들은 20세기 초반 미국의 인테리어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Dorothy Draper의 "모던 바로크"스타일을 토대로 작업을 했다고 합니다.
아래는 그녀가 작업한 호텔 인테리어 모습들인데요
인테리어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드라마 속 장면들과 비교해보는 재미도 꽤 쏠쏠할 듯싶습니다.
<래치드>는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와 라이언 머피의 나무랄 데 없는 연출에 더해, 미니멀리즘이 인테리어 트렌드를 선도하고 있는 요즘, 과거 할리우드의 거대하고 그래머러스 한 황금빛 인테리어를 맛볼 수 있다는 추가적인 재미까지 갖춘 색다른 드라마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