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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수의 왕 Feb 13. 2021

 소리, 서스펜스를 창조하다

스릴러물을 좋아하는 영화팬에게 알프레드 히치콕이란 이름은 마치 중세의 성배와 같은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근원을 찾아 나서는 끝없는 여정의 목표가 되고 있으니까요.


히치콕은 서스펜스라는 당시로는 새로운 하지만 현재에 와서는 대세가 돼버린 영화 장르의 개척자이지요.


저는 이 히치콕 감독을 생각하다 보면 앤서니 홉킨스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 <히치콕>의 장면들이 잘 떠오르곤 하는데요 특히 다음의 장면이 그렇습니다.



히치콕은 <사이코>의 가편집본이 영화사 임원들에게 좋지 않은 평을 받게 되어 아주 의기소침한 상태로 절망에 빠져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아내이지 영화 편집자인 알마는 일부 장면에 음악을 삽입해서 재편집을 하자고 히치콕을 설득하고 그렇게 완성된 영화가 드디어 개봉되게 됩니다.  개봉일 히치콕은 극장 문에 귀를 댄 채 안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반응을 살피는데, 긴장된 얼굴로 극장 문 안의 상황에 집중을 하는 중 갑자기 그 유명한 "The murder" (shower scene)의 날카로운 현소리가 관객들의 비명과 어우러지기 시작하고 긴장했던 앤서니 홉킨스의 얼굴이 점차 만족스러운 웃음으로 가득 차기 시작하며 화면이 전환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_4ijcxqPXs


히치콕의 영화를 좋아하는 팬들뿐 아니라 많은 일반 영화팬에게도 날카로운 현의 "둠~둠~둠~둠"하는 <사이코>의 유명한 살인 장면에 울려 퍼지는 오싹하고 긴장감 넘치는 소리는 히치콕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여겨질 듯한데요, 오늘은 이 서스펜스를 대표하는 소리들을 창조해 낸 영화음악가 버나드 허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히치콕의 대표작인 <현기증><사이코> 등의 음악을 작곡했고 한 세대를 건너 마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에서까지 유감없이 솜씨를 발휘한 그는 미국의 유명한 음악학교 줄리어드에서 작곡을 전공한 클래식 음악가 출신입니다. 그렇기에 영화음악 외에도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그리고 오페라 교향곡 등의 작곡에도 힘을 쏟았지만 아쉽게도 그리 성공적인 결과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1930년에 접어들면서 영화계에는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드디어 필름에 소리를 동기화시킬 수 있는 유성영화 기술이 발견되기 시작한 것이죠. 이전까지 영화의 스토리와 상관없는 별도의 녹음된 음악을 틀어주거나 또는 피아노 등을 이용해 극장 한편에서 영화의 장면에 맞는 음악을 라이브로 연주하던 것과 비교하면 각 장면에 어울리게 작곡된 음악들은 영화가 보여주는 스토리텔링에 관객들이 완전히 빠져들게 만드는 감정의 동기화를 이루어 내게 됩니다. 이런 극적인 변화가 불러오는 영화계 전체의 긍정적인 효과는 영화 작곡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키고 있는데, 초기의 대표적인 작곡가 중 한 명이 바로 버나드 허먼입니다.


초기 영화음악을 선도했던 대표적인 작곡가들은 고전음악을 전공한 백그라운드를 지니고 있다 보니 유럽 고전 음악에서 다양한 구조적 뿌리를 가지고 오게 됩니다. 특히 버나드 허먼은 스스로를 신낭만주의 음악가로 규정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그의 음악은 다양한 감성과 분위기를 묘사하는 감정의 변화폭이 큰 소리들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가 친구에게 남긴 편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더욱더 그의 음악적 스타일에 수긍이 갑니다.


"나는 음악을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표현 형태로 생각한다. 나는 시나 예술 그리고 자연에서 받은 영감으로 음악을 작곡하길 좋아하고 단순히 장식적인 음악은 관심이 없다. 그렇기에 현대적인(그 당시를 기준으로) 작곡기법을 통해 단지 어떤 스타일을 묘사하는 음악보다는 거대한 사고나 더 깊은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고 싶다"


https://www.youtube.com/watch?v=kC5AzFc3coo


오스티나토의 제왕으로 불렸던 버니(버나드 허먼의 애칭)의 대표곡이죠. 영화 <현기증>의 테마입니다. 동일한 멜로디의 베이스가 다양한 악기로 바뀌어가며 연주되고 관이 그 사이사이를 뚫고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습니다. 오스티나토는 바로 이렇게 동일한 멜로디가 반복적으로 (연주되는 음의 높이도 거의 동일합니다) 지속되는 기법을  의미합니다. 


