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디그>가 넷플릭스 오리지널의 택을 달고 새롭게 스트리밍을 시작했습니다.
The Dig (일명 땅파기)라는 단순한 제목의 이 영화는 excavator (굴착하는 사람)라고 불리는 발굴작업의 전문가를 고용해 자신의 땅에 묻힌 과거의 시간과 스토리를 캐내고자 했던 한 미망인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오랜만에 제 마음에 딱 드는 영화였는데요, 영화의 각 장면들이 한 장 한 장 작품 사진의 프레임처럼, 멋진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고, 이런 멋진 무대 위에 올라선 두 배우의 정제된 연기 역시 어디 하나 부족함 없는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실화를 배경으로 많은 감동을 선사해 주는 명작들처럼 심층적인 스토리들이 포함된 영화의 내러티브와 반전을 통한 인간승리 같은 엔딩을 기대하신다면 아마도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심심하고 지루함을 느끼실 것 같습니다. 해외 평론가들의 평도 무척이나 갈리는 편인데, 롤링스톤지의 평론가는 반전을 통한 인간 승리가 담긴 그런 영화를 기대했었나 봅니다. (꽤 지루한 영화라고 쓰고 있네요)
영화를 사랑하는 팬들이라면 새로운 영화를 고를 때 각각 나름의 선택 기준들을 가지고 있죠.
이 영화를 선택할 때 제 기준은 두 명의 주연 배우 레이프 파인즈(웨일스 이름이라서 레이프 파인즈로 발음해야 한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와 캐리 멀리건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영화에 빠져 들게 되면서 점점 저를 사로잡았던 것은 바로 카메라가 잡아내는 프레임의 완벽함이었는데요
영화의 시작부에서는 지속적으로 extreme wide shot을 통해 원거리의 풍경을 보여주며, 대사가 아닌 화면을 통해 감독이 소통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존재에 관한 가장 심오한 의문 중에 하나인 이 문장은 극 중 주인공들이 왜 발굴을 하는지, 할 수밖에 없는지에 관한 중요한 이유가 되고 있는데, 지속적인 wide shot을 통해 감독은 하늘과 땅을 수평으로 나누는 구도 하에서 하늘이 차지하는 비율을 아주 극단까지 밀어붙이며, 과거(묻힌 유물)에서 미래(화면을 가득 메우는 하늘)를 발견하고자 하는 주인공들의 심정을 스토리가 아닌 이미지를 통해 함축적으로 드러나게 하고 있습니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레이프 파인즈가 발굴을 의뢰한 의뢰인을 만나러 가는 장면입니다. 새로운 여정에 나서고 있는 주인공의 눈에 들어오는 첫 풍경은 보편적인 프레임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점차 더 넓은 공간을 프레임에 담아 넣기 시작하며 화면의 대부분을 하늘로 채우고 있습니다
이번 발굴은 아마도 아주 기나 긴 여정을 거치게 되려나 봅니다. 점점 더 멀고 넓은 하늘이 스크린을 메우고 있죠. 저 하늘 뒤에는 무엇이 존재하고 있을까요?
이번 발굴의 끝에 과연 주인공들은 어떤 역사 속 존재들의 실체를 발견하게 될까요?
이 연속되는 오프닝 씬들은 단지 하늘의 비중만 큰 것이 아니라 컬러톤 마저 그레이를 주로 하고 있는데 미래를 향한 혼돈과 의심의 냄새가 물씬 풍겨 나고 있습니다.
의뢰인인 미망인과 발굴 전문가가 발굴을 할 부지로 등장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과연 주인공이 이 장면에 등장하는지 확인 조차 어려울 만큼 먼 거리에서 화면을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행해야 하는 일들은 현실(땅)에 근거를 두어야 할 테니 화면 속에 땅(대지)의 비중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화면의 오른쪽에 햇살이 등장하며 쿨톤의 색감에서 조금씩 웜톤(warm tone)으로 전이되어 가고 있습니다.
장면이 바뀌어 우연곡절 끝에 제안을 수락하고 첫 삽을 퍼는 순간이 되면, 화면을 가득 매운 풀밭(땅) 위로 삽과 그 삽을 땅에 밀어 넣기 위해 발로 삽을 밟고 있는 모습이 클로즈업되고 있습니다.
상상에서 현실로 돌아온 것일까요? 화면 오른쪽 상단에 지는 해의 자취가 등장하며 기대감을 불러오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점점 카메라가 멀어지며 다시 그레이 하늘이 조금씩 넓어지고 있는데
다시 넓은 하늘이 등장하지만 이번에는 역사를 향한 (시간을 찾아 나서는) 인간의 의지를 드러내려는 듯 좌측 화면을 위에서 아래까지 주인공이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조금씩 답을 찾아 나가는 주인공들의 머리 위로 구름을 뚫고 해가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이윽고 장면이 바뀌며, 무언가를 찾은 발굴 전문가는 흥분된 목소리로 의뢰인에게 보셔야 할 것이 있다고 직접 전하고, 그렇게 그들은 무엇이 발견되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발굴 중인 봉분을 걸어 올라가고 있습니다.
카메라는 주인공들의 뒤를 따라서 지면에서 하늘을 향한 시선으로 시작해서 점차 위에서 아래로 마치 주인공의 눈이라도 된 듯 방향을 바꾸며 마침내 그들이 찾아낸 것을 화면 가득히 클로즈업해냅니다.
연기력으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두 명의 명 배우를 출연시키고 있음에도 그들의 얼굴을 화면 가득히 잡아서 대사처리를 보여주는 영국 영화의 관성적인 화면 구성을 깨고 이 영화는 아주 색다른 시도를 통해 관객과 소통하고 싶어 하는데요, 이렇듯 감독이 던지는 새로운 시선을 찾아보고 싶으시다면 놓치지 말고 꼭 봐야 할 영화라고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영화는 화면 가득 시각적으로 보이는 하늘과 땅을 교묘히 배치하며, 과거와 미래, 시작과 끝을 이미지로 치환하는 데 성공하고 있으며,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와 같은 무거운 질문을 표면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이미지화된 기호로 반복적으로 암시하면서, 등장인물들의 대사 속에 배(ship), 바다, 우주와 같은 단어를 등장시켜서 우리의 상상 속에 바다를 가로질러, 광활한 하늘 위를 날아가는 미래를 꿈꾸게 유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관객들의 머릿속에 자리잡기 시작한 상상의 나래가 펼치는 날갯짓은 발굴을 의뢰한 주인공이 그녀의 아들과 함께 발굴된 배의 자취 위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며 나누는 대화의 소리들과 공명되어 더 큰 몸짓으로 변해 스크린 가득히 비치는 어두운 밤하늘 위로 훨훨 날아가기 시작합니다.
롤링 스톤즈의 David Fear가 영화 내러티브의 심층에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아서 안타깝고 지루하다고 평을 하고 있는데, 스토리만을 가지고 영화의 내러티브를 논하고자 한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어떤 영화는 미장센이 훌륭해서 어떤 영화는 음악이 뛰어나서 와 같이 다양한 이유로 영화를 즐기는 분들이라면 must-see 리스트에 올리셔도 후회하지 않을 영화입니다.
특히 멋진 사진들이 연결되어 정적이고 잔잔한 흐름을 통해 영화가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는 <더 디그>는 시각예술을 좋아하는 영화팬들에게 아주 어울리는 영화라고 생각됩니다.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 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