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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수의 왕 Mar 15. 2021

<Robert Mapplethorpe>展

국제 갤러리에서 로버트 메이플소프 사진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작가의 기일인 3월 9일을 전후로 많은 트위터 글에서 그의 이름을 접했기에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어서 두꺼운 마스크를 준비하고 국제 갤러리를 향했습니다.



 총 91점의 사진작품이 1층과 2층으로 나뉘어 전시되고 있는데, 1층은 "Sacred and Profane"이라는 타이틀 아래 41점을 선보이고 있으며 2층은 좀 더 하드코어적인 작품들을 모아서 "The Dark Room"이라는 타이틀로 묶어내고 있습니다.


워낙에 유명한 사진작가이기에 작가의 바이오 그라피나, 또 국제갤러리의 전시회 설명에 올라온 표현인 "Eros and Thanatos, death and sexuality"와 같은 전위적인 주제들을 드러내는 작가의 사진작품을 놓고 벌어진 예술적 표현의 한계에 관한 논쟁들은 많이 소개되었던 같으니 저는 순수하게 이번 사진전에서 제 눈길을 끌었던 몇 작품들에 관한 개인적인 느낌을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재미있게도 골라보니 전부 꽃에 관한 사진이었는데, 그의 탐미적인 예술성이 극단적으로 이끌고 있는 누드와 동성애 소재에 비해 꽃을 찍은 이 작품들은 단순한 정물 사진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그 하나하나가 이끌어내는 메타포에 숨겨진 감정들은 논란이 되는 그의 성적 작품들 이상으로 강력하게 우리 안에 숨겨진 무언가를 끄집어내고 있었습니다. 




1. Flower

    - 1983, Silver gelatin (73.7*61 cm)




화병에 담긴 이 가녀린 줄기가 배경을 가로질러 건너편까지 그 자취를 확장하며 희미한 그림자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본질과 환영이 만들어 내는 순수하고 가느다란 선 사이로 검은색 원이 마치 보름달처럼 떠 있습니다.


이 사진을 보는 순간 예전에 김환기와 루이스 부르주와의 어떤 작품을 보았을 때 생겨났던 감정들이 되살아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었습니다.



      산월 1959


                매화와 항아리 1957


56년 프랑스로 건너간 이후 작업한 위의 작품들은 김환기가 평소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음악, 문학, 무용, 연극 모두 사람을 울리는데 미술은 그렇지가 않다."  "울리는 미술은 못할 것인가."와 같은 미술에 대한 근원적 질문에 대해서 파리에서 얻은 대답으로 생각되는데, 그는 파리에 막 건너갔을 당시 "여기 와서 느낀 것은 시 정신"이라며 "거장들의 작품에는 모두 강력한 노래가 있다"라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멀리 떨어진 고국의 산하, 그리고 자녀들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내포된 이 그림들은 작품을 관찰하는 관람자들의 가슴속에서 공명해 나가며 우리를 울리고 있는데요, 넓은 대륙과 거대한 대양을 건너 멀리 존재하는 사랑의 대상들과 나 사이에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가느다란 감정의 선만이 연결되어 있을 뿐이며, 이 희미한 연결선을 비춰주는, 하늘에 떠있는 둥근달의 모습은 세상 어느 곳에서 바라보아도 변하지 않음을 통해 소중한 이들과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감정의 선이 존재함을 증명해주는 유일한 증거가 아닐까요? 



루이스 부르주와의 <Poids-무게>에서도 근원(베이스)의 무게를 통해 가는 선으로 연결되어 멀리 떨어져 있는 작은 조형물들이 균형을 이루며 위치하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 역시 사랑하는 대상(비록 아주 작을 지라도)을 원거리에서 유지하고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에너지(질량)가 그 아래에 숨겨져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 멀리 있는 누군가 또는 무언가에 대한 아련한 사랑과 애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하지만 간절함이 묻어나는 가녀린 증거.... 



2. Orchid

 - 1989 silver gelatin 71.1*68.6 cm




은밀함속에 감춰져 있는 미와 생의 비밀, 아름다움을 향한 갈망 등이 드러나는 이 사진에선 조지아 오키프의 꽃들이 떠오르고 있는데요,




어디론가 빠져들어갈 것만 같이 시선을 한 점으로 모으는 구도는 근원(미)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키며, 동시에 한없는 부드러움, 곡선미, 숨겨진 것이 드러나는 듯한 은밀함, 백색의 순수함, 무지, 그리고 달콤함 등이 연상됩니다. 


이번 전시회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위에서 언급한 느낌을 강하게 담고 있는 메이플소프의 또 다른 작품으로는 Honey가 있습니다. 


Honey, 1976


순수함과 순진무구를 풀밭에 누운 어린 소녀를 통해 드러내고 있습니다.





3. Two Tulips

 - 1984, silver gelatin 61*58.5 cm





전시장에서 실제로 보면 꽃들 사이에 형성된 팽팽한 긴장감을 느낄 수 있는 이 사진에서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보여주는 근대에서 새로운 세기로 넘어가는 과정에 떠오르는 사랑에 대한 색다른 정의가 느껴집니다.


음악 역사상 가장 농밀한 사랑 또는 어두운 사랑을 보여주는 오페라에서 두 주인공은 함께 할 수 없는 운명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사랑하기에 죽음을 선택하려 했으나 독약 대신 사랑의 묘약을 마시고 헤어 나올 수 없는 미로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게 됩니다.


결국 사랑하는 트리스탄의 주검 앞에선 이졸데는 그동안 그들을 막아선 현실의 모든 장애를 뛰어넘어 영원한 사랑으로 향하는 환희에 불타오르게 되는데,


https://www.youtube.com/watch?v=j8enypX74hU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는 절망, 끝없는 갈망, 긴장, 절정을 꿈꾸었던 내면의 욕망 등이 엄청난 에너지와 함께 폭발하고 있습니다.


가녀린 한쌍의 튤립 꽃으로 이런 강렬한 에로티시즘을 드러내는 작가의 천재성에 자연스럽게 경의를 표하게 된 <로버트 메이플소프 사진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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