이 테마는 훗날 레이디 가가의 <Born this way>에서 차용되기도 하죠. 사실 버나드 허먼의 업적에 비하면 그의 작품이 후대에 미친 영향은 상당히 제한적인데, 아마도 음악만 독립적으로 들을 경우, 귀에 쏙 들어오는 쉽고 편한 멜로디가 많지 않아서 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V1FrqwZyKw




193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를 돌이켜 보면 클래식 음악계에는 상당히 다양한 새로운 기법들이 등장하는데, 그런 시기에 새로운 작곡기법이 아닌 19세기를 지배했던 낭만주의로 자신의 음악을 규정한 이 작곡가는 그렇기에 어찌 보면 상당히 보수적인 음악 언어만을 사용한 것이 아닌가 오해하기 쉬운데요, 그의 대표작이라고 소개해 드렸던 <사이코>의 음악을 예로 보면 작곡자는 새로운 관점의 소리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이코>의 OST는 오로지 현악기로만 이루어진 오케스트라에 의해 연주되도록 작곡되었습니다.

그렇기에 관과 타악기를 총체적으로 사용하는 일반적인 영화음악에 비해서 소리의 다채로움, 복잡한 리듬, 다이내믹의 폭 그리고 음역의 고저에 많은 제약이 주어지지만, 현을 뜯고 치는 색다른 기법과 더블베이스의 최저음에서 바이올린의 고음을 대비시키는 차별화된 연주방법을 통해 이 영화 전후에 발표된 다양한 영화음악들과는 많이 다른 영화 서사가 담고 있는 묘한 심리적 상황들을 음악을 통해 관객들에게 더 깊숙이 침투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장면으로 한번 보실까요?


https://www.youtube.com/watch?v=fQwzJ6VvUD0


오케스트라용으로 쓰인 영화음악들은 이처럼 오케스트라가 단독으로 연주하는 자료들을 보면 훨씬 이해가 쉽습니다. 바이올린과 더블베이스를 오가는 음폭과 현을 뜯는 다양한 손동작들을 보시면 그 각각의 소리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눈에 쏙 들어오게 되죠.




그의 대표작들이 히치콕과의 협업이 많기 때문에 히치콕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을 것이란 선입견이 있을 수 있지만 이 두 명의 거장은 그들이 마지막으로 함께 한 <찢어진 커튼>을 놓고 의견 대립이 생기면서, 완전히 결별하게 됩니다.


여기에 관해서는 많은 이야기들이 흘러나오지만 가장 유력한 설은, 히치콕은 당시 음반시장에서 새롭게 떠오르던 OST 시장에서 효과적인 판매를 위해 특징적인 멜로디가 들어간 음악을 요구했다고 하는데 이런 부분이 작곡가의 철학과 거리가 멀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런 음악 스타일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버나드 허먼의 광팬들은 존재하지만 평균적인 영화음악 애호가들에게 그의 음악이 큰 인기를 못 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는데요, 가장 멜로디적으로 유명한 작업을 꼽으라고 하면 아마도 유작인 <택시 드라이버>가 아닐까 싶습니다.


버나드 허먼의 멜로디는 어떤 느낌인지 한번 들어보시죠.


https://www.youtube.com/watch?v=Bx4aK-YsPeU






같은 시대를 풍미한 Korngold나 Max Steiner 등 유럽 출신의 작곡가들이 독일 오스트리아 등 클래식 음악의 주류 작곡가들에게서 영감을 많이 받고 있는 것에 비해 버나드 허먼은 프랑스 6인조로 알려진 스위스 출신 작곡가 호네거의 음악을 좋아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호네거의 음악은 그의 이름만큼이나 우리에게 익숙지 않은 편인데요, 그나마 <Pacific231>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xSAPzD79_I


증기기관차의 모습을 소리를 통해 묘사했다고 하는 이 작품은 작곡가 호네거의 열렬한 기차 사랑에서 탄생했다고 하는데, 어딘지 모르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 출발을 앞두고 있는 거대한 기계에 대한 흥분과 미스터리 그리고 불안감 같은 요소들이 느껴집니다. 


음악의 부분들을 따서 히치콕의 영화 한 부분에 삽입한다면 아주 그럴듯하게 어울릴 것 같은 느낌 아닌가요?


   



영화 속 내러티브들이 다양한 이미지를 통해 연결되어 가는 과정에서 소리는 관찰자들의 감성을 건드리며 상호 신뢰와 참여의 정도를 높여나가고 종국에는 내러티브가 가지고 있는 감정의 깊이를 전달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 않나 싶은데요,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버나드 허먼은 아마도 영화라는 장르가 발명된 이후 영화 예술이 표현할 수 있는 외형적 기술발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여자 중 한 명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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